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의 시간은 헛되지 않아

뿌리가 깊어지는 나날들

by 불가사리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모스크바로 오면서 자연스레 다니던 직장을 퇴사했다. 13년의 경력 중 8년을 꼬박 채운 곳이라 추억이 많았다. 맡고 있던 일을 최대한 마무리하며, 남은 연차도 소진하지 못한 채 퇴사일까지 출근을 했다. 마지막 퇴근길, 기분이 묘했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겠지’ 생각만 했던 작별은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찾아왔다. 이별의 감정을 차분히 돌아볼 새도 없이, 결혼하고, 러시아어를 배우고, 바로 해외의 삶을 시작했다. 친구는 말했다.


© frostroomhead, 출처 Unsplash


“진짜 사랑하나 봐. 남편을 따라 해외로 가다니...”
“응. 그렇게 되었네.”


쑥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늘 입버릇처럼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살 거야.” 했던 오랜 바람이, 그를 만나 이뤄진 거라고 믿었다. 모든 게 빠르고 편리한 한국이지만, 내겐 숨이 가빴다. 잠시 한국을 떠나 1년씩 인도와 일본에 살면서 맛본 안도감과 평화로움에 대한 기억은, 귀국일을 정하지 않은 편도 행 티켓을 끊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 연애를 하며 ‘감정의 저울질이 없는 참으로 무던한 나의 속 깊은 이성 친구(장 자끄 상뻬)’인 남자 친구 (현재의 남편)의 존재가 가장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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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이 행복하면 돼."
"나에겐, 언제나 네가 1 순위야."

남편은 늘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한국을 떠나 가정을 이룬 부부에겐, 다른 문제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믿고 의지할 이도 서로뿐이니까. 다행히 우리는 서로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방향이 같아서 큰 갈등과 다툼 없이 신뢰를 쌓았다.


2020년 3월. 코로나로 인해 러시아를 오가는 하늘길이 닫혔다. 이미 출장을 떠난 남편은 한국에 잠시 머물게 되었고, 나 또한 그가 있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결혼한 지 2년 차 부부는 잠시 한국에서 살림을 꾸리게 됐다.

“진짜 빠르다. 밤에 주문했는데, 아침에 와 있어.”
“어디를 가든 맛있어. 그리고 친절해.”

코로나로 인해 모든 지역 봉쇄령이 떨어졌던 모스크바와 달리, 한국은 봉쇄되지 않았다. 친절한 의료, 빠르고 맛있는 음식, 모스크바보다 삶의 질은 높아졌지만,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마음은 불편해졌다. 여름이면 돌아갈 거라 예상했던 모스크바는, 두 계절이 지나도 하늘길이 닫혀 있었고, 에어비앤비에 머무는 기간도 계속 길어졌다.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임시 거주자에겐 이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밤, 이 무거운 마음을 스스로 찬찬히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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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친정엄마는 만날 때마다 ‘아이’에 관해 물었다. 영상통화를 하며, 행복한 우리 둘의 모습이 있어도, 마지막 인사는 아쉬운 듯 말했다.

“이제 좋은 소식만 하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시댁에서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결혼하고 나니 ‘아이’에 대한, 가족을 포함 주변인들의 보이지 않는 질문, 바람, 궁금증이 느껴졌다. 신체적 나이가 어리지 않은, 아내인 나는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게 꼭 나 때문인 것만 같았다. 해외에 있기에, 피할 수 있던 것들은 한국에 있으니 가깝게 다가왔고, 나보다 나중에 결혼한 이들의 임신과 출산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오지 않은 ‘아이’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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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하늘에서 오는 거니까.”

남편과 나는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우리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이니까, 만약에 주시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수시로 마음이 슬퍼졌다. 한국에서의 나는 결혼으로 인한 경력단절, 회사에서 꺼리는 아직 아이가 없는 기혼여성이었다. 아이는 결혼의 열매처럼 느껴졌고, 일도 아이도 없는 나의 삶은 열매가 열리지 않는 성장이 멈춘 나무처럼 느껴졌다.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직장도, 아이도 없는 내 삶은 이대로 멈춘 것 같아서, 우울함에 젖는 밤이 자주 찾아왔다.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한없이 지친 어느 날,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냈다.

“좀 힘들었어. 지치기도 하고, 멈춰버린 시계 같은 삶이야.”

“멈춤의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은 것 같아. 농사를 지어보니 멈춰있는 아이들은 죽거나 자라지 않는 게 아니라, 뿌리가 깊어지고 있더라. 뿌리가 깊어지면서 가뭄도 병도 잘 이겨내고, 늦지만... 좀 늦어도 꼭 열매도 맺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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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라 생각한 나에게, 친구의 말은 여전히 ‘자라고 있는’ 나를 볼 수 있게 했다. 며칠 후 친구가 보낸 소포가 내가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손으로 하나하나 딴 빨간 구기자 열매, 한 톨 한 톨 수확한 잡곡, 씁쓸한 맛이 매력적인 보리수 잼이 들어 있었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색을 가진, 뿌리가 깊어지고 있는 나무를 떠올린다. 이 시간을 통해 가뭄도, 병도 잘 이겨내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또 누군가를 위한 그늘을 한 아름 내어줄 수 있는 인생이 되고 싶다.


친구가 가꾼 나무들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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