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 겪어 봤어?
# SCENE 1. 테러 대응 지침서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한 편의 테러 대응 매뉴얼 같은 글을 읽고 있었다.
“피랍/납치 대비 비상연락망 사전 숙지, 불필요한 외출 자제, 야간 통행 절대 금지, 총기 강도 대처 요령: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응할 것...”
이 무시무시한 지침서는 첩보 영화의 소품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외교부가 베네수엘라 여행객들에게 공지하는 공식 안전수칙이었다. 모든 지표가 ‘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세계 1위의 석유 부국이 어쩌다 최악의 치안 붕괴 국가가 되었는가.
그런데 나는 왜 그곳으로 향했을까?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미스 월드의 나라’라는 명성이 정말 사실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원초적 호기심. 둘째, 경제가 파탄 났다면 역설적으로 투자의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사업가적 상상력. 셋째, 공짜나 다름없는 전기로 비트코인을 채굴하면 어떨까 하는 더 엉뚱한 공상.
결국 호기심이 공포를 이겼다. 나는 기어이 카라카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 SCENE 2. 다른 세상에 입국하다
32시간의 비행 끝에 창밖으로 카라카스의 해안선이 보였을 때,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잘못 탔다가 납치당한다는 흉흉한 소문. 나는 사전에 섭외해 둔 Airbnb 호스트의 차에 오르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가 베풀어준 첫 번째 환대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60대 초반의 호스트 옆에는 175cm는 됨직한 20대 미녀가 함께였다. 딸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수줍게 답했다. "아니요, 우린 연인이에요." 나는 베네수엘라의 명성을 다른 방식으로 실감하며 그의 아파트에 입성했다.
도착과 동시에 나는 이 나라가 얼마나 고립되고 망가졌는지 깨달았다. 한국 휴대폰 데이터 로밍 불가. 관광객은 현지 유심 구매 불가. 현금이 없어 필수적인 직불카드 역시 거주권 없이는 발급 불가. 물은 하루 두 번, 한 시간씩만 나왔고 전기는 수시로 끊겼다. 호스트라는 ‘현지 조력자’가 없었다면, 나는 이 도시에서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철역에서는 고장 난 발권기 앞에서 사람들이 30분씩 줄을 서 있었고, 표는 직원이 현금만 받고 수기로 팔았다. 어렵게 표를 구해 개찰구에 갔더니, 그마저도 고장이라 직원이 일일이 손으로 표를 확인했다. 국가 시스템 전체가 멈춰버린 도시. 나는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현금 찾기위해 길게 늘어선 줄]
# SCENE 3. 불타는 영혼, 금단의 문을 열다
인터넷의 모든 여행기는 한목소리로 경고했다. ‘낮에만 다니고, 밤에는 절대 밖에 나가지 말 것.’
하지만 내 닉네임은 ‘불드로’, 불타는 영혼 페드로가 아닌가. 이 도시의 진짜 심장이 뛰는 밤의 풍경을 보지 않고서야 어찌 이곳을 여행했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마침내 금기를 깨고, 심야 클럽 탐방에 나서기로 했다.
자정이 넘어 혼자 택시를 잡는 순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 기사가 나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면 어떡하지?’ ‘클럽에서 시비가 붙거나 총기 난사라도 벌어지면?’ 택시 창밖으로 스쳐 가는 카라카스의 어둠은 모든 것을 삼킬 듯이 깊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클럽 입구의 보안 검색은 공항보다도 삼엄했다. 온몸을 샅샅이 뒤지는 철통 검색.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이 안에서는 총기 사고가 날 일은 없겠구나.
문을 열고 들어선 클럽 내부는 별천지였다. 토요일 밤의 열기로 가득 찬 공간, 그리고… ‘와… 진짜였어!’ 눈을 돌리는 곳마다 비현실적인 미인들이 가득했다. 이것이 미스 월드의 나라구나. 나는 VIP 자리에 위스키 한 병을 주문했다. 가격은 단돈 50달러. 무사히 이곳까지 왔다는 안도감,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만족감, 그리고 심장을 울리는 음악이 뒤섞여 최고의 칵테일이 되었다.
그날 밤, 옆자리의 미녀들과 어울려 춤을 추며, 카라카스의 밤은 새벽 5시까지 불타올랐다. 내 모든 여행을 통틀어 가장 긴장되고, 가장 보람찼던 하루였다.
위험하고 불편했지만, 그래서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도시. 다시금 그 아찔했던 긴장감과 불편함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부디 나를 따라 하지는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