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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영화: 알래스카 경이로운 자연, 칠흑의 공포

곰, 사람 주의

by 불드로




# SCENE 1. 도시 여행자의 편견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자연 풍경보다는 도시의 네온사인과 신나는 음악을 사랑하는 ‘음주가무형 여행자’다. 그런 내게 알래스카는 ‘전 세계 모든 나라 여행’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위한, 언젠가는 거쳐야 할 숙제 같은 곳이었다. 열정적인 중남미에 비하면 조금은 심심할 것이라는 편견과 함께.

하지만 앵커리지에서 작은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옛 러시아의 주도였던 ‘싯카(Sitka)’로 향하는 순간, 나의 편견은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마치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처럼, 현실감을 잃어버릴 정도로 몽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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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주인의 말대로, 싯카는 날것 그대로의 대자연이었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청량하고 상쾌한 공기. 나는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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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2. 도시 소년, 자연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

국립공원에 들어서자 ‘곰 주의’ 푯말이 곳곳에서 나를 반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경이로운 장면과 마주했다. 바로, 연어의 대장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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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14인치 브라운관 TV 속 ‘동물의 왕국’에서 보던 연어 떼는 그저 신기한 그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 눈앞, 얕은 강바닥을 가득 메운 수천수만 마리의 연어들은 살아있는 생명의 경이, 그 자체였다. 팔뚝만 한 녀석들이 산란을 위해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처절한 몸부림. 그 역동적인 에너지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누 떼도, 갈라파고스의 바다사자도 내게 이런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그 순간, ‘음주가무형 여행자’의 가면이 벗겨졌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대자연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 SCENE 3. 칠흑 같은 공포 속으로

그렇게 며칠을 평화롭게 보낸 뒤, 나는 싯카를 떠나야 했다. 나의 독특한 여행 습관 중 하나는, 10km 이내의 거리는 공항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운동도 되고, 관광지가 아닌 진짜 현지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침 7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4시에 길을 나서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치명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여기는 인구밀도가 극히 낮은, 야행성 곰들의 천국 알래스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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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 들리는 것은 내 거친 숨소리와 배낭 멘 내 발소리뿐. 인적은커녕 지나가는 차 한 대 없었다. 곰이 출몰한다는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길. 겁이 덜컥 났다.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저 앞 공원 쪽에서, 거대하고 시커먼 무언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헉… 저게 뭐지?”

곰일까, 사람일까. 어느 쪽이 더 최악의 시나리오인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돌아서 미친 듯이 튀어야 할까? 하지만 저 거대한 물체가 나보다 빠르다면? 배낭까지 멘 나는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시커먼 형체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마침내 희미한 달빛 아래 그 윤곽이 드러났다. 키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구의 흑인이었다.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는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곳. 이렇게 광활한 땅에서 사람 하나쯤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종교도 없는데, 절로 기도가 나왔다.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게 해주세요.” 그가 나와 스쳐 지나가기 직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굵고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Hi~”

그의 손에는 총 대신 일과를 마친 노동자의 도시락 가방이 들려있었다. 아마도 이른 새벽, 대중교통이 없는 이곳에서 일터로 걸어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하이’였다.


# SCENE 4. 교훈

1시간 30분 만에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공항 내부에 전시된 거대한 박제 곰을 보자 다시 한번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저런 녀석과 마주쳤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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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굳게 다짐했다.

“다시는, 절대로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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