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어학 실력이 되니? 의사소통은 할 수 있어? 남편이랑 상의해 보고, 남편이 하라는 대로 해.”
“ 남들이 들으면 너 미쳤다고 욕해. 나는 너 공부하는데 희생할 생각 없어. 공부하고 싶으면 결혼 전에 하고 와야지. 나가서 돈이나 벌어와.”
나는 줌으로 하는 연구 방법론 연수를 들은 후에, 교수님과 상담을 하고 밤을 새웠다. 밤새워 내 전공 분야의 10년 동안의 논문을 다 찾아보았다. 내 논문은 당시에 잘 사용하지 않던 연구방법론을 사용해서 쓰인 논문이다. 지도교수님과 논문을 심사해 주시던 교수님들은 그 연구 방법론으로 연구를 해보신 적이 없었던 분들이다. 내 논문이 너무 쉽게 써져서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 교수님을 말씀하셨다. 논문 심사를 마쳤고, 논문이 잘 써졌다는 칭찬은 듣지 못했고 혹평만 들은 터라 나는 내 논문이 어떤 글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연구방법론을 연수해 주신 교수님께서 내 논문을 읽어보시고, 칭찬을 듣기 전까지 논문에 대한 10년 동안 호평은 들어본 적도 없었고, 논문은 나랑은 상관없는 세계라고 생각했다.
내 석사 논문이 발표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내 논문을 인용하고 내 논문의 주제를 가지고 몇 가지 연구가 진행되었다. 석사논문을 쓸 당시 나는 아무도 연구하지 않은 주제를 고르려고 노력했고, 그 주제를 가지고 박사논문까지 염두에 두고 쓴 글이었다. 나는 내 연구와 관련된 후속 연구들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왠지 내 석사논문의 관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더군다나 연수를 해주신 교수님과의 상담도 나를 지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오랜 꿈인 박사과정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너무 신나는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말했으나 가족들의 반응은 참 부정적이었다. 늘 그래왔듯 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가족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내가 하는 결정을 못 미더워하는.
예전에는 부모님이나 남편이 하는 말이 다 맞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부동산을 사서 투자를 하게 되면서 부모님과 남편이 나보다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일들을 관찰해 본 결과 부모님과 남편이 하는 말들이 다 맞지 않음을 알았다. 그동안 너무 부모님과 남편은 맞고, 나는 틀리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것도 최근 2년 사이에 깨달은 일이다. 그래서 박사과정에 반대하는 부모님과 남편을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은 평생 말 잘 듣던 아니 한 번도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던 딸이 하고 싶다는 일이라서 조금은 쉽게 설득되었다. 하지만, 남편은 너무 강경했다. 여러 가지 일들과 상황들이 뒤엉켜서 남편은 나의 공부를 반대했다.
나는 공부에 대한 미련이 너무 강해서 그 반대에도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혼 생활 내내 나는 남편이 반대하는 일들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결정들이 없었다. 아니 가족은 평화롭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남편이 하는 결정을 아주 순순히 다 따르면서 산 편이다. 남편은 고집이 셌고, 늘 자신이 결정하며 살았다. 나는 늘 따르며 살던 성격이고, 남편보다 고집이 세지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이 결정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주 오래도록 굳게 신념처럼 지켜오던, 가족은 늘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 믿음조차 반하는 행동이다. 늘 아내로 서포트만 하고 살던 내가 더 늦기 전에 남편과 아이들만을 서포트만 하고 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 나이 먹어서 내 인생과 내 의지를 서포트해주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한 후회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남편의 반대 속에 나는 대학원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쉽게 생각했다. 해서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대학수학능력 시험 이후로 영어는 대학교 교양수업, 대학원 영어시험을 대체하는 영어 수업과 미국에 사는 동안 들었던 ESL수업 몇 개월 이외에 영어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는 더 솔직히 영어점수가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하다가 안되면 금방 포기를 하고, 한국의 대학원으로 진학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2017년에 유럽 학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포기한 이후로 나는 영어스피킹 연습을 꾸준히 해오던 터였고, 캐나다에 오면서부터는 아기를 데리고 공짜로 하는 ESL수업을 조금 다녔었다. 코로나 이후로는 간간히 영어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 있었다. 영어 시험을 보는데 돈을 쓰고 싶지 않아서, 인터넷 강의를 신청하지는 않았다. 교재를 한국에서 사서 받거나, 강의를 보는 자체도 나에게는 시간이나 돈을 낭비하는 느낌이었다.
