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어요, 회원님

무거운 마음의 나날들

by 불가사리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러시아를 오가는 하늘길이 닫혔다. 이미 싱가포르로 출장을 떠난 남편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나 또한 그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게 봄이다. 40일이 넘게 비가 내리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어도 하늘길은 계속 닫혀 있었다. 언제든지 열리면 돌아가야 하는 처지, 내일을 계획하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도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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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끊었다가, 갑자기 돌아가게 되면 어떻게 해?”
“그래도 시작해. 하고 싶으면 시작하는 거지. ”
“환불도 안될 텐데... 너무 아깝잖아.”

한 달 전에도 같은 고민을 했다. 망설이다가 9월 중순 집 근처 필라테스 학원을 찾았다. 모스크바로 이주하기 전 그룹 필라테스 수업을 들었는데, 재미있었고 계속 배워보고 싶었다. 일단 지난달 제주도 여행에서 무리한 자전거 일주로 허리가 아팠고, 일주일 간 한의원 신세를 졌기에 운동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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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인 수업을 신청하고 싶은데요.”
“횟수로 진행하는데 10회부터 가능해요. 20회부터 할인 폭이 더 크고요.”
“제가 갑자기 해외로 떠날 수도 있어서..”
“20회 해보세요. 참 좋아요. 저희 매니저급 선생님으로 해드릴게요.”


필라테스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던데... 센터장의 말에 귀와 마음이 팔랑거렸다. 사회적 2.5단계로 2주간 문을 닫은 센터는, 이곳 종사자들의 반발이 심해 앞으로 닫을 일은 없을 거라며 그는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바로 20회 개인 수업을 끊었다.




몸과 마음은 같이 간다. 마음이 힘들면 몸을 움직인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에 맞서는 최고의 무기는 일단 몸을 써야 한다. 몸에 먼저 시동이 걸리면, 꺼져 있던 마음에 불이 들어왔고 에너지가 생겼다. 무거운 마음에 시동을 걸기 위해, 나는 늘 돈을 넣었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몸이 있었다. 수영, 성인 발레, 요가, 헬스에 이어 이제는 필라테스가 돈을 꿀꺽 삼켰다.

첫 번째 수업은 내 몸의 현 상태, 유연성을 알아보는 것으로 진행됐다. 169cm, 보통 체격인 나에 비해 선생님은 작고 말랐다. 딱 붙는 레깅스와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선생님 옆에 나는 거인처럼 느껴졌다. 개인 레슨실에서 선생님을 따라 동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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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회원님, 이게 다 벌리신 거예요?”
“네. 이게 전부인데요.”

180도 우아하게 벌려지는 선생님의 다리와 달리, 나의 다리는 50도 정도 될까. 예전에 성인 발레를 배울 때, 당혹스러워하며 등을 눌러주던 선생님의 표정이 생각났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찬찬히 내 몸을 관찰하며 꼼꼼하게 노트에 기록했다.

“회원님은 내전근을 늘리는 운동을 자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네, 어떤...”
“런지 아시죠, 런지를 자주 하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런지. 3년 전 헬스 개인 수업에서 자주 했던 운동이다. 도대체 이런 동작은 누가 개발한 것일까. 고문이 따로 없다. 스쾃-런지-브리지 하체 운동 3종 세트로 헉헉거리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내 몸에 붙어 있는 다리지만, 내 다리가 아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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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선생님, 저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할 수 있어요. 회원님.”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놓아버린 내 다리를 보며 당시 헬스 선생님은 말했다. 이상하게 그 말에 힘이 났다. 철저하게 배신당한 이별로 마음이 무너졌을 때 시작한 운동이었다. 내 마음도, 모든 이의 마음도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내 몸을 믿어보게 됐다. 내 몸을 믿고 시작하니, 마음도 천천히 돌아왔다.





“하나만 더 해볼까요? 할 수 있어요. 회원님.”

필라테스 선생님도 똑같이 말한다. 네. 그럼 하나만 더 해볼게요. 선생님. 저 할 수 있어요.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하나. 둘. 셋. 깊게 심호흡을 하며 몸을 움직인다. 저 아래 꺼져있던 마음에 부릉부릉 시동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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