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순이 : 오직독서뿐 (7)
서양 고전 소설 읽기의 재미
나의 소설에 대한 관심은 소위 말하는 '세계 명작' 동화 읽기에서부터 시작됐다. 텔레비전에서 오후 5시는 되어야 '어린이 프로그램'을 해주던 시절을 살았던 나는 매일매일이 너무 심심했다. 내가 기억하는 무렵부터의 유년 시절에 나는 동네에서 좀 외따로 떨어진 집에 살고 있었고, 아이들의 안전에 대해 걱정이 많았던 엄마는 자식들이 마음대로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으셨다. 뭐 내 성격상 막 혼자서 밖에 나가서 놀 깜냥이 안 되기도 했다. 그래서 늘 "심심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시절에 유일한 오락거리는 동화책 읽기였다. 아버지는 퇴근길에 한 번씩, '소년생활칼라북스'를 사다 주셨는데, 외투 주머니에 숨겨서 가져오셔서 우리 자매들 앞에서 쑥 꺼내 주시면, 너도 나도 먼저 읽겠다고 외치곤 했다. 그때 읽었던 '기암성', '몽테 크리스토 백작', '15소년 표류기' 등의 외국 소설들. 나중에 원작이 4~500 페이지의 두꺼운 책으로 몇 권씩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고 기함하기도 했지만.. 이런 소설들을 나는 참으로 좋아했다.
[언니가 만들었던 표. 아버지는 이걸 양복 주머니에 넣어 다니시면서 우리 집에 없는 책들을 골라 사 오시곤 했다.]
그때의 습관이나 성향이 아직 남아 있어서인지, 지금도 나는 '고전'이라 불리는 옛 서양 소설들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책 읽는 일이 시들해지는 시기가 오면, 나도 모르게 이런 고전 소설들 중 한 권을 집어 들게 된다. 어른이 되어 읽는 고전 소설들은, 어이가 없다, 싶을 정도로 긴 분량인 경우가 많았다.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서 이런 사변적인 긴 소설들을 읽다니? 누구는 시간 낭비라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100~150여 년 전에 씌어진 소설들을 읽으면서, 인간의 삶이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음을, 특히 인간의 감정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여전함을 알게 되는 일은 묘하게 위안이 된다. 동시에 지금의 내 생활과 거리가 먼 사건들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재미에 빠지는 것 또한 현실의 복잡한 일들과 고민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게 함으로써 잠시 동안이나마 나를 괴로움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때로는 이런 소설들을 읽을 때가 괴롭고 몹시 지겹기도 하다는 사실도. <안나 카레니나>는 세 번 시도 끝에 겨우 완독했다. 중간에 참을 수 없이 지루한 부분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쉽게 훅 읽히지 않고 실랑이가 필요하다는 것, 그게 또 묘한 재미를 준다. 어렵고 지루해도 참고 이겨내서 사소한 것일지언정 내 감상을 갖게 되고 나 이 책 읽었어, 하고 말할 때는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기도 한다.
고전 소설이 좋으니 많이 읽으세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의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고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고전 작가들 중에서 내가 가장 애정을 느끼는 작가가 있다면, 그건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이다. 톨스토이의 소설은 세상의 다양하고 넓은 모습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한다. 세속적인 인물들이 나오는 동시에 수도자 같은 특성을 가진, 인간의 길을 고뇌하는 인물도 나온다. 이들은 다른 인물들과 또 세상과 끊임없이 갈등을 하지만 때로는 작은 일에서 삶의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찌질하다 싶은 정도까지 인간 감정의 밑바닥을 보여주기도 한다.
몇몇 고전 소설들의 첫 문장을 인용해 본다.
가장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은 이 문장이지 않을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학동네판, 박형규 옮김)
다음 두 소설들의 첫 문장도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수십만 명의 인간들이 넓지도 않은 땅덩어리에 빽빽이 모여 살면서 그 땅을 황무지로 만들고, 생명체라고는 그 어떤 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돌더미로 뒤덮고, 돌더미 사이로 풀이 비집고 나오면 닥치는 대로 뽑아 버리고, 석탄과 석유를 마구 태우고, 나무를 베어내어 금수들이 떠나게 만들었다."(톨스토이, <부활>, 문학동네판, 백승무 옮김)
"부유한 독신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시공사판, 고정아 옮김)
아, 이 소설은 하도 예쁜 리커버판들이 많아서 수집하자고 들면 책장 한 칸을 다 채우고도 남을 판이다. 인스타에서 검색해 보면 외국 책들 중에서도 예쁜 판본이 많다.
지금 읽고 있는 고전 소설의 첫 문장은 이것이다.
"드니즈는 자신의 두 남동생과 생 라자르 역에서부터 걸어왔다."(에밀 졸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시공사, 박명숙 옮김)
마지막으로 퀴즈.
다음은 어느 소설의 첫 문장일까요?
"오늘 엄마가 죽었다."(민음사판)
(이 줄 바로 아래 부분을 마우스로 긁어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
답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