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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무사 Aug 30. 2021

웬디 셔먼과 미라클 작전, 그리고 남북 통신선 연결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은 왜 한국의 미라클 작전을 도왔을까.

아프간 협력자 390여명을 구출해온 미라클 작전에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번쩍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지난 7월말 그가 동아시아 순방길에 한국에 들렀을 때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그때 취재를 해놓고 미처 쓰지를 못해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였다. 


웬디 셔먼 부장관의 최종 방문지는 중국이었다. 그런데 중국 가기 전에 한국을 들른 것이 그의 외교관 인생에서 신의 한수나 된 셈이다. 그리고 그때의 일이 돌고 돌아 이번에 미라클 작전의 대 성공으로 돌아온 게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세상 이치가 참 오묘하다. 


한국 정부는 이번에 작전이 성공하는데 웬디 셔먼 부장관이 단초를 열어줬고 그 뒤로도 현지 미군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밝혔다. 남의 도움을 받았으면 받은 대로 사례를 할 줄 아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지금 여러 가지로 궁지에 빠진 바이든 정부나 미군에게는 자신들이 실패만 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도움으로 중요한 성공 사례가 만들어졌다고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주 <시사IN>에 기고한 글에서 웬디 셔먼 관련 부분을 좀더 보완해봤다. 지난 주 기사는 미라클 작전과 웬디 셔먼-서울에서 열린 미러 북핵대표 회담과 러시아 카드의 재등장-아프간 철수에서 드러난 미군의 전 지구적 재편(Global Posture Review)과 한반도 정세에의 함의 등을 키워드로 하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다. 특히 마지막 부분 GPR과 관련한 내용은 바이든 정부의 무리 하다싶은 아프간에서의 미군 철수를 계기로 부각됐는데 소위 보수적 시각의 안보전문가들이 이 개념을 활용해 한국 정부가 미국 말 잘 듣지 않으면 미국이 주한미군도 언제든 철군 내지 분산배치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중이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에 이어 이번 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GPR의 추진 과정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이들의 주장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미 관계가 이들의 주장대로 삐걱거린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뿐 더러 미국이 주한미군의 유연성이나 분산배치 문제를 한국 정부의 태도나 한국 정부와의 관계를 가지고 결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판단 기준은 한반도 정세의 안정 여부이다. 남북관계나 북미 관계 개선에 따라 한반도의 분란의 소지가 줄어들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이 점은 바이든 정부가 예상과 달리 북한과의 관계에 왜 저렇게 진심인지, 중국은 왜 자꾸 어깃장을 놓는지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우선 이번 글에서는 웬디 셔먼 이야기를 먼저 하고 그 다음 미러회담과 러시아 카드에 대해, 그리고 그 다음 GPR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더 보완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전체 글을 한번에 보시고 싶은 분은 오늘부터 발매되는 <시사IN>을 구독해주시길 바랍니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과 미라클 작전, 그리고 남북통신선 연결 


한국행을 희망한 아프간인 협력자 390명(391명에서 1명은 신원 이상자로 판명돼 돌려보냈다고 함)을 전원 구출할 수 있었던 ‘미라클 작전’에서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협력자를 데려오는 정부의 이송계획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정부가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이송계획을 준비한 것은 8월 초. 그러나 탈레반의 카불 함락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뤄진 8월15일 그동안 세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프간 민간공항이 폐쇄돼 당초 구상했던 외국 민간 전세기 이용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국방부는 주한미군 등과 협력해 군수송기 투입을 급히 결정했다. 


최대 난관은 카불 공항 밖에 있는 아프간인 협력자들이 탈레반의 감시와 몰려든 인파를 뚫고 카불 공항에 입성하는 것.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을 점령해 시민들을 검열 중이었고 카불 공항 입구에도 1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수송기까지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등도 자국민과 협력자 이송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몇몇 국가가 미국에 호송차량(convoy)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불가하다고 했다. 


독일 정부는 지난 17일 수천 명을 공수할 계획으로 항공기를 보냈지만, 혼란 상태에서 겨우 7명만 탑승한 채 출발하기도 했다. 벨기에는 군용기에 한 명도 태우지 못했다고 한다. 아프간 사태를 논의하는 20여 개국 외교차관 회의에서 이런 상황을 공유받은 외교부 고위당국자로서는 “낙담을 넘어 황당한 상황”이었다.


