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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Oct 31. 2019

가끔은, 또 어떤 때는

모든 지영이들에게

“가끔은 행복하기도 해요. 또 어떤 때는 어딘가 갇혀있는 기분이 들어요.”

_ 영화 <82년생 김지영>

빛이 들어오는 작은 상담실에 앉은 지영의 모습, 그녀의 일상으로 화면이 바뀐다. 또 다른 빛이 드는 베란다. 낮의 분주한 드럼 세탁기, 그 앞에 앉은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그녀의 옆모습에 담담한 목소리가 오버랩된다. 지금 그녀는 기분은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 걸까, 행복일까 아니면 갇혀있을까?

영화 <82년생 김지영>

3년 전 책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책을 건네주던 친구는 “조심해. 너무 슬퍼. 계속 눈물이 났어. 우리랑 너무 똑같아.”  그 날 단숨에 책을 모두 읽었다. 지영의 삶에 초대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당시 나는 아이도, 남편도 없는 미혼 여성이었지만, ‘결혼’으로 얻게 될 많은 일들과 두려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또한 아주 오래전 어떤 장면이 생각났다.




그 날은 저녁에 약속이 있었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연히 지하철에서 아는 오빠를 만났고 함께 역에서 내렸다. 출구로 나가는 계단을 함께 오르는데, 바로 앞에 어떤 여성분의 엉덩이를 만지는 아저씨를 봤다. “아저씨, 뭐하시는 거예요?!”, “어허허, 내가 우리 딸 같아서 그래~미안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표정이 굳었다. 여성은 도망치듯 재빨리 출구로 나갔고, 아저씨도 갈 길을 갔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던 우리의 대화는 잠시 단절됐다. 그때의 나는 그 여성의 편에 서서 연대하여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어느 새벽녘, 길에서 만났던 바바리맨 앞에서 도망치기 바빴던 또 오래 전의 나처럼, 나는 침묵했다. 무엇을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 wvanbus93, 출처 Unsplash


책이 나오고 3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했다. 하던 일을 그만두었고 그를 따라 해외로 나왔다. 1년 반 만에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고, 때 마침 <82년생 김지영>을 보게 됐다. 오랜만에 만난 막내아들 부부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시어머니도 함께였다. 고민이 됐다. 장면 장면마다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내 눈물이 또 어떤 말로 다가갈까 신경이 쓰였다. 캄캄한 영화관에서 시어머니, 남편, 그리고 나 순서로 앉았다. 스크린 속 부부의 대화 속에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담담한 톤의 지영의 목소리에 몇 번이나 눈물이 차올랐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한국에 와서 친구들을 만났다. 영화 속 지영처럼 내가 떠난 옛 직장의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다. 새로운 환경 속에 출구를 찾은 이들의 소식을 듣기도 한다. 그 앞에 나만 출구를 못 찾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지영의 대사가 마음을 맴돈다. 그래도 아이가 없으면 날아다닐 수 있어!라는 결혼하고 아이 넷을 양육하는 친구의 말에 또 다가오지 않은 행복과 두려움을 감히 가늠해본다.




“언니, 언제 와요? 여기는 눈이 왔어요. 길이 미끄러워요.” 모스크바에 있는 이의 메시지를 받은 오늘, 한국의 날씨는 따뜻한 햇살이 있는 대신 미세먼지로 공기가 탁하다. 햇살이 없는 길고 긴 겨울 왕국으로 돌아갈 시간, 춥지만 맑은 공기의 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 또한 “가끔은 행복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갇혀있는 기분이 든다” 지극히 정상적인 기분, 다만 나를 포함, 내가 아는 모든 지영이들이 좀 더 자주 가끔의 시간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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