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이 : 부끄러움을 팝니다(2)

나의 부끄러운 살, 아니 삶

by 일주일의 순이



씻은 큰애에게 옷을 입히는데 오늘따라 유독 배가 볼록하게 나온 것처럼 보였다. 학원에 다녀온 뒤 씻었기에 4시간 정도 공복 상태였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오늘은 아이의 몸무게를 꼭 재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의 모습을 수시로 관찰하며 몸무게가 늘었는지를 종종 가늠해보곤 한다. 주로 식후에 불룩해진 배를 본다거나 접히는 턱이 눈에 들어왔을 때 그러하다. 매번 체중을 재보자고 하는 것이 아이에게 좀 가혹한 것이 아닐까 싶어 주저할 때도 있지만, 오늘은 비교적 오랜만이라 체중계에 올라가 보라고 말했다. 세상에, 예전에 너무 많이 나가는 것 같다고 기함한 몸무게에서 또 1킬로가 늘었다. 방학 이후로 간식을 먹는 것을 크게 제한하지 않았더니 아이의 몸무게가 새로운 기록을 경신하고 말았다. 아이는 나의 반응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머리를 말려주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엄마는 네가 중고등학생 정도 되어서 살이 찐다면 그걸 가지곤 잔소리 안 하겠어. 하지만 살이 찌면 성장호르몬에 이상이 생길 수가 있고 성조숙증을 앞당긴다잖아. 지금이 평생 키를 결정하는 시기니까 체중 관리하라는 거야, 솰라솰라... 능숙한 잔소리가 방언이 터진 마냥 흘러나왔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맘 놓고 잔소리를 해대는데 - 평소에 이런 잔소리를 하면 아이는 짜증을 낸다, 하지만 지금은 짜증조차 낼 수 없는 베스트 타이밍이다 - 거울을 통해 보이는 아이의 표정이 슬프다. 고개를 수그리고 대꾸 없이 힘없이 잔소리를 듣고 있는데, 짜증조차 낼 수 없는 심정이 어떠할까. 내가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찰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나는 잔소리를 힘없이 얼버무리고 만다.


나야말로 심각하다. 40 먹은 아줌마라 성호르몬 어쩌고를 걱정할 일은 없다지만, 이미 과체중에 안착한 내 몸이야 말로 나에게는 큰 과제이며 스트레스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심한 과체중은 아니었는데, 휴직 직전 생기부를 작성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없애고자 한 달 내내 까먹은 달달한 캐러멜들 덕분에 3kg의 체중을 얻고, 거기에다가 휴직 후 코로나로 시작된 집콕 생활 덕분에 최고 체중을 경신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조금의 무리만 해도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게 되어서 조금씩 운동을 하는데, 그것도 의지박약 탓에 했다 안 했다를 반복하여 별로 효과가 없다. 반면에 먹는 일이 유일한 낙이 되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삼시 세끼 먹을 맛있는 것들을 챙기는 것이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 이 자리에서 거울을 보며 부끄러워하는 내 모습이 완성되었다.


나는 먹는 것이 왜 즐거운가. 이것은 어릴 때부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어온 오랜, 버릴 수 없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힘들면 단 것을 먹으며 입안에 쾌감을 선사하고 당을 충천해 머리가 잘 돌게 하기 위해 먹었고, 슬프면 가슴 한편이 빈 것 같은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과식해서 먹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포만감에 허덕이며 잊기 위해서 또 먹었다.


하지만 식후 복부와 허벅지에 살이 한 움큼 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몸이 둔한 느낌을 받게 되면 나는 끝없는 자책과 우울의 늪에 빠지게 된다. 어느 선에서 먹기를 멈출걸, 아니 아예 시작을 말 걸, 아예 사 오지를 말 걸... 음식을 과다하게 섭취하도록 만든 원인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계속 밀려오는 후회의 물결에 몸을 내맡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을 반성하기는커녕, 잔뜩 먹은 탓에 새롭게 받게 된 스트레스는 한참 마음속 어딘가에 쌓여 있다가 다음 또는 다다음 끼니 즈음에 맛있는 음식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폭발하고 마니 이것은 악순환 중에서도 악순환이다.


