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원이쩨?

사과인간의 소회

by 불가사리


오랜만에 전 직장의 팀장님과 통화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다녀왔다는 그는 대뜸 통화로 내게 말했다. “이십원이쩨?”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번에 배운 러시아어인데, 이거 아닌가? 가이드가 알려준 건데… 이십원이쩨?” 알고 보니 그가 배운 말은 “이즈비니쩨(미안합니다)”라는 표현이었다. 나는 “이십 원 당연히 이쩨~ ”하고 웃으며 통화를 끊었다. 가이드는 러시이어를 쉽게 기억할 수 있게 한국어로 바꿔준 것이다. 마치 ‘오빠만세(all by myself)'처럼 들렸던 팝송의 제목처럼...

통화를 끊고 그 문장을 곱씹어본다. 미안합니다. 이즈비니쩨. 정작 이 말을 내가 러시아인에게 들은 적은 손에 꼽는다. 내가 만난 러시아인들은 먼저 사과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국인 여행자가 미안할 일이 그렇게 많을까. 아니 근데 가이드는 왜 이런 말을 알려준 거야? 괜히 만나지도 않은 가이드를 떠올리며 마음에 부아가 치민다. 내가 바로 ‘사과 인간’이라서다.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이 성숙한 행동이며, 또한 겸손의 미덕이라 배운 나. 어떤 관계에서든 먼저 사과를 하고야 만다. 그것이 내 잘못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기 전에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러시아에 살면서 나는 내게 익숙했던 ’ 사과‘에 민감해졌다.


아이를 픽업하러 어린이 집에 갔다. 아직 발레수업을 하고 있다고 하여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아이들과 산책을 마친 선생님 한 분이 들어오며 ‘아이는 발레 중이야’ 말한다. ‘응 알고 있어.’라고 하니 ‘그런데 도착하기 10분 전에 나에게 메시지를 남겨줘. 아이가 스스로 옷을 입어야 하거든.’ ‘남편이 보냈다고 했는데?’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하며 없다고 한다. 남편에게 다시 확인하며 잘잘못을 따질 수도 없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이즈비니쩨(미안합니다)” 남편에게 뒤늦게 확인해 보니, 다른 선생님에게 보냈는데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되었나 보다며 본인 보낸 메시지를 캡처하여 보내겠다고 한다. 그럴 정도까진 아니라고 했지만, 마음이 찜찜하다. 나는 왜 그때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을까. 무엇보다 그 상황에서 좀 더 뻔뻔하게 “그래? 다른 선생님에게 확인해 봤어. 이상하네. 남편은 보냈다고 했는데...” 라며 능숙하고 뻔뻔하게 대응하지 못했을까. 사과부터 장전하는 나의 태도에는 여전히 초등학교 수준에 머무는 러시아어도 한몫한다는 마음이 들어 스스로가 못마땅하다.


러시아에 온 첫 해, 알파벳도 읽지 못하던 나는 이제 러시아어를 읽고 쓰고 원하는 것들을 조금씩 표현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어가 어렵다. 솔직히 눈치가 늘었다. 눈치로 상황을 이해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내게 가장 긴장되는 상황은 관공서 업무를 보러 갈 때이다.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무심하고 불친절한 러시아인들이 모여있다. 영어를 하는 이를 찾을 거라는 기대도, 외국인이니 이해하려고 눈을 깜박이며 의중을 파악하려 애쓸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둔다. 이상한 걸로 트집을 잡지 않는 러시아인을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대학에서 새롭게 일을 하게 되면서 내야 할 서류들이 많았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던 중 외국인 근로자로서 ‘연금번호’와 ‘세무서‘ 절차가 있다는 걸 알았다. 두 군데 사무소를 걸쳐 무사히 연금 번호를 받고, 마지막 관문인 세무서에 가서 서류를 접수했다. 언제 서류를 받을 수 있냐는 말에 담당자는 ’ 5일 후에 와.’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어떤 접수증도 신청서도 없다. 용기 내어 다시 물었지만 그는 휴. 한숨을 쉬며 다시 그 말을 반복한다. 말이 아닌 비언어적 표현인 한숨과 차가운 눈빛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만다. 그리고 또 습관처럼 뱉고야 말았다. ”이즈비니쩨. “ 그날 밤부터 감기 기운이 돌더니 몸살에 시달리는 중이다. 종일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탈이 났다.

미안하다는 말을 그만하고 싶다. 좀 더 뻔뻔해지고 싶다. 다짐하지만, 나는 조금 전 한국어 수업을 준비하러 온 카페에서도 습관처럼 뱉고 말았다. 빈자리를 찾으며 ‘여기 자리 비어 있나요.’라고 묻기 전에 이동하며 나도 모르게 ‘이즈비니쩨.’ 아휴. 이 사과의 인간아. 나도 이제 그만 미안하고 싶단 말이다. 누군가 제 입에서 머리말처럼 자동 저장되어 있는 ‘미안합니다’ 영구삭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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