인터넷에서 중고책을 찾았다. 책값이 너무 비싼 캐나다에서 중고책값도 비쌌다. 중고책을 찾던 도중 인터넷에 자료집을 공유하기를 원하는 글을 일었다. 한국돈으로 2만 원 정도 금액을 주면, 두 달 반 자료집을 공유한다는 글이었다. 그 사람에게 연락을 했고, 젼화통화까지 하게 되었다. 시험에 대해서 설명도 조금 들었다. 23살에 그 시험과 관련된 영어 강의를 등록을 했다가 한번 강의를 듣고 강의 들으러 가는 길이 너무 멀어서 바로 그만뒀던 그 시험을 거의 20년이 지나서 결국 보게 된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자료집의 내용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문제를 풀어보았으나, 처참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모의고사 형식의 문제집을 세권 샀다. 책값이 아무리 비싸도 인터넷 강의보다는 싸기에. 그리고 자료집을 공유해 준 사람이 빨리 실제로 시험을 보고 시험에 대한 감을 익힌 후에 공부를 해보라고 말해준 것이 기억나서 시험을 등록했다.
공부를 거의 안 한 상태에서 시험을 보러 갔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으나, 목표치까지 한 단계나 두 단계 정도의 레벨을 올리면 최소 영어점수가 나오는 점수가 나왔다. 포기하기가 약간 애매한 점수라고 생각되었다. 시험을 보고 결과가 나오고 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 시험을 공부하는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두 달 후에 다시 시험을 등록했다. 그리고 조금 더 꼼꼼히 내가 산 교재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열과 성의는 부족해서 단어를 외우지도 못했고, 아주 오랜 시간을 공부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아이 여름 방학이 겹쳐서 아이는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가족 여행도 다녀왔다. 그래도 많은 시간 동안 생각은 그 시험에 가 있었다.
가족 여행을 다녀와서 두 번째 시험을 보았다. 한 단계의 레벨이 올라갔다. 하지만, 대학에서 Listening, Reading, Writing, Speaking의 각각의 영역에서 요구하는 최소치 점수가 있는데, 한 영역의 점수가 한 레벨을 더 올려야 했다. 약간 오기가 났다. 인터넷으로 Speaking 스터디를 구했다. 공부 방법을 더 찾아보았다. 그리고, 영어 시험에 더 올인했다. 그리고, 9월 초에 시험을 또 보았다. 영어 점수는 거의 3주 이후에 나오기 때문에 원서를 쓸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역에서 한 레벨만 상승하면 되는 상황이었어서 희망이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거주하던 도시의 대학교에만 원서를 넣을 생각이었다. 캐나다에 처음 가게 되었을 때 그 학교의 홈페이지에 접속했었었다. 가서 박사과정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만 내 전공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전공이 없었다. 그래서 홈페이지를 몇 번 들락날락하다가 접었고, 까맣게 잊고 살던 터였다. 그러다, 코비드가 조금 잠잠해지고 딸아이가 그곳으로 섬머캠프를 가게 되면서, 그 학교를 직접 가보고 나서 설레는 느낌이 들었었기에, 그 대학교에 원서를 넣기로 했다.
박사과정 원서를 넣으려고 여러 번 홈페이지를 꼼꼼히 읽어봤다. 처음에는 진짜 외계어 같았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몰라서 머리가 아팠다. 홈페이지 글도 쉽게 안 읽히고 두어 번 읽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데, 과연 내가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어시험 보는 테스트의 영어는 오히려 쉽게 느껴졌다. 만점이 나오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학교 홈페이지를 여러 번 들락거리다가, 원서를 막상 쓰려고 보니 그 학교에 대해 보다 세부적인 정보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 학교의 그 과에 유일하게 한 명 있는 한국 교수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바로 답신이 왔고, 줌 미팅이 잡혔다. 그 교수님은 나의 이력을 들으시고,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당시만 해도 영어점수가 나오기 전이라서 원서를 넣을지 못 넣을지 조차 모르던 상황이다. 9월 말에 점수가 나왔다. 또 한 레벨이 높아졌고, 이제 원서를 넣을 수 있는 학교가 더 늘어났다.
