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x pack] 엄마도 안괜찮아.
“엄마, 나 오늘 지현이랑 싸웠어. 걔가 수학 문제 못 푸는거 가지고 놀리잖아. 걔가 놀려서 기분 나쁜 거랑 수학 문제 못 풀어서 짜증났던 기억 두 개 먹어줘.”
아라엄마는 아라의 뒷목덜미에 입을 대고 두 번을 쭉쭉 빨아먹었다. TV에 나오는 유명한 육아 전문가가 발견한 이후 전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방법이었다.
한때는 육아 스트레스나 우울증으로 많은 엄마들이 자식을 포기하거나 자신을 포기했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처럼 되지 않고, 그렇게 아이들을 잘 못 키운 것은 부모의 책임이라고하는 학설이 오래전에 정설처럼 여겨졌을 때 많은 부모들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늘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노력하고 많은 것을 희생하는 데도 육아서는 아이가 잘못된 것은 부모의 탓이다, 더 참았어야 했다, 이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고치라고만 했다.
혁신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육아도 과학의 혜택을 입게 되면서, 엄마와 그 뱃 속을 통해 낳은 자식과는 선택적으로 감정과 기억을 땀처럼 배출해 그것을 먹어 제거할 수 있는 육아기술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자식의 차갑고 무거운 마음이나 아픈 기억을 먹으면 엄마들이 자식을 키울 때 화가 나는 마음이 잘 다스려 진다고 했다.
욱하는 엄마 때문에 못 참는 아이가 나오는 거라는 옛말은 오래된 고전처럼 읽힐 뿐이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엄마와 긍정적인 기억과 즐거운 기분만을 가지고 자란 아이들은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했다. ‘완벽한 엄마’가 생겨나고, ‘완벽한 아이’도 자라났다.
“엄마, 이번 12월31일에 졸업이세요.”
“응? 너네 학교 졸업일은 그 날이 아닌데?”
“아니요. 제가 아니라 엄마가 졸업이세요. 이제 제가 완벽히 독립할 수 있으니 저는 더 이상 엄마가 필요없거든요.”
“아니, 아라야. 너는 이제 겨우 12살이란다. 그런데 완벽한 독립이 가능하겠니?”
“엄마께서 저를 낮게 평가하시는게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 기분은 먹어주세요. 저는 이제 모든 것을 행복하게 혼자 할 수 있으니, 육아의 최종 목표인 자식의 독립을 달성하셔서 이제 ‘엄마’가 끝나셨어요.”
화가 나지 않는 엄마는 감정의 파동도 적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 또한 딱 화의 크기만큼만 커졌다. 사랑이 식은 연인에게는 화도 나지 않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기술을 이용하고 육아로 인한 어떤 스트레스도 없이 완벽한 아이를 키워낸 것에 대해 찬양할 때, 사회의 한 켠에는 묵묵히 예전의 방법을 고수하는 부모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식으로 인해 오늘은 울었고 내일은 기뻤다.
아이가 슬퍼하면 부모 가슴도 따라 울었고, 또다시 자식도 불효라는 속상함에 괴로워했다. 아이가 좋아하면 부모는 더욱 기뻤고 다시 아이도 따라 행복했다. 그런 부모들은 감정에 휘둘리는 완벽하지 않은 육아를 했다고 손가락질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완벽하지 않은 아이를 키웠다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희로애락을 모두 드러내는 못나고 고장난 아이를 사람들이 지탄할 때 그 아이 자체는 자식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에게 이미 완벽하다며 소중하다며 싸고 돌았다.
그런 부모-자식 관계에서 ‘엄마’는 죽을 때까지 엄마였다. 엄마가 된 순간부터 졸업은 없었다. 장성한 자식이어도 밤길과 빗길을 걱정하고, 자식이 요리를 할 줄 알아도 집에 오면 엄마밥을 챙겨주었다. 자식은 아무리 늙어도 놀라는 일에는 “엄마야!” 하고 놀라고, 슬픈 일이 생기면 “엄마아.” 하고 울었다. 늙어가는 자식을 더 늙은 부모가 염려하며 마음으로 챙기는 삶.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자식의 마음이 부모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부모들은 육아의 최종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실패한 부모다.
“엄마, 졸업식 준비물은 다 가지고 오셨죠?
자식에 대한 감정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엄마들이 한 아이를 온전히 키워낼 동안의 육아 가치를 돈으로 쉽게 환산할 수 있게 된다. 얼마나 대체되기 쉬운 직업인가.
“그럼. 식사와 간식에 대한 제조 및 영양관리 비용 청구서, 전신 세척 및 병간호 비용 영수증, 청소, 설거지, 빨래 등 리스트에 적힌대로 준비해 왔지.”
“엄마, 이 입원영수증을 확인해보니 간호사분이 간호해 주셨는데 엄마가 한 것으로 청구가 되어 있어요. 이 부분만 수정 계산 부탁드려요.”
