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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Feb 01. 2022

언제나 '최고예요.'

엄지 손가락이 가르쳐 준 것들

엄지 손가락을 다쳤다. 빛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고는 애플파이를 만들기 위해 채칼로 사과를 썰다가 벌어졌다. 유튜브에서 본 밀푀유 애플파이를 보고, 한국에서 같은 채칼을 사 왔고, 그 성능이 이렇게 뛰어날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모스크바의 사과는 한국보다 작은 사이즈라서 사등분을 하니 더 작아졌고, 조심스레 채칼을 쓴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칼날과 손끝은 가까웠다. 소리를 지르니 방에 있던 남편이 뛰어나왔다.


"아야! 어떡해!"

"어머나, 어쩌다가 그랬어. 일단 지혈부터 하자."


엄지손가락을 꼭 잡고 가슴 위로 올려서 지혈을 하는데, 피가 꽤 많이 나왔다. 무서워서 어떤 상태인지 보지 못하다가, 살짝 보았더니 다행히 살점은 끝이 붙어 있었다. 남편이 약국에 간 사이, 부랴 부랴 포털사이트를 검색했다. '병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고 하지만. 해외에서 병원 진료, 특히 러시아의 병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과잉진료와 오진율이 많다고 했다. 검색을 하니 '피부이식'을 제안받은 글까지... 무서운 글들이 가득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살점이 모두 떨어지지 않고, 끝은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 지혈이 되었고, 남편이 가져온 소독약으로 소독을 하고, 후시딘을 듬뿍 바르고 방수 밴드를 붙였다. 인터넷에서 본 손가락 붕대는 팔지 않았다. 급한 대로 비닐장갑의 새끼손가락 부분을 잘라 엄지 손가락을 감싼 후 테이프로 붙였다. 손톱에 봉숭아 꽃잎 물을  들일 때처럼 엄지 손가락이 비닐 옷을 입었다. 여전히 붉은 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상실은 언제나 깨달음을 준다. 당연하게 주어진 것들의 소중함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에 깨닫게 된다. 일상에서 엄지손가락이 하는 역할이 얼마나 많은지 2주간 절실히 깨달았다.


키보드를 치고 연필을 잡을 때뿐 아니라, 머리를 감으면서 샴푸 거품을 낼 때, 외출을 하기 위해 청바지를 입고 버클을 채울 때, 남은 채소를 보관하기 위해 지퍼백을 열고 닫을 때, 참치나 스팸과 같은 통조림을 딸 때, 양말을 신고 올릴 때.... 엄지 손가락을 주로 쓴다. 압박붕대로 감은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엄지 손가락을 보며,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엄지 손가락의 빈자리를 깨달았다. 안부를 묻는 친구에게 붕대로 감은 손가락의 사진을 보냈다.


" 요즘 매일 '최고예요'라고 표현하고 있어."


다친 부위가 손끝이다 보니 떨어질 듯한 살점이  붙기 위해서는 '최고예요'라는 포즈를 취하고 붕대를 감아야 했고, 그렇게 감은 손가락은 페이스북의 반응 이모티콘 '최고예요' 그대로  닮았다. 무엇이든 '최고예요.'라고 이미 행동을 취하고 있는 손가락이라니  와중에 웃음이 났다. 마음과 달리 몸과 말이 앞서서 좋은 것을 행동하고 뱉을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스크바의 친구로부터 점심 초대를 받았다. 친구가 말했다. '요리  못하는데 걱정이라고' 염려하는 그녀에게도 엄지 손가락 사진을 보내주었다.


"걱정 , 어떤 음식이든  피드백은 '최고예요.'. 지금  엄지 디폴트 값이 최고예요. 거든."  


'최고예요' 손가락

올해는 그런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없이 마음이 울적하거나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그래도 최고'라고 말해줄 수 있는 손가락. 계획과는 다른 하루를 보내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라고 느긋하게 품어줄 수 있는 행동을 먼저 하고 싶다. 뭐, 기분 나쁜 일이나 사람을  만나도 '아, 그래 네가 최고다!'라고 하지 뭐. (아, 이건 잘못된 적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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