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가사리 Oct 15. 2019

준비생의 마음

작은 점과 같은 나날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던 날을 기억한다. 꼭 창가에 앉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하늘에 닿을 수 있다는 설렘, 포근하고 부드러워 보이던 구름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비행기의 바퀴가 땅에서 떠오르고, 콩닥 거리던 마음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장난감 블록처럼 작아진 집들, 자동차들, 숲과 강들, 함께 땅을 밟고 있을 때 나보다 컸던 것들은 손톱만큼 작아졌다. 땅과 점점 멀어지며, 비행기는 뿌연 연기로  휩싸인 공간을 재빠르게 통과했다. 짙은 안갯속과 같은, 진짜 구름의 모습이었다.


© Free-Photos, 출처 Pixabay

이는 이미 내가 땅에서 경험한 것이었다. 천천히 동이 트는 새벽의 숲길에서, 촉촉한 풀 내음을 맡으며 짙은 안갯속을 걸었다. 비행기에서 본 구름과 내 사이엔 단단한 창이 있어, 온도와 습도, 냄새를 맡을 수 없지만 시선이 머무는 풍경은 닮아 있었다. 다만 나의 발이 땅을 딛거나, 아닌 것의 차이일 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경험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경험에는 다 이유가 있을까? 알 수 없는 오늘의 시간은 언젠가 ‘그 날’에 그 의미를 깨닫게 될까?


© lukasneasi, 출처 Unsplash


오늘의 나는 다시 ‘준비생’ 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어?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 나에게 간절한 그 ‘무엇’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목표가 없는 이처럼 보이는 내게, 그들이 말하는 ‘무엇’ 은 많았다. 결혼 한 지 1년 되었는데, 이제 ‘엄마’가 될 준비 해야지? 여태 일한 게 아까운데, 거기서 다시 ‘취업’ 할 수 없나?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할 계획이야? 스스로 작아지는 날이면, 가벼운 깃털 같던 질문들은 눈물에 젖어 이내 숨이 가빠진다. 스스로 확실한 ‘무엇’을 발견하게 되면, 더 당당한 준비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마음은 더 단단해질까?


——


‘무엇’을 향해 전투적으로 살았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셀 수 없이 많은  ‘무엇’ 이 좌절되고 갑자기 닥친 ‘다른 어떤 것’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은 처음엔 씁쓸하지만, 그 쓴 맛에서 가끔 단 맛을 찾아갔다.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기쁨이 컸다. 강렬히 ‘무엇’을 원하는 것은 때론 의미가 없다는 걸 조금 알게 됐다. 전투력을 키우는 건, 인생에 큰 의미가 없었다.


© jamesponddotco, 출처 Unsplash


여전히 나는 오늘도 ‘준비생’이다. 매일 눈을 뜨고, 그 날 나에게 닥친 소소한 일을 하는 연습- 쉽지 않은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 음식을 만들고 함께 먹는 것, 나의 공간과 곁에 있는 이들을 돌보는 것- , 또 스스로 매일 낯선 나를 마주 하는 용기, 다른 이의 ‘무엇’을 힐끗 대며 나 자신을 자책하지 않는 호흡, 당장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점과 같은, 무수한 반복의 나날들이 그 어느 날 선으로 이어질 순간을 기다린다. 그때가 오면 너무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자. 그 날의 담담한 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겨둔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매한 계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