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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꾼 달리기

20년 전 오늘, 그러니깐 2001년 11월 5일은 제가 군대에 입대했던 날입니다.


논산 훈련소.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는 21살 얼간이었습니다.

군대에 가기 얼마 전, 입대 영장을 받아 보고는 무서웠습니다.


'진짜 군대를 가야 하나?'


웹브라우저를 켜서 그제야 병역특례란 걸 찾아봅니다.

하지만 병역특례라는 것은 아무 능력 없고 준비도 안된 얼간이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금세 깨닫고는 포기합니다.


쪼그만 방 안에서 팔 굽혀 펴기를 합니다.

군대에 가려면 강해져야 하니깐. 미리 준비해놔야지.

무서웠습니다. 잘 해내지 못할까 봐.

그때 키가 183cm. 몸무게가 55kg이었습니다.

온몸에 가죽밖에 없었다고 할까.


열몇 개나 했을까?

바닥에 쓰러져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 몸이 왜 이렇게 약해졌지? 그동안 난 뭘 하고 산 거지?'




결국 그날이 왔습니다.

처음 내무반에 다들 모여서 군복을 받던 순간의 분위기를 기억합니다.

그런 야생 환경은 처음이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고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

내무반에 모인 놈들은 온통 또라이들 같았습니다. 살면서 평생 본 적 없는 또라이들.

전국 각지에서 임의의 남자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앞으로 이런 또라이들과 지내야 한다니.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얼간이들이긴 했지만 다들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저는 금세 적응해서 즐겁게 훈련소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체력 측정을 한답니다.

오래 달리기를 합니다.


하늘이 노래진다는 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헉헉 거리며 뛰어가는 데 발걸음은 점점 땅에 붙습니다.

얼간이 같던 친구들이 저를 하나씩 제치고 앞으로 달려갑니다.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만 제 몸은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굴욕감이란...


그때부터는 뭐든 열심히 했습니다.

얼차려를 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꼼수를 부리며 몰래 쉬고 있으면 그것도 좋았습니다. 나는 열심히 하면 되니깐.

기간병들이 팔 굽혀 펴기를 시킨 횟수보다도 더 많이 하곤 했습니다.


밥도 제일 많이 먹었습니다.

아침 구보를 하고 나서 다들 입맛이 없어 밥을 못 먹을 때도 저는 밥을 싹싹 긁어 다 먹었습니다.

점심 저녁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마 제 인생에서 가장 몸이 건강했을 때는 이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매일 운동하고 잘 먹고.

저는 사람의 똥이 그렇게 크고 굵고 깔끔하게 한 덩이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ㅋㅋ


훈련소를 마칠 때쯤 다시 체력 측정을 합니다.

이전과 똑같은 코스를 달렸습니다.


이제 저는 무섭지 않았습니다.

몸은 단단해졌고 정신도 맑았습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발이 땅에 붙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를 제쳐갔던 친구들을 제가 하나 둘 제쳐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헉헉 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옆을 지나쳐 갈 때마다 희열이 올라왔습니다.

바로 한 달 전만 해도 이 친구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는데 이제 이 친구들이 나를 못 따라오네.


제 삶의 전환점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 날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날부터 저는 많은 것이 바뀌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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