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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Oct 01. 2019

애매한 계절

너의 자리를 찾는다


“참 이상하지 않아? 나뭇잎 색깔들이 다르다는 거 말이야.” 친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같은 종류의 나무처럼 보이는데, 나란히 자란 두 나무의 잎 색깔이 달랐다. 한 그루는 노랗게 물든 완연한 가을, 다른 하나는 여전히 여름의 시간에 머문 듯한 초록색이었다. 9월이 시작되면서, 모스크바는 말 그대로 ‘애매한’ 날씨가 됐다. 햇볕이 쨍하고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눈이 펑펑 내리게 되는 하얀 겨울 그 사이의 시간, 바로 지금이다. 올 해는 유독 묘한 날씨다. 작년과 비교하여, 두 달 앞서 겨울이 가까워졌다. 어쩌면, 저 나무는 초록잎 그대로 하얀 눈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계절을 건너뛴다면, 생경한 풍경을 보는 나도 나무도 당황스럽지 않을까?


여름도 겨울도 아닌, 애매한 날씨. 흐린 날의 모스크바 산책


모든 일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맛있는 저녁을 위해,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재료를 산다. 밥을 짓기 위해 쌀을 꺼내, 씻고 밥 솥에 담는다. 밥이 지어지고, 음식이 완성되면 모든 준비는 결과와 함께 하나의 과정으로 승격된다. 요즘 홈베이킹을 하며 준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베이킹은 준비의 시간이 꽤 엄격하다. 저울에 맞춰 정량의 밀가루, 베이킹소다, 버터 등의 재료를 준비한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약간의 수정이 가능한 음식과 달리, 오븐 안에 들어가면 내가 손 쓸 수 있는 일은 없다.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어, 때에 따라 절망적으로 느꼈던 이 말이 묘하게도 베이킹의 매력이다. 이번에는 어떤 맛,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 예상할 수 없으니까, 불안함과 놀라움을 동시에 안고 있는 모험처럼- 또다시 언제든지 시도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내 손으로 시도할 수 있는 일’ 들 중 하나다. 이미 데워진 오븐이 아까워서, 굽고 또 한 번 굽는다. 다른 종류의 밀가루로 가장 내게 꼭 맞는 맛을 찾아간다.


© jcbesser, 출처 Unsplash


여름도 겨울도 아닌 애매한 계절, 인생 속 수많은 나의 9월들은 그때그때 달랐다. 학교에서는 새 학기를 시작했고, 회사에서는 결과보고와 계획으로 가득 찼으며, 부모님의 생신과 추석으로 가장 빨리 지나가는 달이기도 했다. 2019년 9월, 나는 오늘 빵을 구우며 이 계절을 보낸다. 결혼을 했고, 아직 자녀는 없다. 해외로 오면서 일을 쉰 지 1년이 넘었고, 러시아어를 배운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로 채워지는 오늘의 인생, 내 앞에 어떤 계절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 chrislawton, 출처 Unsplash


‘우리의 인생은 위기의 연속이고, 다가올 위기를 이겨내는 방법은 지금 당장 눈 앞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그랬다.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다가올 일을 맡는 나의 태도는 지금의 이 애매함을 끌어안고 살아내는 것이다. 늘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수시로 내 속의 다양한 감정과 결탁하길 좋아하는 녀석, 9월의 마지막 날, 너를 반드시 결과가 있는 과정의 자리로 승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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