  이때 해결책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었다.  지난 22일 열린 20여 개국 외교차관 회의에서 그는 미국이 거래하는 아프간 버스회사의 도움을 받는 모델을 제시했다. 


즉 미국이 거래하는 아프간 버스회사에 협력자들을 태운 뒤 버스가 미군과 탈레반이 함께 지키는 검문소를 통과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23일 하루 만에 아프간 버스 회사와 협력해 아프간 조력자들을 태울 버스 6대를 확보했다. 집결지 2군데를 정해 아프간 조력자들을 태웠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무사히 우리 군 수송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도 현지 미군의 매우 ‘특별한’ 협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의 한국인 조력자를 안전하게 데려오는 ‘미라클 작전’의 특수임무단장을 맡은 이경구 국방부 국방정책차장은 29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미측 협조가 없었으면 이번 작전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일단 미군들이 한국군 장성에 대해 예의를 갖췄다. 또 현지 조력자들을 태운 버스가 탈레반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을 때, 미군 대대장이 직접 탈레반 측에 가서 “한국 조력자들을 보내주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공항 출입을 통제하는 다국적협력센터(MNCC)에서도 한국 조력자들이 들어오는 시간을 알려주면 그대로 승인을 해줬다고 이 차장은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몰랐는데 다른 국가에선 협조가 제대로 안 돼 작전 수행에 차질이 빚어졌던 것 같다. 제3국군에서 ‘너네(한국)는 어떻게 협조를 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현지 여성들과 아이들에 대한 검문 검색을 할 때는 미군 여군의 도움을, 공항서 활주로까지 약 2㎞ 거리를 이동할 때는 버스, 트럭 등 차량 지원을 받았다. 공항 옥상의 미군 저격수(스나이퍼)들은 우리 조력자들이 이동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해 미군 대대장, 중대장 통해 알려줬다고 한다. 카불공항을 통제하는 미 중부사령부도 우리 측 비행 승인 신청을 모두 받아줘 정시에 이착륙을 할 수 있었다. 이 차장은 “아무리 철수를 시키려고 해도 미측이 비행 승인을 안 해주면 못 들어가는 상황이었다”면서 “우리 측 상황이 자꾸 바뀌어 비행 계획서를 계속 변경해서 냈는데도 융통성 있게 받아줬다”고 했다.”(<서울신문>

 8월29일자. 김헌주 기자. “아프간서 확인된 한미공조..미라클 작전단장 "제3국군이 어떻게 협조했냐고 묻더라”” )


  카불 공항까지 버스를 이용해 아프간 현지인들을 수송하는 아이디어는 다른 나라들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몇 국가가 미국에 호송차량(convoy)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불가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 다음날 즉시 6대의 버스를 구할 수 있었다. 또한 이경구 국방부 국방정책차장의 얘기에서도 드러났듯이 한국은 공항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다른 제3국들과 달리 현지 미군으로부터 예외적으로 편의를 제공 받았다.


물론 이 전체 과정에서 웬디 셔먼 부장관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버스 수송 아이디어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버스 수배나 수송 과정에서의 미군의 편의 제공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현직 미 국무부 부장관이라는 신분을 놓고 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웬디 셔먼이 한국에 특별했던 이유

웬디 셔먼은 왜 한국에 대해 특별했을까. 지난 7월 중순 그의 동북아 순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지난 7월18일부터 26일까지 일본 한국 몽골 중국 순방에 나섰다. 동맹 강화와 북한의 대화 복귀 촉구 등이 겉으로 드러난 순방 목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 측과 모종의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른 일정은 다 순조로왓지만 중국 방문은 방문 일정을 잡는 일조차 순탄치 않았다. 지난 번 페북 글에서 관련 대목을 인용하면 다름과 같다. “의전 문제에서부터 중국 측의 홀대를 겪어야 했다. 미국 측이 웬디 셔먼 부장관의 파트너로 원했던 인물은 중국 외교부 서열 2위인 러위청 수석 부부장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보다 급이 한참 낮은 서열 5위 셰펑 부부장을 파트너로 내세웠다. 중국이 셰펑 부부장을 고집한 것은 그가 미국 담당이었던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국측이 회담 상대는 셰펑으로 하되 왕이 외교부장이 만나주겠다(회견)는 수정 제의를 했고 미국이 이를 '왕이 외교부장 등을 만나기로 했다'는 식으로 두루뭉실하게 발표함으로서 7월18일 첫 순방지인 일본에서 겨우 중국 방문 일정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중국 측이 회담 장소로 잡아놓은 곳은 북경이 아니라 천진이었다. 지난 3월18일의 미중 고위급 회담 당시 미국 측이 알래스카를 회담 장소로 잡았던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조선 시대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고위급 사신은 북경으로 가고 급이 낮은 사신은 천진에 머물게 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미국 국무부 2인자가 졸지에 급 낮은 사신 취급을 당한 것이다.”