슬픈 비유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린 왕자'에 등장하여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술꾼 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린 왕자 술꾼이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듯 나는 마음속 괴로움을 잊기 위해 먹고 있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살이 찌는 것이었다. 그 살로 인한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이 순간 먹기에 나는 술꾼과 다를 바 없었다. 어릴 때는 이해되지 않았던 술꾼의 삶이 가진 비극이 내 삶을 통해 현실화되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술꾼, 아니 과식꾼은, 오늘도 마음속으로 잔뜩 움츠러들어있다. 거울을 보아도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고, - 아니 거울을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내 모습에 기함을 할 때도 있고, - 거실 의자에 앉아 있어도 오늘따라 더욱 넓어 보이는 하체가 육중하게 느껴져 괜스레 짜증이 나고, 외출을 하려 해도 맞는 옷이 드물고 어떻게 몸매를 가릴지부터 생각하게 되니 매사가 그리 행복하지를 못하다. 그래도 일과 중 어쩔 수 없는 외출을 해야 하므로 집을 나서게 되면, 내 시선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훑고 있다. 특히 길을 가는 여성들을 볼 때마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전사들이 안경처럼 착용하는 전투력 측정기에 삐비 빅 하고 전투력이 자동으로 찍히듯이, 나도 그네들의 모습을 자동적으로 스캔하며 체격을 체크해 본다.


나의 관찰 대상은 어느 순간부터 날씬한 여성들이 아닌, 하체가 나처럼 튼실한 사람들이 되었다. 예전에는 살을 빼서 나 자신을 관리하고 싶은 생각이 우선이었다면, 요즘은 뚱뚱한 여성들의 삶에서 '행복'의 실마리를 찾고자 노력한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네들을 바라보며 세부적인 몸매를 스캔한 후 이런저런 상상에 빠져든다. 우선 그네들이 입고 나온 옷을 보며 몸매를 드러냈는지, 감추었는지, 어떤 종류의 옷을 입었는지 그 옷은 편해 보이는지 여부를 판가름해본다. 자신 있게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센스 있는 옷차림을 했다고 생각이 들면 나의 시선은 그녀를 놓지 않고 계속 따라간다. 먼저 표정부터 본다. 그녀의 발걸음과 몸짓을 본다.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더 뚱뚱한 그녀의 삶에 생기와 행복이 가득하면, 나는 왠지 모를 위안을 받거나 그녀의 작은 무언가라도 벤치마킹하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그녀라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마음도 가져본다, 아니 그녀가 나라면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맞겠다. 그녀가 나라면 어떻게 입고 말하고 살아갈 것인가. 항상 상의가 하체를 최대한 가리도록 입는 내 고루한 옷 스타일을 그녀라면 어떻게 자신 있는 모습으로 바꿔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바꾼다면 내가 그녀를 보듯이 다른 이들도 좋게 그것을 보아줄까 하는 생각들. 머릿속에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내 삶에서의 벤치마킹의 과정까지 이미 끝내 놓는다.


하체가 비만인 여성으로 살면서 예전에는 행복의 바로미터가 '하체의 날씬함'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는데, 요즘은 이처럼 뚱뚱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은 살을 그 정도로 빼기는 힘들 것 같다는 자연스러운 포기 심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살과 관련해 남과 비교하고 스스로를 타박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뚱뚱해도 인정받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국주 씨나 이영자 씨 등, 방송에서 자신의 뚱뚱함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응원받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나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들의 밝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무엇을 어떻게 닮아가야 그들처럼 살 수 있을까. 밤에 자신 있게 야식을 먹고도 죄책감 없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산다면 나는 내가 날씬하든지 뚱뚱하든지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 나도 그런 멘털과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지고 싶다.


그래서 나는 뚱뚱해도 그녀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에 대해 탐구한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사랑받고 자란 화목하고도 있는 그대로의 존중이 가능했던 그녀의 행복한 가정환경 덕분일까, 아니면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안 쓰는 굳건한 그녀 자신의 뚜렷한 주관 덕분인가. 그녀들의 모습을 통해 유추한 삶을 전혀 그러지 못한 내 삶과 무의식적으로 비교해 보는 것인데, 맞다. 이렇게 비교 심리가 발동하는 것은 내 삶이 충분히 행복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몸매에 대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아왔다. 내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정확히는 초3 때까지는 날씬했고, 초6 정도에는 조금 통통하지만 그 정도면 누구에게 몸매로 인해 전혀 왈가왈부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균형 잡힌 몸을 가졌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이 갑자기 늘어서인지 아니면 호르몬 탓인지 하체가 급격히 발달하기 시작해 먹는 족족 살이 하체로 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적당히 가려지는 교복 치마를 입고 다닐 수 있었기에 나는 그다지 몸매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수학여행을 가기 전 옷을 사러 가면서 나는 약간, 아니 심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엄마와 바지를 사러 다니는데, 입으려는 바지마다 모두 양쪽 허벅지를 통과하지 못하여 입다가 벗기를 몇 차례 반복하게 되었다. 게다가 겨우 하체 사이즈에 맞아 입게 된 바지는 밝은 색 바지였는데 이것은 나의 튼실한 하체를 더욱 강조하였고, 허리는 남아돌아 벨트로 엄청나게 꽉 조여 입어야만 했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이가 들면서 나름 허벅지와 허리 사이즈에 맞게 허리의 둘레도 커져서 바지를 입을 때 더 이상 벨트를 안 매어도 괜찮아졌다;; - 옷들을 여러 번 입 어본들 대다수가 맞지를 않으니 엄마는 살찐 나를 타박하고, 매장의 언니는 멋쩍어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하체가 튼실해진 탓에 앞으로 옷을 마음 편히 사러 올 수도 없고, 옷을 편하게 입을 수가 없겠구나, 나의 튼실한 하체는 몹시 부끄러운 존재이고, 그러니 무조건 옷을 입을 때마다 가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부위겠구나.
이런 생각으로 평생 살아온 나가, 과연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이 타인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순간에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 비난이 대물림될 것을 염려해 끊임없이 내 딸을 들볶고 있는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우리 아이가 타인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으며 자라기를 바란다. 한없이 예쁘고 귀한 아이이기에 더욱 그러한데, 그런 내게 일종의 트리거가 된 사건이 있었다. 시가의 어른들과 모인 자리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다소 통통해진 우리 아이에게 살이 더 쪘느니, 얼마나 잘 먹기에 통통해졌냐고 하는 아슬아슬한 수위의 인사말을 건네는 어른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서 '이 자리에서 네가 젤 뚱뚱하다'라고 한 남자 어른의 말에 우리 아이보다도 내가 더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