그 교수님과 몇 차례의 이메일을 주고받고, 그 교수님이 자기 밑으로 들어와 연구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말씀해 주셔서 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열심히 준비했다. 교수님도 몇 번을 공들여 도와주셨다. 내가 졸업했던 대학교와 대학원의 랭킹에 비교했을 때, 내가 박사과정에 원서 넣는 학교의 랭킹은 상대적으로 좀 많이 낮았다. 나는 학부와 대학원의 학점도 괜찮았고, 장학금도 많이 받았었고, 성적이 좋아서 받은 상장들도 많았다. 교사하면서, 미국에서 심포지엄 강의도 한 경험도 있고, 내 경력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자신에 차 있었다. 나는 그 학교에 당연히 입학이 가능할 것이라 자신에 차 있었어서 원서도 한 군데밖에 넣지 않았다. 지원서를 넣고 신나게 스키를 배우러 다녔다. 열심히 돈을 벌고 모아, 그 도시에 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남편이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어디 살지 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그 도시의 부동산도 분석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2월 말에 그 학교로부터 어드미션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드미션도 못 받은 상태에서 부동산 분석까지 다 끝낸 나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던 자신감인지. 너무 처참한 느낌이 들었다. 경솔한 내 행동이 속으로 너무 창피했다. 대학원 원서를 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었지만,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내 모든 시간을 다 쏟아서 원서 쓸 때는 진짜 공을 들여서 썼었다. 세계 제 1의 로펌에 다니는 변호사인 사촌동생도 내 원서가 너무 잘 써졌다고 말해줘서 원서를 쓰고 내면서 나는 구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떨어질 생각을 못했었기에 그 실패가 주는 느낌은 생각보다 썼다.
실패의 슬픔도 잠시, 현실의 냉혹함을 더 깨닫는 설상가상의 일이 벌어졌다. 어드미션을 못받아 슬퍼하는 것은 감정의 사치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주인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갑자기 월세를 100만 원을 올려달라고 했다. 자기는 집을 팔고 싶다고 했다. 불합격의 슬픔을 오래 느끼기도 전에 현실에 닥친 문제가 나를 정신 차리게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렌트가 쉽게 구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현실이 또 나를 맞이했다. 코로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던, 캐나다의 부동산 경기가 갑자기 호황을 맞이하면서 갑자기 집값이 마구 치솟았다. 몇 년간 집값이 주춤해서 집을 못 팔던 집주인들이 집을 팔려고 한 번에 내어놓았다. 그러면서 갑자기 너무 많은 세입자들이 갈 곳을 찾아 헤매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도 세입자였기에 갑자기 집을 구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이다 싶다.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오는 집마다 리얼터들에게 연락했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집을 구하느라 너무 분주했다. 아이들의 이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가며, 리얼터들에게 연락했지만 대답은 잘 오지 않았다. 한 달 내내 집을 찾아도 찾아도 집이 구해지지 않았다. 한 달 하고 보름 이후에 오갈 데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제시한 월세보다 웃돈을 얹어 준다고 해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아니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들을 요구했다. 그렇게 한 달이 갔다. 마지막에는 면접을 보러 다니는 기분까지 들었다. 옷도 정장스럽게 정성껏 차려입고 갔다. 3월 마지막이 다 되어서 집을 보러 갔다. 가격대비 좋은 집이었다. 너무 다급해진 우리 가족은 집주인에게 한 달 치 월세를 더 주겠다고 제안을 했고, 그 제안을 집주인이 받아들였다. 한달치 월세를 더 내더라도, 여러가지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것이 가장 이득이었다. 철저하게 집주인 우위의 시장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기에 다른 돈을 아끼기로 하고, 집 주인에게 큰 돈을 지불하기로 정했다.
