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들의 수다는 주변 사람들의 뒷담화로 시작했다가 아이들 얘기, 돈 얘기, 시댁 얘기로 빠지다가 나를 잃어버린 삶에 대해 이야기하다 결국 이 물음으로 끝난다.
다시 태어나면 결혼을 할 것인가.
오늘 내가 얘기할 사랑의 대상은 남편이다. 남편. 왠지 '남의 편'이나, 서방님과 초성만 똑같은 욕이 먼저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남편과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그는 세번째 연애, 나는 첫 연애다. 물론 그 전에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취미가 사랑인데 그럴리 없지 않은가. 썸남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한 번도 쌍방통행인 적은 없었다. 조급함도 있었다. 연애는 20대의 과업이다. 사회에서 소위 '결혼적령기'라 부르는 나이대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여자의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잌', '나이 서른은 계란 한판'이란 불편한 비유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대학생에게는 '2말3초'라는 말도 있다. 2학년 말에서 3학년 초에는 꼭 첫 연애에 성공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총학생회에서 주최하는 '대안학교 기행'에서 처음 만났다. 70명이 넘는 참가자 중에 마지막까지 운동장에 남아 뒷풀이를 한 사람은 고작 열 몇명이었다. 그날 그가 불렀던 '소금인형'은 마치 잔향처럼 내 귓가를 맴돌았다. 무엇보다 우린 첫 만남부터 서로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캠퍼스 커플이 된 후 지지부진 5년을 연애하다 그의 제대 후 학교 발령을 받은 다음 해에 결혼했다. 결혼하고는 참 많이 싸웠다. 치약 짜는 방법 가지고도 다퉜다. 하지만 그간의 싸움은 그야말로 '알콩달콩'이었다. 아기를 낳고 우리 관계는 바닥까지 갔다.
아기는 분유를 거부했다. 내가 안보이면 악을 쓰고 울며 엄마만 찾았다. 나는 아기가 돌 될 때까지 3시간 이상 혼자 외출하지 못했고, 밤에도 3시간에 한 번씩 젖을 빨았기 때문에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그러한 힘듦에도 둘째를 낳았다. 어차피 둘 낳을 거면 터울이 적게 지는 게 그나마 수월할 것 같아서였다. 첫 아이 임신부터 둘째 아이 모유수유까지 5년간 생리를 하지 않았다. 그 5년 동안 나의 정체성은 오직 '어머니' 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이자 '그'였다. 내가 내 정체성을 잃은 것에 비해 그의 삶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화가 났다. 왜 너는 변하지 않지? 심지어 학교 다닐 때 내가 너보다 공부도 잘했는데. 똑같이 일하고 아이 키우는데, 너는 언제나 회식에 참여하고 누가 부르면 바로 나갈 수 있지?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해 주지만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천성 탓에 모임이 잦은 그에게 나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당연히 술로 인한 사고였다. 우리는 금전적 손해를 보고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여기서 말하기 곤란한, 하지만 어느 집이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상처다. 그때 나는 그를 원망하기보다 그와 결혼한 내 안목을 탓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나의 가장 아름다운 20대의 추억들이 모두 시궁창에 쳐박히는 느낌이었다.
이후 어떠한 노력도 없었다면 우리는 '아이 때문에 마지못해 사는' 류의 부부였을 것이다. 여전히 그는 술을 마셨고 나는 그런 그에게 지쳐갔다.
터닝포인트는 두번 찾아왔다.
첫 번째는 상담이었다. 관계가 바닥을 친 후 3,4년이 지나자,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상처는 희미해지고 우리 사이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우울함이 찾아왔다. 처음으로 상담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고 자발적으로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다. 상담이란, 내 마음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침착하게 막대기를 건네주는 것이다. 그걸 보고, 잡고, 올라오는 힘은 나에게 있다. 상담을 통해 나는 내 마음이 동굴에 들어가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에게 상처받은 일에 대해 이야기 하다 "남편이 제게 뭐라 했냐면요, 누나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녜요." 라고 했다.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나의 시댁은 남편의 누나들인데, 내가 누나들에게 자주 연락하지 않자 남편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 때 상담 선생님은 의외의 말을 하셨다.
"누나들이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걱정되어서 하신 말씀인 것 같은데요? "
그러면서 나와 남편의 성향을 알 필요가 있다며 에니어그램 검사를 추천하셨다. 결과 나는 7번, 남편은 6번이었다. 나의 주된 관심사가 '나의 즐거움'이라면, 남편의 주된 관심사는 '주변 사람과의 조화로움'이다. 남편에겐 누나들의 인식이 정말 중요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를 비방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관점의 전환은 너무도 큰 것이기에 남편에게도 이야기 했다. 그러자 남편이 관심을 보이며 자신도 상담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같은 선생님에게 따로 3-4달 정도 상담을 받았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근원인 술을 끊지 못했다. 상담도 매너리즘에 빠지며 그만두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이 동굴에 들어갈 때, 그것을 직면하고 멈출 수 있게 되었다.
두번째 터닝포인트는 버츄 워크샵 때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해보라는 미션을 받았다. 나는 문득,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남편의 운전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도 면허가 있지만 원체 방향감각이 없고 차를 싫어해서 운전을 잘 못한다. 그래서 운전은 언제나 남편의 몫이다. 그날 집에 돌아가 저녁을 먹으며 남편에게 '그동안 우리 가족을 위해 운전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남편이 울컥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은 나에게 잊지 못할 하나의 순간이 되었다.
여전히 나의 결혼 생활 바탕에는 억울함이 깔려 있고,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일은 기실 나를 사랑하는 일보다 어렵다. 집안일은 그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기에, 집에 들어왔는데 집안이 엉망일 때, 점심 때가 되어도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을 때, 깊은 빡침이 올라온다. 생활을 공유하는 남편에게 '사랑한다' 말하기 쑥쓰럽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라는 농담도 있지 않은가. 남녀의 이성애적 사랑은 콩깍지라는 필터를 끼우지 않으면 그 스파크를 유지하기 어렵다. 나는 남편을 향한 사랑에 연민이란 이름을 붙인다.
"원칙은 큰 일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들에는 연민만으로 충분하다." - 알베르 카뮈 <이동진의 밤은 책이다 중>
나는 그를 연민한다. 그와 나는 크고 작은 일을 함께 치르며 삶을 이어 나갔다. 남은 생도 그럴 것이다. 삶이라는 고난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연민한다.
누군가를 평생에 걸쳐 알아가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지금처럼 만남과 헤어짐의 주기가 짧고 흔한 세상에서 가족이란, 전생애에 걸쳐 알아가야 하는 느리고 인내심이 요구되는 대상이다.
오늘, 남편을 연민하며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익숙해서 소중함을 잊은 일을 찾아 감사를 표해보자. 그가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괜찮다. 사랑은 내 안에 있는 자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