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이 : 부끄러움을 팝니다 (7)

누군가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적이 없는

by 일주일의 순이

어리고 젊었을 시절에, 사랑하는 감정으로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어떠한 이유로 한쪽이 인연의 끈을 놓아버린 탓에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가끔씩 함께 했던 추억들을 빛바랜 사진첩을 열어보듯이 회상할 수만 있다면 그와의 인연은 나름 괜찮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은 그런 인연으로 남아 주었지만, 나에게는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도망치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운 인연이 있다. 나는 그와의 인연을 그렇게 마무리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그 아이는 연애 횟수에 넣지 않는, 횟수에 넣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남자 친구가 있었고 그 아이 역시 그것을 알고서도 만났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 인연의 비극적인 시작으로서 잘못 채워진 단추인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으로서 또 다른 만남을 가지는 것 자체가 바람이기에 부끄러운 일이라면 일이겠지만,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감정이라는 것이 생각만큼 정확하게 재단되거나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서 문제였다.


나는 그 아이를 인터넷 채팅방에서 만났다. 채팅으로 만났다고 하면 일회성 만남을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대학생 때에는 그렇지 않은 목적으로 채팅을 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심심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그저 생각이 맞는 사람들과 잠깐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채팅을 많이들 했었다. 당시 남자 친구가 갓 취업해 한 달간 신입 연수를 받는 탓에 주말마다 너무 심심했던 나는 우연히 생각과 취미가 비슷한 그 아이를 채팅방에서 만나게 되었다. 공감대가 비슷하고 취미가 비슷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 이야기했고, 그와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서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 뒤로도 음악의 mp3파일을 공유하며 음악과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둘도 없는 채팅 친구가 되어 갔다.


처음에는 취미가 비슷하고 생각이 비슷하여 그런 부분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점점 서로에 대해 알아갈수록 궁금증이 커져서 다니는 학교와 사는 곳 - 신뢰롭지 않은 관계에서는 철저히 익명성을 지키는 것이 내 나름의 원칙이었다 - 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아이는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게다가 시험 준비로 내가 사는 곳 근처에 살면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길을 오가며 우연히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 아이가 너무나 궁금하게 느껴졌다. 가상의 현실 속 인물이 내 눈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당장이라도 만나서 그 아이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채팅이 아닌, 직접 만나서 얼굴을 보면서 나누는 대화는 어떠할지도 너무나 궁금했다.


드디어 만나기로 약속한 날, 그 아이는 자신을 보고서 절대로 놀라지 말라는 의문의 말을 던진 뒤 갑자기 채팅방을 나가버렸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그 아이는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겼거나 아니면 애초에 나올 생각이 없었나 보다 싶어 터덜터덜 자리를 뜨려는데, 골목 어귀의 그늘진 곳에서 키가 큰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도 놀랐지만,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채팅창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수줍어하는 그 아이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어색하게 찡그리고 있었다. 목 또는 안면 어딘가의 근육이 뒤틀리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한 손에 팝콘을 들고 있었다. 팝콘을 많이 좋아해서 선물로 주려고 가지고 나왔느냐고 내가 묻자, 그 아이는 그게 아니라 만약에 내가 자신을 보고서 놀라서 가버리면 집에 가서 팝콘이나 먹으며 영화를 보자는 생각으로 바로 옆 편의점에서 사 왔다고 했다. 거절당하고 외면당하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 내 마음에 깊은 슬픔으로 전해졌다. 그 아이의 첫인상과 나를 보며 지었던 표정들, 그날 오랫동안 함께 나눈 이야기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날 그 아이가 한 손에 파란색 커널스 팝콘을 들고서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했던 그 순간만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첫 만남 이후 더욱 친해진 우리는, 각자가 준비하는 시험공부를 하며 점심을 같이 먹는 도서관 친구가 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푹 빠져들게 되었다.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남자 친구의 상황이 다행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이제껏 만나본 어떠한 사람들보다도 이 아이는 사람을 끌리게, 아니 홀리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옷에서 나는 향기도, 손길도, 찡그리듯 짓는 미소도, 그 아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묘하게 완벽하리만큼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예술품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구 상에 단 하나뿐인 예술품. 그 아이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만약에 그 아이에게 장애가 없었더라면, 그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아마도 일요일 오후에 한가롭게 채팅창에서 대화나 나눌만한 존재가 아닌, 내가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옴므파탈이 되어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정말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아이였다.