아이가 방학이었고, 그 시기 즈음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고, 불합격의 슬픔은 코로나로 인한 온몸의 고통으로 차츰 희석되어 갔다. 나는 늦게 걸린 코로나 치고, 여러 증상이 많이 나타났다. 많이 아팠다. 그 코로나의 아픔 속에서 많은 시간을 잤다. 약간 희미한 의식 속에서 점점 왜 떨어졌는지를 분석하려고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불합격 사실을 알고, 두 달반 정도가 지나서 나의 입학을 도와주셨던 교수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왜 떨어졌는지 궁금했다. 펀딩이 줄어서 경쟁이 치열했고, 나보다 더 좋은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됐다고 했다. 내 입학원서의 주요 주제로 삼았던 논문 주제와 같은 책 300페이지를 코로나에 걸려 헤롱거리면서 읽기 시작했다. 두 달 여가량 걸려서 그 책을 다 읽었고, 떨어진 이유를 미미하게나마 알았다. 그리고, 세미나에 참여했다. 내가 석사논문 쓸 때 사용하던 연구 방법론을 공부하는 세미나였는데, 그 세미나 인원들은 다 내 석사논문을 읽고, 내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같은 그룹을 만난 것 같아서 기뻤다. 계속 계속 공부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계속 반대했지만, 포기가 안 됐다. 주제를 잘 잡아야 했고, 어떤 주제를 잡을지가 계속 막막했다. 닥치는 대로 논문을 찾았고 출력했다.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원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계속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교수님들께 이메일을 보내서 원서를 넣어야 하는데, 주제를 못 잡아서 이메일도 못썼다. 9월 마지막주가 되어서 겨우 이메일을 보냈다. 원서를 두 달 동안 마무리하려면, 늦어도 9월 마지막주에는 이메일을 보내야 10월부터 원서 준비를 하니까. 작년에도 그 스케줄이었으니까.
원서 쓰다가 찍은 사진.
이번에는 더 많은 학교의 교수님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한국인 교수님이 아닌 교수님들에게만 보냈고, 미국의 학교들에게도 보냈다. 원서를 넣기 전에 몇 분의 교수님들과 줌 미팅을 했다. 10월 마지막주에 갑자기 GRE를 신청해서 모의고사 한번 반 정도를 풀고, GRE도 봤다. 교수님 몇 분의 도움과 은퇴한 변호사인 마지막 집의 집주인 아빠의 도움, 내가 캐나다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전직 저널리스트였던 캐내디언 친구, 다섯명의 정신적 지주같은 언니와 친구, 동생들의 도움으로 나는 5군데의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2022년 12월 26일 날 5년의 체류 비자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날 캐나다를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했으나, 북미에 닥친 한파와 폭설로 갑자기 티켓이 취소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를 떠나서 12월 27일 새벽 4시에 아주 힘들게 고생고생 아이들 둘과 나는 한국에 입국했다. 남편은 유럽을 거쳐서 그 다음날 오게 되었다. (오는 날도 글로 쓰면 세편은 나올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여러가지 일들을 더 자세히 쓰고 싶은 마음이다.)
2023년 1월 5일 날 내가 원서를 넣은 학교 중 가장 좋은 학교이며, 유일하게 다른 주제로 원서를 넣은 한개의 학교의 교수님과 전혀 예상치 못한 인터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설날 직전에 미국의 한 학교에서 박사과정 어드미션을 받았다. 아직 희망을 가지고, 다른 학교의 어드미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과연, 내 미래는 어떻게 될지를 궁금해하면서. 그리고, 어제는 한국의 한 아파트로 이사도 했다. 박사과정 공부를 위해 한국 사회를 더 열심히 관찰해보고, 미국이나 캐나다의 박사과정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북미로 공부하러 가기 전에 원래 내 직업이었던 교사로 다시 생활하면서 한국 사회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시각을 갖도록 노력할 것이다.
캐나다에서의 5년 중 거의 2년 동안 결과적으로 나는 박사과정 어드미션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박사과정 어드미션을 준비하게 되고 어드미션을 넣게 된 데는 캐나다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곳에서 읽은 글들, 그곳의 문화가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 최종적으로 4개의 학교에 원서로 쓴 글들의 주제는 내가 목순이 글에 쓴 글들과 결과 맥이 닿아 있다. 물론, 내 글들의 방향이 한곳을 가르치고 있지 않아서 그 주제어가 탁 튀어나오지 않으리란 것도 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에서는 그 주제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제는 내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우리 가정 내의 일들, 어쩌면 더 큰 맥락에서는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수도 있는 혹은 겪고 있는 일들과 관련이 있는 이슈이다. 난 이 주제를 대학원 입학원서의 주제로 삼았고, 그 주제로 앞으로 공부를 더 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목순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도 내가 공부를 진짜 시작하게 될지 몰랐는데,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글을 써서 기쁘다. 내가 앞으로 시작하게 될 이 공부가 사람들이 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공부가 되기를 바라며, 캐나다 5년 살이, 목순이 글을 마친다.
2021년과 2022년 내가 원서를 준비하며 출력하여 읽은 논문들. 중간에 열흘정도 준비하고 시험 본 GRE책도 한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