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의 고백
며칠 째 마음이 불편하다. 애써 이 마음을 모른 척하고 있다. 운동화 안에 언제 들어온 지 모르는 작은 자갈을 신발 뒤축을 툭툭 쳐서 한쪽으로 옮긴 후 걸어갈 수도 있지만, 이내 다시 자갈은 발바닥에 걸리고야 만다. 신경이 쓰인다. 선택은 두 가지다. 멈춰서 신발을 벗어서 털고 가거나, 또는 그냥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지금 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어차피 이 자갈은 내게 큰 해를 끼치는 것도 신경 쓸 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 혼자 너무 예민한 건지도 모른다. 솔직한 심정을 털어버리고 싶지만, 내 속내를 보이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 두려운 건, 솔직한 마음을 꺼내는 내 마음에 상대에게 원하는 반응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또한 나에게 속내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
"그냥 털어내면 어때요? 말해 버려요."
"뭐라고 말하죠. 저만의 오해이거나, 착각일 수도 있잖아요."
"오해면 또 어때요, 상대가 아니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전 그렇게 느꼈어요.'라고 하면 되죠."
심리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이전에 겪은 일이 튀어나온 건 여전히 내가 비슷한 감정이 찾아올 때 꾹 참아버리는 데 있었다. 자갈을 꺼내기보다 '뭐,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아.'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 상태가 더 편했다.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면 '나는 나이 들어도 저렇게 행동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에, 그건 '미래로 도망가는 것'이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말하지 않고 참아버리거나, 그 상황에서 교훈을 찾으며 미래의 나를 그려보는, 나는 도망자였다.
선생님은 말했다.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 상대방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 이 사람은 관계를 이렇게 맺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중요한 건 그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스스로 알아차려 주어야 한다고 그녀는 알려주었다. 상대의 감정은 나의 것이 될 수 없고, 나의 감정 또한 상대의 것이 될 수 없다. 마음을 털어내고 가벼워질 수 있는 권한을 상대에게 주는 게 아닌,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머리로는 쉬워도 행동은 잘 되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속내를 내비치면 생채기만 남을까 봐 두려웠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서로 마음이 오갔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더 그랬다. 나는 여린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 편히 벗지도, 편하게 신지도 못하는 신발을 신고 강한 척, 걸어가는 걸 택한다.
불편한 마음을 잠재우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좋아했던 책을 읽는 것이다. 지난주 내내 휴대폰을 멀리하고 눈을 뜨자마자 책상에 앉았다. 바로 답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면, 밤사이 쏟아진 단톡방의 수백 개의 카톡도 읽지 않았다. 일찍 잠든 사이 이미 질문과 답이 오간 시의성을 놓쳐버린 대화들이 태반이었다. 책장에 꽂힌 남편의 책들 사이, 연애 때 내가 선물했던 김연수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이 보였다. 좋아했던 구절 앞엔 여전히 마음이 울컥했고, 또 예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구절도 눈에 띄었다.
"몰아치는 바람 앞에서도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꼿꼿하게 서 있다면, 그건 마음이 병든 나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 순간 달라지는 세계에서는 우리 역시 변할 때 가장 건강하다. 단단할 때가 아니라 여릴 때,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볼 때마다 내가 여린 사람이란 걸 인정한다. 여리다는 건 과거나 미래의 날씨 속에서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중략)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_김연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 p.42
이 구절을 읽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과거나 미래의 날씨 속에 살지 않고, 내가 느끼는 감정 그리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것. 어차피 지금의 것도 영원이 될 수는 없을 터였다. 어떤 이의 호감도, 관심도, 칭찬도, 평가도 날씨처럼 수시로 변하는 것일 테니까. 올 해는 도망자로 살고 싶지 않다. 여린 나 그대로, 부딪쳐야 할 일이라면 부딪치고 흘려보내야 할 것은 흘려보내면서 겨울을 보내고 싶다. 쉽게 상처받고, 지치는 마음 그대로 약한 내 마음 그대로 품어주며 지금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