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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Nov 28. 2019

이것 또한 지나 가리라

나만의 겨울을 보내는 방법

“일 년의 열두 달 중 뺄 수 있는 달이 있다면, 11월이야.” 러시아인 친구는 말했다.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서 앙상한 나무, 해가 뜨지 않은 듯 짙은 안개로 자욱한 하늘, 잿빛 하늘과 마주한 잿빛 바닥 사이에 우리는 서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힘든 시간이 있다면 11월과 3월이다. “그래도 3월은 여성의 날이 있잖아. (이 곳에서는 3/8 여성의 날은 특별하다. 여성이 최고로 대우받는 날!) 그나마 견딜 수 있지, 11월은 정말 달력에서 없애고 싶어.” 이 시간을 견디기 힘든 건 러시아인뿐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함,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지만 눈이 내리지 않는 이 계절, 나는 날씨 신고식을 치르고 있다. 매일 의지적으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생각한다. 행복은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닌 잦은 빈도에 있다는 말을 마음에 담았다. 수시로 울적함을 날릴 수 있는 것들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내려고 애썼다.


© worthyofelegance, 출처 Unsplash


하나는 음악이다. 우쿨렐레 피크닉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듣는다. 이 밴드의 음악은 내게 오키나와의 다정한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수년 전 친구와 오키나와 여행을 떠났다. 일본 영화 <안경>을 좋아했고, 영화의 배경이 된 요론 섬을 찾았다. 그곳은 오키나와 본 섬에서 배를 타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 추석 연휴였다. 아직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영화의 촬영지였던 숙소의 주인은 우리가 두 번째 한국인이라고 했다. 성수기가 살짝 지난 섬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는 많지 않았다. 우리는 자전거를 빌려 작은 섬을 한 바퀴 돌았다. 동네슈퍼에 자전거를 세우고, 잠시 시원한 물을 사 온 사이 밖에서 기다리던 친구의 자전거 바구니에 맥주 2 캔이 놓여있었다.


© yessijes, 출처 Unsplash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주셨어.”  우리는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얼굴에 대었다. 발갛게 익었던 두 볼이 시원했다. 아무도 없는 섬을 돌며 우리는 우쿨렐레 피크닉 앨범을 들었다. “알로하, 오 알로하 - “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 시간이 생각난다. 그 날과 너무 다른 이 곳, 막막하고 무엇을 하면 좋을까 싶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 나는 같은 앨범을 듣는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웠던 그때는 슬퍼지고 싶어 지지 않아서 흘려버렸던 트랙 <이 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 노래를 마음에 새긴다.  

마음이 아플 때 기뻐질 수 있는 한 마디
마음이 기쁠 때 슬퍼질 수 있는 한 마디
이 것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이 찾아와 나를 집어삼킬 때
마음에 새기라. 이 것 또한 지나가리라.

-우쿨렐레 피크닉 2집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도쿄의 겨울은 유독 매서웠다. 첫 번 째 직장을 접고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1년 후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어를 말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그곳에 갔다. 집에서 어학교 까지 가는 길은 자전거로 30분이 걸렸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귀마개를 장착하면 (아주 위험한 일이다!) 쓸쓸했던 도쿄의 거리,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학교 옆 자전거 주차장 가까이 오면,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가 흘러나왔다. 오늘도 제시간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나는 시간을 알 수 있었다. 남자 파트를 들으며 파킹을 마치고, 전주와 함께 학교로 향한다. 계단을 오르며 여성 보컬의 답장을 듣는다. 서로를 향해 보내는 짧은 편지 같기도 한 이 노래가 참 좋았다.


© dovilerm, 출처 Unsplash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그때는 좋았었잖아. 지금은 뭐가 또 달라졌지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 브로콜리너마저 1집 <유자차>




두 노래를 들으며 나는 11월을 보낸다. 어느 날은 뜨겁고 즐거웠던 여름의 오키나와, 작은 바람에도 깔깔 거리며 재워졌던 그 날의 따스함을 꺼냈다. 하루는 매서웠던 바람을 가르며 막막했던 날을 살아냈던 도쿄의 겨울을 귓가에 댔다. 불확실했던 매일을 통과한 나는 지금 안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모든 것을 얻은 듯 행복했던 날,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이 충만했던 날, 혼자 인 것 만 같아 쓸쓸했던 날, 내 마음에 갇혀 허우적 대던 슬펐던 날, 막막한 미래 앞에 두렵고 무서웠던 날, 그 소소한 날들이 음악들과 함께 켜켜이 재워져 있다. 오늘의 나를 알고 미리 써둔 편지 같은 음악을 읽으며 길고 긴 겨울을 보낸다.



이케아에서 온 눈사람과 함께 따뜻한 겨울을 보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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