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後感] 이바리기 노리코 시집, 『처음 가는 마을』
‘인간에게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속삭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다. 이바라기 노리코라는 일본 시인의 시인데, 짧은 시간이라도 ‘선잠을 자든, 몽상에 빠지든, 발찍한 짓을 하든', ‘문득 자기 존재를 감쪽같이 지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미소를 띈 일본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오랜만이지?’하며 ‘저쪽 세계’로 데리고 가는 듯 했다. ‘저쪽 세계’, 그러니까 행방불명의 세계로.
행방불명의 세계, 분명 낯설지 않다. 어려서부터 숨기를 좋아했던 나는 벽장, 종이상자, 신발장 속에 곧잘 들어갔고, 삼십분이고 한시간이고 앉아 멍때리거나 이야기를 지어내고는 했다. 다 자란 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미로같은 대학교 건물 안을 탐험하며 숨을 장소를 찾아다녔고, 도서관의 높은 서가 사이로 들어가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마치 꽉 끼는 상자에 들어간 고양이처럼 안정감을 느꼈다. 현실이 힘들다고 도망치기 위함은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숨어버리든, 다른 생각 속으로 숨어버리든, 틈틈이 내 숨통을 틔워주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취했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렇게 이십 몇 년을 이어온 습관들이 일을 시작한 후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나라 프리랜서들이 인이 박이도록 들었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한다’는 말을 좌우명 삼으며 한참을 살다, 문득 더이상 멍때리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멍때리기 대회'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언제 마지막으로 멍때렸는지 떠올려보는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있을 때도 눈의 초점이 종종 흐려지던 내가 말이다.
일도 바빴지만, 늘상 접속해 있는 단톡방과 소셜미디어 그리고 백색 소음이랍시고 틀어두는 유튜브 때문에 일상에 틈이 없었다. 친구들이 지금 나누고 있는 재미있는 대화,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온갖 사람들의 일상, 지금 당장 따라 사고 싶어지는 유튜버의 쇼핑하울을 안그래도 바쁜 내 생활에 끼워넣다보니 멍때릴 여유가 있을리가.
더이상 숨는 시간을 갖지 않게 된 데에 문제의식을 느낀 건 그보다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지난 몇년 사이에 수차례의 공황발작과 잦은 불안증에 시달려서, 지금까지 임상 심리 상담을 꾸준히 받았다. 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정신이 분산돼 있고,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래서 불안감을 키우게 됐다는 인과관계를 알게 됐다. 거절을 못해서 다 해내지도 못할 일을 계속 받고, 스트레스를 즉각적으로 처리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다는 분석이었다. 다시 말해, 뇌가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하는 만큼이나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어렸을 때처럼. 어쩌면 어렸던 나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나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던 걸까.
물론, 나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도 일을 줄인다거나, 스트레스를 처리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 그런 내게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는 ‘저쪽 세계'로 넘어가게 하는 포탈이 되었다. 넘치는 일에 치이고,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자신에게 스트레스받다가도, 시집을 펼쳐 시를 읽으면 허공에 직사각형의 회전문이 생기고 그 문을 힘차게 밀게 된다.
‘세상 곳곳에는 / 눈에 보이지 않는 / 투명한 회전문이 있습니다 / 으스스하기도 멋있기도 한 회전문 / 무심코 밀고 들어가기도 하고 / 때로는 / 별안간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 한번 돌면 눈 깜짝할 사이에 / 저쪽 세계를 방황하게 되는 구조 / 그리 되면 / 이미 완전한 행방불명 / 제게 남겨진 단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 그때에는 / 온갖 약속의 말들도 / 모조리 / 없었던 일이 됩니다’
(이바리기 노리코의 시집 『처음 가는 마을(봄날의 책, 2019)』에 실린「행방불명의 시간」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