사실 우리 아이는 어린 시절 나처럼 원래부터 잘 먹는 통통한 아이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너무 입이 짧고 먹지를 않아 체중 미달인 아이를 살 찌우기 위해 열량이 높은 음식을 습관처럼 먹여 왔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아이에게 식욕이 돌게 되었다. 건강해져 가는 아이를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에 기뻐했는데, 대신 이전의 식습관을 고치지 못한 탓에 갑작스레 체중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된 이 말은 딸의 식습관과 체중을 제대로 관리해주지 못한 엄마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처럼 느껴져서,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포개지면서 몹시도 치욕스럽고 가슴 아픈 말이 되어 나를 공격했다. 뚱뚱해지면 아이가 어디서든 이런 말을 들으며 스트레스와 상처 역시 대물림되겠다는 걱정과 함께 나 역시 무책임한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오기가 생겼다. 그 후로 나는 수시로 아이의 몸을 훑으며 살찌니 그만 먹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게 되었다.


먹을 것을 향해 손을 뻗다가 움츠러드는 아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고 미안함을 느끼며, 심지어 나는 이렇게 살이 쪘는데 무슨 자격으로 아이에게 살이 찐다고 지적질을 하는가 싶은 자책까지 들어 이중 삼중으로 마음이 좋지 않다. 친정어머니는 평생을 날씬한 55 사이즈로 살아오셨다. 그런 분의 입장에서 먹는 것을 좋아하고 살이 찐 딸의 외모를 지적질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나 뚱뚱하면서 아이의 음식 섭취와 체중을 관리하라고 지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왜 엄마는 먹으면서"라는 말을 혹시라도 아이가 한다면 머뭇거리게 될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너를 타박하는 것은 외모 때문이 아니라, 건강 때문이라고 아이에게 잔소리하면서 속으로는 뜨끔해하고, 그렇지 못한 속내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해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 역시 외모 문제는 차치하고 허리와 다리 건강을 위해서라도 살을 빼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글을 쓰면서 생각과 마음 상태를 정리해 나가다 보니, 그동안 내가 나의 문제를 합리화하며 직면하기를 피해왔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외모 문제에만 집착하며 상처를 받았다고 호소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식습관과 건강 문제를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아이의 건강이 걱정돼 잔소리를 한다면서도 아이의 허벅지와 배에 살이 더 붙었는지 여부에만 더 신경을 써온 것처럼 말이다.


내가 나 자신과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다른 이들이 그런 나와 내 아이를 좋게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 아니었을까. 내 아이에게 가장 뚱뚱하다고 말한, 인자한 얼굴 뒤에 숨어서 아이의 자존감에 상처를 준 그 친척 어른의 무례함에 분노하며 시부모님 앞에서 공론화해 항의한 것도 잘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그전에 나부터서 아이에게 외모에 대해 지적질하는 차원의 잔소리가 아닌, 건강을 위한 자상한 조언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내가 어릴 적부터 바라던, 자존감 있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아이도 진정으로 자신의 외모보다는 건강 문제에 집중을 할 수 있겠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내 몸을 내가 아끼고 챙기는 차원에서 체중을 관리할 수 있겠지.


그 실천과 모범의 시작이 내 몸에서부터 비롯될 것이라 생각하니, 나 역시 내 살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달리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많이 먹고 덜 먹고에 집착하지 말고 질적으로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며, 몸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적당한 수준으로 먹어보는 것을 실천해야겠다. 그리고 나의 건강한 식생활 습관을 아이에게도 권해 보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월순이 : 오직 독서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