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이 : 부끄러움을 팝니다 (5)

공부가 싫었어요

by 일주일의 순이

'아, 하기 싫어... 지겨워!'

수학 문제를 풀다 말고서 입이 잔뜩 튀어나와 있는 아이를 보면, 가슴 한편이 답답해져 온다.


남편은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가 어디 있겠냐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아쉬움과 답답함을 느낀다. 어렵고 힘들다며 공부를 꾸역꾸역 억지로 하고 있는 아이. 왜 이런 걸 해야만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아이에게, 공부의 필요성을 가르쳐주며 재미를 알려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주고 싶다. 하지만 솔직히 나부터서 공부가 정말로 재미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에, 잘 모르겠어서라도 그 재미를 강요(?)할 수가 없다.


성공하려면 공부해야 한다, 참고 열심히 하면 언젠가 잘하게 되고 그러면 재미있게 될 수 있다, 공부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꾸준히 하다 보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 등등을 이유로 들면서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설사 이런 이유를 들어 말한들 갓 열 살 된 아이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사실 한편으로는 아이가 공부를 '수단'으로 여기며 살아온 나를 닮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내 아이는 나와 달리 공부 자체가 즐거워서 잘하면 좋겠다. 하지만 이것은 내 욕심일 뿐 그러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왜 공부하기를 싫어하게 되었는가?


나의 상황상 공부가 싫다고 말하는 것은 몹시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내 직업이 교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학교에서 만나는,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일깨워주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하는 직업적 소명을 가지고 있는 나는, 불행히도 공부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아주 어렸을 때, 공부의 즐거움을 알기도 전부터 나는 공부가 가져다주는 이점을 먼저 알아차렸다. 좋게 말하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필요 이상으로 약아빠진 것이다. 공부를 잘하면 부모님께 쉽게 착한 딸로 인정받을 수 있고, 공부를 통해 주변의 친구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집안에서 오빠보다 더 칭찬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고, 주위의 친구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음으로써 남들보다 훌륭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공부는 나의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게 하는 수단과도 같았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보다 더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눈에 띄었고, 그런 친구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할 수 없이 공부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인정받는 아이라는 타이틀을 놓치는 것이 자존심 상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공부는,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라도 최대한 열심히 해야만 하는 것이 되어있었다. 입시에서 실패해서도 안 되었고,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에라도 나는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공부는 늘 어려웠다. 절망스럽게도 어느 순간 내게 공부 머리가 없다는 사실조차 깨닫게 되었다. 늘 등수와 점수를 확인해가며 불안한 마음으로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몰입해서 공부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주변이 원하는, 내가 스스로에게 바라는 결과를 내야만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나는 절박함만을 가지고 공부를 했다. 쉬는 시간 없이 지칠 때까지 쏟아붓고, 따라가지 못하거나 놓쳐버릴까 봐 늘 불안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압박했다. 마음의 여유 없이 공부하고 눈앞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나는 공부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생활을 최선을 다해 빨리, 좋은 성과를 가지고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운이 따라준 덕분에 어렵사리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고, 직장을 얻는 순간까지도 나는 계속해서 공부를 수단으로 생각했다. 여전히 공부는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깊이 파고드는 전공 공부의 묘미도 몰랐거니와, 기존에 늘 좋은 성적을 목표로 공부해온 습관 때문에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은 공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임용고사 통과만이 목표였기에, 대학에 와서도 공부를 하며 보람이나 즐거움 같은 것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다. 여전히 나의 공부는 수험서를 읽는 수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영혼의 깊이를 위한 독서는 중학생 이후로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한 상태였다. 수험서를 열심히 읽기에도 생활은 벅찼다. 생활비를 걱정하는 지겨운 삶을 벗어나기 위해 눈앞에 놓인 공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잘 해내야만 했다.


문제는 내가 교사가 된 뒤에 발생했다. 더 이상 압박을 느끼며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속으로 한껏 자유를 꿈꾸었고, 동시에 일시적으로 목표가 사라진 삶에 무기력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단에 설 때마다 교양이 부족함을 들킬까 봐 두려움을 느꼈다.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공부한 수험서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연구한 교재의 지식만으로 아이들을 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춘 시시껄렁한 농담은 할 수 있었지만, 인생에 대해 고민하거나 더 깊이 있는 지식을 목말라하는 아이들에게는 내가 제대로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항상 껍데기뿐인 교사의 모습을 들킬까 봐 불안했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말이 부담스러웠고, 삶에 필요한 지혜를 주지 못하는 교사라는 생각에 늘 자책했다. 이상적인 교사상에서 멀어지는 스스로의 모습이 점점 버거워졌다.


