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선우정아 <도망가자> 중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 꼬리를 물고 몰려올 때가 있다. 작년 겨울이 그런 시기였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여러 잡념이 불안이 되어 나를 집어삼켰다. 무작정 집을 나왔다. 2호선 내선 순환선을 탔다. 여러 역을 지나쳤지만 어디에 내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원서동 작은 책방이 생각났다. 두서너 명 정도만 있을 수 있는 크기라 작은 동굴 같은 곳이다. 을지로입구에서 내려 종묘 옆 서순라길을 지나 원서동까지 걸었다. 바람이 몸을 휘청거리게 했지만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계동 쪽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있는 비화림에 도착했다. 다행히 서점지기뿐이었다. 책 한 권을 들고 창가에 앉아 북악산을 바라봤다.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떡하냐' 나를 따라다니던 어떤 속삭임도 들리지 않았다. 서점에 앉아 있는 순간 얼음 같은 마음이 살며시 녹았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비화림에서 나를 놓았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보았을까 서점지기는 조용히 차를 타서 내 앞에 두었다.
책방을 나와 다시 창덕궁 쪽으로 걸었다 돌아가기 싫어서 골목을 빙빙 돌았다. 그러다 창덕궁 돌담이 보이는 동네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시키고 창밖 풍경을 보니 누군가에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지금 읽으면 새벽 감성 가득해서 오글거리는 글이지만 그땐 이 글을 어딘가로 보내고 싶었다.
j에게
안녕 j야
해가 지는 저녁 창덕궁으로 왔어
어느새 담장에 노란빛이 감돌고
앙상한 가지가 떨고 있네
통창이 있는 카페에 앉아
시나몬 스콘과 아메리카노 한잔을 두고
창밖을 바라보는 지금이 좋아
두어 명의 여자아이는 버스정류장 옆 공터에서
탱탱볼을 차고
지친 표정의 사람들은 종로 1번 마을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듯 해
원서동의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시간
어린이집 가방을 든 아버지와 딸
쇼핑가방을 든 아가씨
일상의 시간이 보여서 마음이 따스해진다
주말 낮 관광객으로 가득한
번잡한 골목의 시간이 아닌
어둠이 내린 골목을 걷는
원서동 누군가가 되고 싶어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아이들도 집으로 간 시간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여기선 내가 나로 보이지 않아
아무 걱정도 없는 순간
빈 커피잔을 두고
마음이 일렁인다
여기에 있는 내가 좋아서
마음이 편해서
스르륵 스며들고 싶어
여러 이름의 내가 버거울 때
나는 이곳으로 올 거야
그러니까 j야
이젠 괜찮냐고 묻지 않아도 돼
내가 표정이 없어지면
원서동에 와서 커피 한잔 사줄래?
어떤 말보다
이곳의 커피 한잔이
숨 쉴 위로 같아
그리고 고마워
나의 안색을
살펴주어서
여러 감정이 덕지덕지
버무려진
이야기를 들어줘서 말이야
나도 너에게 그런 이가 되길 바라며 Y가
힘들 때 그 자리에 서서 용기 있게 맞설 수도 있지만 때론 멀리 도망갈 수도 있다. 사람마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다르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해결된 일이 없어도 하루의 일탈이 숨 쉴 힘을 주고 버틸 용기를 가지게 한다. 박노해의 <걷는 독서>에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작은 동굴이 필요하다, 지치고 상처 난 내 영혼이 깃들 수 있는 어둑한 방'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치고 힘들 때 조용히 숨어들 수 있는 곳. 나에겐 원서동이 그리고 서점 비화림이 그런 곳이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으면 그냥 도망가자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된다. 주변의 누군가가 표정이 없어지면 손을 잡고 말해줄 거다.
"우리 도망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