독립한 아이들은 키워준 엄마에 대한 비용을 다 갚게 되면 더 이상 가족으로서 또는 자식으로서의 어떠한 의무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증서를 받게 된다.
졸업식에는 많은 엄마들이 참석해 있었고, 대표로 아라가 송사를 맡았다. 단상에 올라간 아라는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나갔다.
“엄마와 함께한 시간동안 정말 즐겁고 행복했어요. 제게 나쁜 마음과 기억이 있을 때 미루지 않고 제 때 먹어주신 덕분에 제가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으로 완벽히 자랐습니다. 엄마도 완벽한 엄마셨어요. 이제 엄마가 아닌 ‘김한결’ 자기 자신으로 살길 바랍니다.”
엄마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기 본연의 이름을 찾아 살기로 시작한 순간부터 기억을 먹어주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엄마일때만 사용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독립한 아이는 사회의 구성원에 속하게 되어 더 이상 엄마와의 관계는 상실하게 된다.
지금까지 완벽하게 자라왔던 아이는 사회 생활을 해나가며 엄마가 감정과 기억을 먹어주지 않게 되면 점점 고장이 나고, 불편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면 이제는 삭제할 수 없으므로 ‘회피’라는 방법으로 감정과 기억을 처리하게 된다. 감정을 마주보는 부대낌과 마찰감을 겪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 성숙한 어른들의 여러 가지 감정 처리 방법을 보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 그래서 다시 그 아이가 부모가 됐을 때는 부족한 부모로 시작하게 된다.
졸업식을 마친 김한결씨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아라가 지냈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고 없었다.
갑자기 이상한 감정이 몰려왔다. 아주 오래 전 아라를 낳자마자 육아우울증으로 ‘나’를 잃었을 때보다 더한 상실감이 들었다. 자식을 잃은 기분. 내가 배아파 낳고 키운 세월을 잃은 기분. 사회의 구성원을 배출하기 위한 하나의 생산공정으로 이용당한 기분이 들었다.
뱃속으로 낳아야만 기억을 먹을 수 있는 기술은 ‘엄마’라는 이름의 역할을 고정함으로써 ‘아빠’라는 역할이 육아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육아의 주체가 ‘엄마’라는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지시를 내렸다. 과학자와 전문가가 예견한 감정흡수 기술의 부작용이었다. 알고 있었다. 김한결씨도 처음부터 기술을 쓰겠다고 선택한 엄마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낸다는 것은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수도 없이 부딪히고 깨지며 한 인간이 엄마로서 변신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너무 아프고 괴로웠다. 엄마가 되기 위해 ‘나’라는 인간을 버릴 수는 있었지만, 사랑하는 자식인 ‘너’를 버릴 수는 없었기에 감정 흡수 기술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라야.”
김한결씨는 텅 빈 집에서 나즈막한 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이제 김한결씨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본인만을 위해 써도 되고, ‘엄마’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엄마로 살아왔더니 ‘김한결’씨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잊은 것 같았다.
아이가 없는 집은 누가 굳이 기분을 먹어주지 않아도 크게 화가 나거나 크게 속상한 일도 없었다. 그리고 크게 웃을 일도, 크게 즐거울 일도 없었다. 감정이 소멸된 기분이었다. 김한결씨가 아라를 보고 싶어해도 이제 아라는 ‘완벽한 아이’로 컸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 열중하느라 감정 따위에 휩싸여 바쁜 시간을 쪼개 부모를 보러 오는 비효율적인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 있는데, 가족을 잃은 기분이었다.
김한결씨는 그제서야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리내어 불러 보았다.
“엄마…”
김한결씨의 엄마.
살다보면 ‘사랑’과 ‘화’라는 가장 상극의 감정을 공유하는 가족이라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것이 지나쳐 부모 자식간에 아픔을 서로 주고 받는 경우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상처가 제일 아프게 할 수 있다. 너무 상처가 되어 서로 안보고 살았던 존재.
김한결씨는 엄마를 버린 사람이었다. 낳아준 부모를 자식이 선택할 수 없다면,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것은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한 아이로 크기를 바라는 부모의 너무 많은 기대가 부담스러웠고, 엄마는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김한결씨에게 많은 화를 내셨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부모의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된 엄마의 자기 만족이라고 생각하며 김한결씨의 반발심은 더해갔고 독립을 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부모-자식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렸다.
그래서 김한결씨는 더욱 아라에게 자신의 사랑이 화가 되어 다가갈까봐 적극적으로 나쁜 감정과 아픈 기억을 먹어주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같았다. 결과적으로 아라는 이제 부모-자식으로 김한결씨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완벽한 육아였을까. 누가 완벽한 엄마고 아이였을까.
김한결씨, 류진아씨, 송은경씨… 등등 졸업한 많은 엄마들이 텅 빈 집에 앉아 있었다. 인간 감정지우개로 살기로 결정한 선택 또한 자식을 위한 길이었음을 아이들은 모르고 떠났다. 자식이 자라고 나면 지난 육아가 후회가 되어도 다시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나온 어떤 방법이 되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