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없는 겨울

우리에게 필요한 건

by 불가사리

러시아의 겨울은 밤에 성큼 가까워진다. 눈부신 햇살과 습도가 없어 뽀송한 살결의 여름과 황금빛으로 찬란한 가을이 지나면, ‘밤의 비’가 계절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사실 이 곳의 날씨는 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 거의 없다. 비가 오다가 그치고, 바람이 불고, 눈이 오는 변화무쌍한 하루의 날씨를 묻는 질문에 ‘오늘’ 이 아닌 ‘지금’ 이 붙는다.

“지금 날씨는 어떤가요?”

어학교의 선생님은 늘 수업의 시작에 이 질문을 던졌다. 그 답변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같을 수 없다. 비가 와도 사람들은 우산을 잘 쓰지 않았다. 금세 비가 그치고 또 다른 날씨가 찾아올 것을 아니까... 하지만 모두 잠든 고요한 밤이면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밤새 내린 비로 촉촉이 젖은 땅의 아침 등굣길, 바람은 전날과 달라졌다. 하늘을 덮어버린 구름은 차가운 기운을 품었고, 비와 눈으로 우리 가까이 겨울을 데리고 왔다.


하얀 눈과 흐린 하늘의 데칼코마니- 햇빛이 귀한 겨울의 모스크바


햇빛이 없는 겨울은 낯설었다. 어느 해 12월 한 달 동안 햇빛이 있던 시간이 8분 일정도로, 캄캄하고 칙칙한 러시아의 겨울이 시작됐다. 아침 7시에 눈을 떠도 밖은 캄캄했고, 오후 4시의 하굣길도 금세 어두워졌다. 여름의 하늘을 맑고 파랗게 칠했던 수채화 붓을 물통에 던져서 씻은 듯한 뿌옇고 탁한 잿빛의 하늘이었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
“나도. 머리가 너무 아파.”

한 반에 모인 이방인들은 대부분 불면에 시달렸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중앙난방 라디에이터로 자주 눈이 감겼고, 쉬는 시간이면 너 나할 것 없이 책상에 엎드렸다. 러시아어를 배우는 건 힘든 일이었다. 여름엔 햇빛에 눈이 부셔서, 겨울엔 햇빛이 없어서. 난생처음으로 ‘햇빛’ 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우울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수업시간에 끊임없이 ‘디프레시야(depress)’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리에게 러시아인 선생님은 말했다.

“여러분, 겨울에 비타민 D를 먹어야 해요. 그리고 차를 마시면서 초콜릿을 먹어요.”

약국에서 비타민D를 샀다. 하지만 깊고 깊은 디프레스의 늪에서 우리를 건진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방과 후 특별수업(?)’이었다. 베이징에서 온 친구 유라의 제안으로, 수업이 끝난 후 카페에 모여 함께 숙제를 하기로 했다. 집에 가면 책상이 아닌 침대로 쓰러지곤 했으니까, 함께 있으니 유용한 번역 어플 정보도 얻게 됐다. 어느 날은 우리 집에 모여 함께 ‘부대찌개’를 먹었다. 광저우에서 온 키코는 디저트를 만들었고, 숙제를 끝낸 후 유라는 가방에서 자연스레 ‘트럼프 카드’를 꺼냈다.


방과후 특별활동의 시작은 후다닥 30분 숙제 후 본격적인 트럼프 카드 게임-


“오늘 같이 하려고 가져온 거야?”
“아니, 항상 가방에 있지!”

오랜만에 ‘트럼프 카드’를 손에 쥔다. 생생한 기운이 우리를 감싼다. 베이징, 광저우, 대만, 미국, 한국에서 온 우리들. 글로벌 경기다. 우리의 공용어 ‘러시아어’로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지금 이 순간, 문법이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다. 눈빛으로 충분히 서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햇빛 없는 겨울밤은 유라의 현란한 트럼프 카드 손놀림과 함께 우리 곁에서 깊어가고 있었다.

커피로 짠- 모두 다른 곳에서 온 우리들의 자유 러시아어 회화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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