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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가사리 Aug 29. 2020

여름 도넛, 납작 복숭아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상품 재입고 알려드립니다.> 반가운 알람이 왔다. <고객님께서 알림 신청하신 유럽에서 맛본 국내산 납작 복숭아 상품이 입고되었습니다.>  드디어! 바로 사이트에 접속하여 장바구니에 넣었다. 3-4개에 15,000원, 다른 복숭아에 비하여 비싸지만 그래도 샤인 머스캣 보다 저렴하잖아?! 이미 뺏겨버린 눈과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4만 원 이상이면 무료배송이니 다른 상품들도 좀 넣어보자. 꽃 삼겹살, 깻잎, 상추... 금세 장바구니를 채웠다. 결제버튼을 누르자 알람이 떴다.

<유럽에서 맛본 국내산 납작 복숭아가 품절되었어요. 제외하고 구매하시겠습니까?>

조금 전까지 눈 앞에서 분홍색의 싱그러움을 뽐내던 납작 복숭아들이 흑백으로 바뀌었다. 곧바로 허무함과 슬픔, 몇 분 전의 나를 향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너무 안일했다. 평일 오후 휴대폰의 알림 문자에 바로 응대할 수 있는 이가 많다. 한국인 대부분 휴대폰을 아주 가까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관했다. 장바구니에 들어있는 다른 상품들이 미워진다. 너희까지 담으려고 이렇게 되어버렸어. 삼겹살, 깻잎... 안 먹어도 되는데! 에잇. 장보기 어플을 닫아버렸다. 다시 한번 납작 복숭아 알람 신청을 꾸욱 눌렀다.


© k8_iv, 출처 Unsplash


남편을 따라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친구들은 러시아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니 추워서 어떡하냐며, 거기도 여름이 있냐고 물었다. 한 친구는 내게 양말장사를 해볼 것을 진지하게 제안했다. 자기가 양말공장 사장님과 친분이 있는데, 양질의 물건을 저렴하게 떼어줄 수 있다며, 추운 나라니까 양말의 수요가 높을 것이니, 이제는 K 뷰티가 아닌 K 삭스의 시대를 함께 열어보자! 고 했다. 솔깃했다. 그러나 6월 중순에 도착한  모스크바의 첫인상은 매우 달랐다. 여름이 시작된 그곳의 햇살은 아주 뜨거웠다.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길의 벤은 마침 에어컨 고장으로 창문을 열고 달렸다. 아프리카 출장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넓은 평야, 하늘에 닿을 듯 키 큰 자작나무들 사이를 지나니 건물들이 빼곡하진 않아 하늘이 시야에 한눈에 들어오는 넓고 넓은 나라였다.


© 12019, 출처 Pixabay


집 앞 작은 쇼핑몰 지하의 슈퍼에 갔다. 러시아의 국민마트(?)라 불리는 곳이었다. 글씨는 낯설었지만 눈에 익숙한 과일, 채소들이 반가웠다. 다른 이름이 쓰인 사과, 크기와 종류가 다른 감자도 가득가득, 가격은 왜 이리 싼 거지? 그러던 중 발견했다. 나의 사랑 납작 복숭아! 처음 프랑스 여행에서 맛보았던 과일이다. 일반 복숭아와 달리 납작하게 눌린 형태가 도넛을 닮아 ‘도넛 복숭아’라고도 불린다. 꼭지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어 깨끗한 것들을 골라 무게를 쟀다. 한편엔 비슷한 사이즈의 납작 복숭아가 나란히 열을 맞춰 긴 박스에 도넛처럼 담겨 있었다. 마치 갓 구워진 붕어빵이 열을 맞춰 나란히 온기를 뿜어내듯,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달콤한 기운이 나를 멈춰 세웠다. 슈퍼가 아닌 재래시장에 가면 누군가의 소원과 염원을 담아 차곡차곡 쌓인 돌탑을 보듯, 납작 복숭아 탑이 곳곳에 쌓여 있다. 여름이 깊어가며, 녹음이 짙어질수록 복숭아는 알이 더 커졌고 당도가 차올랐다.   
 
“이거 언제 까지 먹을 수 있어?”
“곧 끝날 거야. 8월 말까지 나오고 말 걸?”


나의 여름 도넛, 납작복숭아


여름 내내 매일 납작 복숭아를 사다 날랐다. 쌀이 떨어질지언정, 납작 복숭아가 없어서는 안 된다. 2개가 남아있으면 미리 사서 냉장고를 채웠다. 보리차를 미리 끓여두듯, 복숭아를 준비했다. 냉동하여 쟁여둘 수도 없으니 여름에 많이 먹어둬야지.  

“납작 복숭아가 있는, 모스크바에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납작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며 내가 말했다. 턱을 많이 벌리지 않아도, 칼이 없어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여름 간식. 적당히 단단하여 과즙이 많이 흘러서 손이 더러워질 일도 없다. 여름에 쉽게 볼 수 있는 이 복숭아 덕분에 나는 모스크바를 사랑하게 됐다.


© kellysikkema, 출처 Unsplash


어떤 점 하나로 처음 만난 도시가 싫어질 수도 있듯, 작은 것 하나 때문에 그 도시를 좋아하게 된다. 계절도 그랬다. 여름보다는 겨울을 더 좋아하는 나지만, 여름에만 찾아오는 납작 복숭아로 인해 그 어느 때 보다 여름을 기다리게 됐다. 햇빛이 없는 쓸쓸한 모스크바의 가을도,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밤이 계속되고, 비가 오고 을씨년스러운 이상한 봄에도, 여름만 와봐, 여름이 오면.... 납작 복숭아를 만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의도치 않은 코로나로 인해 올여름은 한국에서 보낸다. 휴- 여전히 알람 신청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스마트워치를 찼다. 이번엔 놓치지 않을 거야! 납작 복숭아 한 입 물어야, 이번 여름도 무사히 보내 드릴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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