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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건물주에게 형사 소송한 썰 4

마지막 이야기

이전에 보았던 경찰들과의 경험으로 인해 걱정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경찰들은 또 저를 그냥 집에 보내려고 했습니다. 형사과였으니 형사라고 하는 게 맞겠습니다. [이전 편 보기]


고소장을 제출하러 왔다 하니, 몇 가지를 물어보시고서는 이전에 이미 신고를 한 적이 있으면 그걸로 됐다. 그걸로 고소가 끝난 거라는 말을 하시더군요.


아니 그런 게 어딨냐, 내가 이렇게 고소장에 증거들까지 다 가지고 왔다.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고소가 다 된 건데 뭘 또 고소하냐는 말만 반복됩니다.

나중에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말하며, 한번 고소한 내용은 다시 고소할 수 없다는 개소리 까지 합니다.


목 구녕까지 욕이 올라옵니다. 제가 우병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합니다.

그렇다면 내 이 얼빠진 새끼를 당장 무릎 꿇리고.....

하지만 저는 우병우가 아니죠. 그냥 동네 쩌리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 형사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였을 겁니다.


뭣도 모르는 어린 노무 시키.

바빠 죽겠는데 괜히 사소한 일로 일거리나 만들려는 귀찮은 녀석.


그렇다고 포기할 수가 있나..


저는 전략을 바꿔 동네 쩌리의 우는 표정으로 이야기합니다.

"아니 일사부재리를 이런데 적용하는 게 맞냐. 나는 소송을 할 권리도 없고 소장에 내 의견 하나 쓸 권리가 없다는 것이냐. 이렇게 고생해서 적어왔는데 읽어보지도 않고 돌려보내려 하니 이게 제대로 된 행정이냐."


얼간이 형사는 맘이 동했는지 찔렸는지, 드디어 가져온 고소장을 받아 읽어봅니다. 이때까지 삼십 분도 넘게 말씨름하며 보냈습니다. ㅠㅠ


형사의 표정이 조금씩 진지하게 바뀌는 게 보입니다.

'어? 이 새끼 이거 장난으로 써온 게 아니네?' 하는 표정입니다.


한참을 읽어보더니 저 쪽 형사에게 가보라고 합니다.

한 시간 정도를 진술하고 드디어 접수가 됩니다. 뭐 접수가 된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만.


그나마 돈이 어느 정도 있고 공부해간 저도 이 꼴인데, 돈 없고 지식도 없는 사람들은 법의 보호를 받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고소 후에도 그녀의 공격은 계속됩니다.

형사들은 뭐 일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전화를 안 받아서 아직 진행이 안되고 있다고 합니다.

뭐 대충 일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얼른 검찰에 넘기기나 해라.


시간이 흐르고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나중에 그녀를 집 앞에서 만났는데

"네가 나 고소했냐?"

라고 물어봐서, 다시 동네 쩌리의 표정으로 "예? 고소요? 무슨 고소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도망쳐옵니다.


그녀는 절대 고소 따위에 굴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더 분노해서 공격을 합니다.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걱정하며 눈을 뜹니다.


검찰로 넘어가자마자 결과가 나왔습니다. 약식 기소되어 벌금형 100만 원이 나왔다고 합니다.

허탈합니다. 차 값 수리비만 100만 원이 넘어갈 텐데.

정식 재판을 요청할 수도 있고, 이 결과로 민사 소송을 해서 수리비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보복이 있을 테니까요.


처참한 날들이었습니다.


건물주를 하면서 기존에도 힘든 일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만 정리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아내가 만류하곤 했습니다. 저 또한 아내와 마찬가지로 월 500만 원이라는 고정 수입이 아까운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안 되겠습니다.

언젠가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누군가를 칼로 찌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이건 사는 게 아닙니다. 아내도 바로 동의합니다.


결국 건물을 부동산에 내어놨습니다. 하지만 건물 매매가 쉽게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녀의 공격은 계속됩니다.

어느 날은 창고 문 도어록을 본드로 잔뜩 붙여서 열고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열은 열대로 받지만 어찌해볼 방도가 없습니다.


회사에 가서도 한숨을 푹푹 쉽니다.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주위에 앉아있는 동료들도 다 저의 이런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동생이 이런 제안을 합니다.


