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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주일의 순이 Jan 10. 2024

수순이 : 겸손은 힘들다 (2)

2024년은 멋지고 당당하게

번째 상담에선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남편에 대한 이야기라고 썼지만 남편을 비난하고 욕한 것에 불과했다.

결혼 후 지난 10년 간 꾸준히도 해 왔던 일이다.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 번 시작하면 쉽게 끝내기가 어려워  시작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기도 하다.

남편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상담사였다. 힘들어 하는 나의 이야기에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다보면 언제나 나오는 수순이다. 이 또한 자연스러웠다.


그랬다. 남편은 나의 삶에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삶에서 남편을 빼내고 싶었다. 나 혼자라면 언제라도 당당하고 멋지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겉으로는 아이들의 주양육자이자 가장 역할을 하는 나에게 남편이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비난했다. 학교에서 시달리고 집에 돌아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시켜야만 움직이는 주체적이지 않은 남편을 보면 화가 났다고. 하지만 실은  답답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과 내가 동급으로 여겨지는 게 너무 싫었다. 흔히 생각이 고루하거나 고집이 세서 말이 통하지 않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1차원적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이라 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식한 게, 무식한데 배우려 하지 않는 게 싫었다. 나는 그런 남편과 마음을 나눌 수 없어 외롭다고 했다. 내가 한 선택이라고 누구를 탓할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1남 1녀 중 막내였다. 원래는 둘째였지만 동생이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는 바람에 막내가 되어 버렸다. 남편이 돌즈음 의료사고로 허벅지가 괴사되어 돌잔치도 치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는 셋째마저 허무하게 잃고나니 자식에 대한 사랑이 끔찍했다. 아니 그 일들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시어머니는 두 아이를 애지중지 키웠다. 어머니 표현에 의하면 남편이 어릴 때 너무 예뻐서 보는 사람들마다 침을 흘리니 밖에 데리고 다니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들을 때마다 납득이 안되는 말이지만 들은대로라 어쩔 수 없다.)

내 눈에는 더 예쁜 시누를 두고 그런 말을 안하는 걸 보면 어머니는 남편을 더 편애한 것 같다.

트라우마 때문이지 원래 그런 부모들이었는지 모르지만 남편은 과잉 애정형 부모밑에서 자랐다. 몸은 어른이지만 내 눈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할 생각이 없는 어린 아이 같았다. 늘 부모 뒤에 숨으면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니 스스로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게 당연할 지도 모른다.

1부에도 썼지만 내가 학교에서 보는 손이 많이 가는 과잉 애정형 학생과 부모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는데 하필 그런 사람을 남편과 시부모로 만나다니 이건 잘못된 만남이 분명하다.


인생은 ' 모순'이다. 내가 양귀자의 소설에 매료될 수 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나는 5살에 엄마를 잃었고, 중3 겨울 아버지도 잃었다. 언니들과 오빠가 있었지만 부모가 바람막이가 되어 주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은  거칠고 험난했다.

내 운명을 아무리 원망해도 나를 자식처럼 안쓰러워 하는 어른은 만나지 못했다. 그냥, 그저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남편과 나는 정반대의 운명을 타고 났는데 서로에게 없는 것 때문인지 본능적으로 끌렸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안위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끌림이었다.


남편은 세 살이 어렸다. 나를 만났을 때 34살이었고 35살에 결혼을 했다. 부모 밑에 살다가 누나와 매형 밑에서도 살았다.

부모는 아들을 안심하고 맡길 혼처를 찾고 있었다. 그 와중에 시아버지의 사촌고모(내게는 이모의 둘째 며느리)가 우리 둘을 소개했다.

엄마의 하나 뿐인 언니. 결혼 전 명절이면 이모 집에 인사를 는데 이모는 막내인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게 늘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엄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 가장 정을 많이 주신 분인 이모. 그 며느리의 소개라니 마음이 반쯤은 열린 상태에서 남편을 만났다. 37살이던 나는 특별한 결격 사유만 없다면 누구라도 그냥 결혼할 마음이었다.


남편의 부모들은 나를 엄청 반겼다. 부모가 없는 것 쯤은 흠도 아니라는 듯 나를 안쓰러워 했다.

동네 잔치를 할 만큼 교사인 나를 자랑스러워 했다. 남편은 모든 걸 내 뜻 아니면 부모 뜻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결혼 전 아이까지 생겨 다른 선택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결혼에 대한 후회를 늘어놓고 싶어서는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는 만났고 또 어떤 이유로든 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체념처럼 받아 들였다.

나 스스로 나를 '센여자'라고 표현하기에 나는  여리고 우울했으나 나를 안다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남편은 자기주관이 뚜렷하지 않고 남의 말에 그저 입을 다물거나 동조하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 눈에  착한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마저도 싫지만 남편이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면 우리의 결혼은 진즉에 끝났을 것이다.


상담사에게 남편 욕을 실컷 했지만 상담이 끝난 후에 나는 알아차렸다. 남편의 잘못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남편에게서 구하며 공허함을 채워 내라고 비난했다는 것을.

내 외로움의 원인이 모두 남편 탓인 것처럼.

하지만 내가 외로운 건 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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