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순이 : 내가 만난 사람 (6)
찰밥을 먹으며
며칠 전 정월대보름 날이었다. 올해는 정월대보름이 어떤 날인지, 무엇을 하고 보냈는지 아이들과 이야기를 간단히 나누어 보았다. 그리고 추석, 설과 같은 큰 명절은 아니지만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이런저런 나물 반찬을 사 먹고 찰밥을 먹었다. 아이들은 나물은 고추장에 비벼서 주니까 어느 정도 먹었지만 찰밥은 도통 먹지를 않아 내가 거의 다 먹었다. 먹으면서도 궁금하다. 찰지고 맛있는데 왜 안 먹을까? 먹을 게 너무 풍족해서 그런가? 과자가 잔뜩 들어있는 장을 열기만 하면 원하는 과자를 실컷 먹을 수 있는 아이들에게 잡곡과 찹쌀이 섞인 밥은 별로일 것이다. 어릴 때 엄마는 일 년에 한 번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고 이야기해 봤자 소용이 없다.
아이들에게 찰밥을 좀 먹이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찰밥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밥을 나에게 준 사람이 오랜만에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분은 바로 외숙모이다. 어떻게 보면 쌀쌀맞기도 하지만 숨은 정이 많고 절대 나무라거나 타박하지 않으셨던 외숙모. 그녀의 목소리와 더불어 웃던 모습이, 나를 위해 차려주시던 밥상이, 찰밥을 김에 싸서 맛있게 먹었던 날들이 어린 시절 접혀져 있던 추억의 페이지 속에서 다시 쫙 펴져 나타나는 듯하다.
나의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의 한 섬이다. 초중학교를 그 곳에서 다녔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목포로 나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목포 친척집에서 학원을 다닌다는 친구들이 종종 있었는데 나는 그 친구들이 그리 부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고학년이 되면서 엄마한테 나도 목포에서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하겠다고 졸랐다. 사실 공부는 핑계고 시골에서 탈출해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었다.
다행히 목포에는 엄마의 오빠, 즉 외삼촌이 살고 계셨다. 사실 다른 친척들도 많이 살긴 했다. 그래도 엄마의 친정쪽 식구 중에서 가장 가까운 분이 외삼촌이니 엄마는 나를 부탁하기가 더 쉬웠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외삼촌 댁에서 나는 한 달 넘게 머무르며 다행히 가깝게 위치한 조금 큰 영수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외삼촌 집을 우리 가족은 외갓집이라고 불렀는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안계셔서 실질적으로 외삼촌 집에서 엄마의 친정식구들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외갓집은 2층 건물의 2층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가운데 텅 빈 거실을 중심으로 약간 기역자 모양으로 방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역 획이 시작되는 제일 처음 방이 피아노가 있던 사촌 언니가 썼다는 방, 두 번째가 소파가 놓인 거실역할을 하는 방, 세 번째는 안 방, 다음이 내가 잠을 자던 방, 그 옆이 식탁만 놓고 밥을 먹었던 방이고 그 옆은 다용도 방, 그리고 끝은 화장실이었다.
학원을 다녀오고 나면 사촌 언니 오빠들의 아이들, 즉 조카들이 놀러와서 같이 놀았다. 나보다 어렸지만 내가 워낙 늦둥이라서 조카들과 나이가 아주 크게 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사촌들은 결혼을 했거나 서울이나 다른 도시로 가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밥을 먹고 공부 좀 하다 자는 루틴으로 방학을 보냈다. 밥은 삼시세끼를 어떻게 매 번 먹고 다녔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반찬은 있다. 파래 무침이라 하기엔 너무 거친 느낌이고 매생이라 하기엔 너무 부드러운...중간 정도의 느낌의 파래무침반찬인데 파와 무와 조금 들어가고 깨와 식초, 참기름이 들어가서 먹으면 시원하고 짭조름한 맛이 좋았다. 고향에서는 많이 먹는 음식이기도 했는데 유독 외갓집에서 많이 먹은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아까 말한 찰밥이다. 팥을 넣어 붉게 물든 찰밥, 소금도 적당히 넣어 간이 베인 찰밥에 김을 싸서 먹으면 그야 말로 꿀맛이어서 밥만 두 공기도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눈치가 보여 참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에서는 정월대보름 아니면 자주 먹지 못했던 밥인데 외삼촌이 좋아해서인지 외숙모는 가끔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숙모가 마흔 후반에서 쉰 중반 사이이셨을 것 같은데 한 달 동안이나 시누이의 딸을 어찌 데리고 먹이고 하셨을까.... 그리고 몇 가지 스쳐지나간 일 들 중에 외숙모가 나를 몇 번이나 역으로 목포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던 것 같은데.. 내가 귀찮은 일을 참 많이 외숙모에게 시킨 것 같아 죄송하다. 그때 나는 철이 없던 아이었던지라 외갓집에서 보낸 방학, 그리고 외갓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던 날들이 참 좋았다.
외숙모가 했던 말 중 유독 몇 년에 한 번씩 기억났던 말이 있다. 아마 외삼촌이랑 다투고 난 뒤였나 보다. ‘너는 절대 저렇게 무뚝뚝한 남자랑 결혼하지 말아라’ 라는 내용의 말이었는데 외삼촌한테 직접 하지 못하고 나한테라도 그런 말을 했어야만 하는 외숙모의 심정이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간다. 외삼촌에 대해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무뚝뚝하고 화가 나면 확 성을 내시는 성미가 급한 분이셨기에 외숙모는 속상할 일도 많았을 것이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자연스레 외갓집 방문이 뜸해졌고 외삼촌은 돌아가셨으며 한 번씩 엄마와 갈 때면 무척 수척해진 외숙모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스무살이 넘은 어느 해, 엄마가 울면서 외숙모랑 통화하고 이모들과 통화하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외숙모가 암에 걸리셨다는 이야기였는데 한참을 이모와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통해 외숙모가 엄마와 이모들에게 얼마나 좋은 분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엄마가 눈길에 넘어져 병원에 입원을 하셨을 때였는데 엄마가 외숙모도 집 근처 병원에서 계시니 병문안을 다녀오라고 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병문안을 혼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 좀 쭈볏거리다 음료수를 사서 외갓집 근처에 있는 00내과에 갔다. 일반 병실처럼 침대가 아니라 이부자리가 펴져 있고 두어 명의 환자가 멀찍이 떨어져 있던 방이었는데 많이 부은 느낌의 외숙모는 나를 보자 한 번에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에 나지 않지만 외갓집에서 어릴 적 내가 지냈던 이야기, 엄마 근황 등을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새 나이를 훌쩍 많이 먹은 나는 외숙모가 보기에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 우리 엄마를 보호할 어른으로 보였을 터이고 본인 걱정보다 우리 엄마 걱정을 더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 병문안을 마지막으로 나는 더 이상 외숙모를 보지는 못했다. 죄송하게도 돌아가신 해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서울에 있는 나는 목포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또 많이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때의 엄마와 외숙모의 나이에 점점 가까워지는 정월 대보름날... 나의 어린 시절,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를 먹이고 보살펴 주었던 외숙모에 대한 고마움을 한번도 제대로 표하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비로소 찰밥을 먹으며 떠올랐다.
찰밥하면 외숙모가 해준 밥이 제일 맛있지 하며 엄마한테 말했던 그 시절..지금은 엄마도 외숙모도 다 떠나고 계시지 않는, 조금은 허하고 시린 날, 두 분 다 그립다. 찰밥을 김에 맛있게 싸 먹던 그 시절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