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게 있어달라던 그 애는
요상하게도 내가 지겨워졌는지 먼저 떠났다.
제발 먼저 떠나지 말아달라던 그 애는
결국 제 발로 먼저 떠났다.
앞뒤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 세상 만사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고 싶은 것이 누구나 하나 쯤은 있는 것이고
나에게는 너가 그랬다.
내가
영원을 꿈꾸자는 말에
곧이 곧대로 영원을 꿈꿔버렸다는
멍청한 사실을 너는 분명 알고 있었다.
네 싸늘한 표정에 내 두 볼을 꼬집힌 나는
비로소 꿈에서 깼다.
그래 나는 멍청했다.
나는 기대하지 않는 법을 모르고
마음을 주지 않는 법을 모른다.
나는 기대하지 않는 것을 기대하면서도
마음을 냅다 줘버리는 짓을 잘한다.
허공에 쏟아낸 마음을 다시 쓸쓸히 주워담으며
왜 내가 싫어졌는지 묻지 않았다.
멍청한 천재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방법으로 멍청한 짓을 해낸다.
삽시간에 나는 정수리가 잠기도록
허망한 감정의 구렁텅이 속으로 깊게 깊게
잠수해버렸다
수압에 내 가슴이 조이고 있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물장구로 한참을 첨벙이다
겨우 정수리를 물밖에 띄워놓고
눈가에 따갑게 찰랑이는 수면을 걷어내고 있었을 때 즈음
280mm인지 280mm 만큼의 물방울이
다 마를 때까지의 몇 안되는 발자국은
내게로 다가오던 넓은 간격으로 성큼이며 다가오던
그 발자국과 닮아있었다.
이미 물기가 다 사라지고 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