뭐라도 사들고 찾아가서 인사를 해보면 어때요? 저 같으면 엄청나게 잘해줄 것 같아요. 그냥 조금 잘해주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요. 옆 집 쓰레기도 다 제가 치워주고요. 매달 뭔가 사서 선물해드리는 거예요. 만약 그렇게 매달 돈 몇십만 원에 해결된다면 엄청 싼 거잖아요.

얘도 얼빠진 소리 하고 앉아있네.

나는 이 여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볼 정도로 미운데, 그런 사람 쓰레기를 치워주고 헤헤 웃으면서 선물을 가져다주라고?


순간적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이 동생은 그냥 툭툭 말을 내뱉는 친구가 아닙니다. 저는 이 동생이 얼마나 똑똑하고 현명한지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 떠오릅니다.

- Insanity -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

계속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고 더 해볼 것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조금 잘해주는 정도야 시도해봤었지만, 엄.청.나.게 잘해주는 건 시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습니다.


조금 생각이 바뀝니다.

그래, 좋다 이거야. 하지만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인생 최대의 적에게 선물을 사다 바치고 굽신거리며 쓰레기장도 청소해주는 제 모습을 상상하니 몸서리가 쳐집니다.


하지만 한 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내가 이걸 해낸다면?


의외로 작전이 통해서 그분과 잘 지내게 되고(혹은 더 이상의 공격은 안 받게 되고) 제 근심이 사라질 수 있다면?

상상만 해도 좋았습니다.

게다가 이게 통하든 안 통하든 저 자신도 큰 성장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마침 구정이 다가옵니다.

동네 마트에 가서 뭘 살까 골라봅니다. 과일 세트가 좋겠다 생각하다가 아직 미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몸에 안 좋은 스팸세트를 고릅니다. ㅋㅋㅋ


집 앞에 가서 문을 노크하니 문구멍으로 저를 보고는 왜 왔냐고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설이라 선물을 사 왔다고 하니 의심스러운 눈으로 문을 열고 나오십니다.


그동안 마인드 컨트롤을 많이 했습니다.

제 보통의 모습보다 훨씬 친절하게, 훨씬 정중하게 대화를 합니다.

설 잘 보내시고 오해가 있으면 잘 풀어보자 이야기를 합니다. 선물도 드립니다.

그분도 마음이 살짝 동했는지, 너랑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면서 언제 시간 좀 내줄 수 있냐 합니다.


'당연히 내줄 수 있지! 지금 내 인생에서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데.'


아무 때나 좋다 하니 내일모레 버거킹에서 만나잡니다. 버거킹에서 보잔 말이 좀 우습긴 했는데 웃지 않고 잘 참아냈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서 카메라를 하나 더 삽니다. 그래 봐야 2만 원 밖에 안 합니다.

쓰레기 청소하시는 분들에게도 돈을 좀 더 주고 옆집 청소까지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드디어 버거킹 회담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카메라를 선물로 드리면서 집 앞에 제가 설치해드리겠다고 합니다. 저랑 같이 영상을 공유해서 볼 수 있으니 누가 낙엽이나 쓰레기 가져다 버리는지 한번 보자 합니다.

쓰레기 청소도 제가 해드리겠다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감정은 매우 쉽게 변합니다.

그분은 이제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않습니다.(어머니에게 들으니 이제 저희 앞집 쓰레기통을 발로 차고 다닌다고 합니다 ㅋㅋㅋ)

저 또한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분에 대한 미움이 사그라듭니다. 가끔 카메라가 잘 안된다 전화가 오면 심지어 반갑기까지 합니다.

지난 추석에는 스팸세트가 아닌 과일 세트를 선물해드리고 왔습니다. 나는 준비한 게 없는데 뭐 이런 걸 자꾸 가져오냐 하며 미안해하고 고마워하시더라고요. 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시라고 했습니다.


예, 저는 이 일을 겪고 나서 많이 성장했습니다.

누군가 싸움을 걸어왔을 때 이를 온몸으로 받아낼지 옆으로 흘려버릴지를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런 일을 계속 겪으면서 성장하는 건 어떠냐고요?

으~~ 싫습니다. 앞으로 제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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