우연히 발견한 그 아이의 팔뚝에는 깊게 파고든 붉은색 상처가 남아 있었다. 얼마 전 헤어진 여자 친구와 싸우다가 생긴, 여자 친구가 남긴 손톱자국이었다. 자신과 교제하는 것을 여자 친구 집에서 반대하였고, 그로 인해 격렬하게 감정싸움을 한 끝에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는 안쓰럽기보다 가끔은 그 대상인 여자 아이에 대해 질투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나 역시 남자 친구가 있었기에 그런 질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다만 지금 이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만 행복해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와 연애 비슷한 것을 하였었다. 함께 손잡고 교정을 누비고, 밤새워 통화하다가도 보고 싶어 지면 새벽 2시에 가로등 길을 따라 혼자서 겁도 없이 그의 집 앞까지 찾아가기도 했었다. 나는 지금의 남자 친구를 정리하고, 이 아이와 먼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에 이 아이와 교제하는 것을 집에서 반대한다면, 나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랬는데 -


어느 날부터인지 그 아이의 연락이 뜸해졌다. 갑자기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겼다며, 학교 앞 자취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더니 그 후로 거의 연락이 끊기다시피 했다. 그 아이의 집이 서울 어느 역 근처인 것만 알고 있어서, 답답하기도 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그 역 앞에 가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받지 않는 전화를 걸다가 지쳐, '나 지금 너희 집 근처 역 앞에 와있어'라는 문자를 보냈을 때, 그 아이는 몇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아주 지친 얼굴로, 보자마자 왜 왔느냐며 앞으로 연락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집안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져서 경황이 없다고 했다. 집으로 가야 한다는 그 아이를 배웅하며, 나는 진심으로 그 아이를 걱정했다. 그랬는데 -


한 달이 더 지났을까. 깜깜무소식이었던 그 아이를, 나는 학교와 맞닿아 있는 지하철 역 계단을 오르다가 우연히 만났다. 아니, 정확히는 그곳에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옆에는 키가 작은, 파마머리의 여자아이가 있었고 둘은 매우 정답게 서로를 쓰다듬고 있었었다. 그 아이의 옆모습은 더없이 밝아 보였고 편안해 보였다. 그 아이의 표정만으로 그녀가 헤어졌던 여자 친구임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집안일로 인한 연락두절은 그저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었구나. 순간 계단을 오르던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그 아이를 쫓아가서, 나는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내 사랑의 끝을 보아야 했다. 이대로 계속 연락을 기다리는 비참한 일방적인 관계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


조심스럽게 뒤를 쫓았다. 가까이 다가가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에 놀란 두 사람 모두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고, 그 아이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아이를 노려본 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냥 돌아섰다. 그리고 대신 문자를 보냈다. '이게 네가 끝내는 방식이야?' 몇 걸음이나 더 걸었을까, 갑자기 답문이 도착했다. 아무리 연락해도 받지도, 절대 연락하지 않던 그 아이로부터 문자가 온 것이었다. '미안해, 떠났던 여자 친구가 다시 돌아왔어.'


내가 만일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답문을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절대로 그에 대한 답문을 그런 식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남자 친구를 두고서 바람을 피운 사실보다도, 그 아이에게 만나자고 졸랐던 것보다도, 이런 상황인 줄도 모르고 그 아이를 걱정하며 두 달간 하염없이 연락을 기다렸던 것보다도 더 많이 후회하는 것이 바로 그때 그 문자를 보냈던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병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서.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의 최후통첩 같은 문자를 받고서도 마음 한 구석에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끼고 미칠 것 같은 비참함을 느꼈다. 그런데 만약 앞으로도 내가 그의 연락을, 그와의 다음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면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나는 미치도록 그 아이가 좋았었다. 미련을 도저히 버리지 못할 만큼 그에게 빠져있었다. 그에 대한 미련을 깡그리 없애버리고픈 마음 때문에라도 나는 그 말을 메시지로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아이를 상처주기에 그보다 더 심한 말은 세상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큰 상처를 줘 놓고서 다시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 말에 그 아이는 어떤 상처를 받았을까. 문자를 보내 놓고서 나는 옆에 서 있는 여자 친구에게 더 이상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주지 못하게 되기를, 그냥 멍하니 서서 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보낸 문자는, 그 아이에게 입힌 상처가 얼마만큼이었는지와 상관없이 나에게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상처가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실로 사랑했다고 생각한 존재에게 그런 모진 말을 퍼붓고 돌아선 내가, 과연 정말로 그 아이를 사랑한 것이 맞을까. 나는 내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얻고 싶을 만큼 사랑했다고 믿었는데, 결국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를 배신했다는 것을 이유로 이렇게 그 아이를 비참하게 만드는 말을 퍼부어도 되었을까. 나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스스로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그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나는 내가 - 꼭 그 아이가 아니었더라도 -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고 믿었던 시간들을 부정해버렸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만큼 비참하게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 역시 내가 그를 사랑했던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 아이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역겹고 부정하고 싶은 존재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의 사랑을 끝맺는 것은 그 아이의 몫이지만, 남겨진 내 사랑을 끝맺을 권한은 나에게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시궁창에 처넣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었다. 나는 그 문자를 보내 놓고서 알아버렸다, 나는 그 아이보다 나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고, 어쩌면 그런 그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나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가장 소중하고 진실되었다고 믿은 사랑을 더없이 잔인하게 마무리해버린 내가,

다른 이에 대한 사랑도 결국 나에 대한 사랑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 나는 한없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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