꼭 이런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내면에 잠재된 개인적인 문제들까지 겹치면서 마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상담을 받으며 그것을 치료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나는 상담심리 교육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공부를 싫어하는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것도, 별다른 준비 없이 덜컥 붙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나름 상담심리 관련해 일을 하거나 전공을 한 사람들, 또는 대학원 입시를 위해 꽤 오래 공부를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틈새에서 나는 기적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공부를 하고 싶은지 이유를 묻는 면접을 평소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내가 통과한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난생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는 목적과 패턴은 마치 뗄 수 없는 습관처럼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나는 장학금을 목표로 공부를 했고, 공부를 수단으로써 절박하게 하는 몸에 밴 습관 덕분인지 꽤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을 몇 차례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지식은 조금도 늘지 않았다. 벼락치기식 공부는 쉽게 잊혔고, 나의 내면은 항상 공허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발전이 없는 채로 항상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상담심리대학원의 좋은 점은, 수업 외에도 세미나나 실습이 있는데 이러한 활동 후 항상 뒤풀이를 가진다는 점이었다. 술자리에는 늘 주임 교수님께서 참석하셨으며, 이 자리는 수업시간에 채 나누지 못했던 뒷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의미 있는 배움이 가득한 자리였다. 대학원에 와서조차 겉핥기 식, 점수 따기 식 공부에 매몰되며 지쳐갔던 나는 교수님 앞에서 눈물을 떨구면서 이야기했다. 정말 공부가 싫다고, 너무 하기 싫은데 왜 대학원에서 전공서적을 보며 공부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어느 누구에게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고백이었다.


교수님은 그 말들을 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들어주셨고, 해결책을 간단하게 말씀해주셨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된다. 하고 싶어지면 그때 해도 돼.'


순간 나는 교수님의 말씀은 들은 내 귀를 의심했다. 항상 공부를 해야 하고, 잘해야만 나라는 사람의 존재 가치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공부를 안 해도 상관없다니... 충격적이면서도 그 말씀이 속이 뻥 뚫릴 만큼 얼마나 시원한 말인지 몰랐다.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한다고 내 삶을 옥죄며 따라다녔던 그 '공부'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라니. 그 말씀에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하면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다. 모두가 존경하는 훌륭하신 교수님께서 나에게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누가 감히 나에게 공부하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상담심리 대학원에 마음을 치유하는 귀한 경험들을 하고서, 나는 눈치 보며 공부하는 삶을 접고 아예 맘 편히 공부를 내려놓는 삶을 택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부만을 했다. 출산과 육아 등으로 바쁘게 살면서 더더욱 공부를 잊은 채로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갑자기 공부를 하고 싶고,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나는 열렬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마음속에 무언가가 가득 차서 쏟아내고 싶었는데, 웃긴 것은 막상 쓰려고 보니 쓸만한 내용이 없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없는 채로 그동안 귀한 기회와 시간들을 날려 보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야만 하는 것을 미션처럼 해치우면서 떠밀리듯 살아오는 동안 빈껍데기만 남은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는, 사실 부끄럽게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 중 책을 쓰고 펴낸 이들에 대한 미칠듯한 부러움과, 이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도록 아는 것도 제대로 쓰는 방법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나는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그런 마음으로 펼친 책은 오래 읽을 수가 없었다. 남들에게 있어 보이기 위해서 하는 공부는 더 이상 그 과정이 행복하지도 보람 있지도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졸음을 쫓아가며 목표 달성만을 위해 달리던 그 수험생 시절의 반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의 감정이 잦아들자 자연스럽게 인정받기 위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그저 나 자신에 대해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싶어졌다. 나 자신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이해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더 가지고 싶어서, 내 삶을 보다 책임감 있고 자신 있게 살고 싶어서 이제는 나를 위한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아직 제대로 습관이 자리잡지 못해하다 말다를 반복하여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실망스러움의 감정을 자주 오가고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정말로 공부하고 싶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사람들이 목표와 대가 없이도 자발적으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후로, 나는 비로소 공부가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야 진짜 나로서 살아가는 삶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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