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소중한 이름
“엄마가 모스크바에 오셨어. 점심을 함께 해도 될까?"
“응 좋아. 매번 받기만 했는데, 내가 대접하고 싶어. ”
러시아인 친구 안나와의 토요일 점심, 그녀의 어머니도 함께 만나게 됐다. 안나는 자주 가족 이야기를 했다. 모스크바에서 일하고 있는 남동생, 고향 블라디미르 집에 있는 정원에서 때에 따라 과실나무를 돌보는 아버지, 손수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직접 딴 과일로 집에서 러시아식 과일 잼, 바렌니(варенье)를 만들었다. 안나를 통해 받은 그녀의 엄마가 만든 바렌니는 잼이 아닌 소스에 가까웠다. 잼의 농도와 질감보다 묽고, 많이 달지 않으며, 과일의 형태가 남아있었다.
"우리 엄마의 바렌니 맛있지?! 나는 이 통을 소독하는 것부터가 어려워. 엄마에겐 바렌니를 위한 특별한 냄비가 있어."
그녀의 바렌니는 맛있었다. 빵에 바르면 촉촉하면서 달큼한 과일도 씹혀서 식감이 좋았다. 오랜 시간 정성으로 농도를 맞추며 끓이는 정성 어린 선물을 냉장고에 두고 아껴 먹었다. 러시아인들은 바렌니를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린니에 곁들이고, 요리의 소스로, 따뜻한 물을 부어 차로도 마신다.
“안녕하세요. 저는 불가사리예요. 지난번에 주신 바렌니 너무 맛있었어요.”
“안녕- 나는 이리나라고 해. 다음에 또 만들어 줄게.”
지난 여행에서 사 온 트러플 오일과 소금 세트를 그녀에게 선물로 건넸다. 소개가 끝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했다.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는 선생님 ‘이리나’는 연신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에서 혼자 지내는 딸의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나야말로 이 곳에서 안나를 만나 행운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가족들은 다들 잘 지내고 있니?”
“네, 모두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불가사리- 우리 엄마에게 가족사진 보여줘.”
휴대폰을 꺼내 결혼식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누구에게나 ‘가족’ 은 소중하고 특별하지만, 러시아인에게 가족은 가장 가깝고도 끈끈한 사이처럼 보였다. 러시아인들은 친해지면 제일 먼저 자신들의 가족사진을 보여줬다. 흑백의 사진 속에 이미 세상을 떠난 안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너도 내게 이제 소중한 가족과 같은 존재야.'라고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러시아인들은 유독 가족이랑 참 끈끈한 것 같아.”
“다들 휴가 때 동생, 엄마랑 여행을 떠나. 친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걸.”
머리가 굵어지고, 각자의 삶이 생기면서 가족이 아닌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때론 가족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친구에겐 할 수 있었다. 친구와 휴가 날짜를 맞춘 적은 있지만, 여동생과 휴가를 맞췄던 적이 있었나?! 결혼 후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한 스페인 세비아 여행에서 해사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한국에 가면 엄마와 함께하는 다음 여행을 계획하리라.
“모스크바의 길에는 가족이 있어요. 레닌과 그의 남동생은 연결되어 있어요.”
러시아의 어학교 세미나 시간, 늘 다양한 정보를 알려주는 에브게니 선생님이 말했다. 모스크바의 대로는 ‘프로스펙트’라고 부른다. 학교로 오는 길, 우리는 ‘레닌스키 프로스펙트’를 지났다. 그 넓고 큰 대로와 연결된 작은 거리(울리자)의 이름은 ‘울리짜. 드미트리야 울야노바’ 였다. 레닌의 남동생 이름이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사람, 모스크바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이야기를 들으며 여동생과 이불 안에서 수다로 밤새우던 밤이 생각나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