미중 관계가 최악인데다, 그것도 중국에게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러 가는 길이었으니 가시밭 길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3월`18일 알래스카에서 블링컨 국무장관에게 당한 설움을 톡톡히 갚아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으니 직업 외교관으로 수모를 겪을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었다. 바로 북한 때문이었다. 바이든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2월 중순부터 여러 루트로 북한 측에 만나자고 연락했으나 북측은 요지부동이었다. 오죽했으면 미국 스스로 ‘제1의 추격하는 도전’, 즉 사실상 ‘최대의 적’이라 규정한 중국에게 북한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할 생각까지 하게 됐을까. 바로 북한과의 대화 채널을 뚫는 일은   국무부의 2인자인 부장관이지만 사실상 한반도 문제를 담당하는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으니 피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가 오기만을 잔뜩 벼르는 중국의 회담 상대들에게 굳이 수모를 견디며 북한과의 관계 주선을 부탁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중국 방문에 앞서 들른 한국에서 그 문제가 해결돼 버렸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남북이 연락통신선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미국 내에서도 정보기관이 추진한 일이 국무부에 알려지는 데는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 얘기를 듣게 된 것은 7월22일 청와대 방문 때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에게 직접 얘기를 해줬다고 한다. 원래는 대통령 면담 계획이 없었는데 남북이 통신선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그를 부른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는 7월22일 그가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을 때 “한국에 오랫만에 오니 제2의 고향에 온 느낌”이라며 “한국은 미국의 본격적인 파트너이자 진정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외교가에서 ‘백발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특유의 집념과 야심이 있는 냉철한 외교관’으로 정평이 난 그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뭔가 튀는 듯한 커멘트였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전후 맥락은 분명치 않지만 중국 방문에서 당할 수모로  짓눌려 있던 상태에서 남북이 이미 통신선을 복원하기로 합의해 중국에게 아쉬운 얘기 할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로부터 격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이 가능한 대목이다.


참고로 지난 2018년 그가 출간한 회고록 제목이 〈약한 사람은 사절(Not for the Faint of Heart)〉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강인함을 추구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위안부 문제를 두고 한ㆍ일 갈등이 심화하자 “민족 감정은 악용될 수 있으며, 정치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으며 (국내) 지지를 얻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런 도발은 곧 (외교) 마비를 초래한다”며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을 저격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이 발언으로 그가 일본 쪽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고 본인 스스로도 그것을 의식해 그뒤 해명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형성된 강성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다른 이유가 더 있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 이유를 찾으라면 바로 한국 방문 당시 문 대통령이 베푼 친절에 대한 보답이라는 점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스케쥴 상 대통령이 굳이 안 만나도 됐지만 중국에 아쉬운 소리를 하러 가는 그를 배려해 바쁜 일정 중 30여분의 시간을 내 남북간 진행 사실을 귀뜸해준 것은  그에게는 벼락같은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물의 효과는 실제로 그의 방중 과정에서 그대로 발휘됐다. 7월26일 천진에서의 미중 회담은 중국이 별렀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웬디 셔먼이 저자세로 북한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할 걸로 예상하고 중국 측이 대응 시나리오를 짰는데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중국에게 저자세이기는커녕 방중 준비 과정에서 당했던 수모까지 전부 돌려줬다고 한다. 알래스카 회담에서의 블링컨 국무장관 보다 더욱 거세게 중국이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잘못한 것 10여가지를 거론하며 몰아부쳐 중국 측의 혼을 쏙 빼놓은 것이다. 오죽했으면 7월26일 저녁 중국 외교부가 셔먼 부장관의 발언 내용은 쏙 빼고 미중관계가 악화된 원인을 “미국 일부 인사가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셰펑 부부장의 발언만 공개했다. 예상치 못한 셔먼 부장관의 공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방향을 못잡은 것이다.

7월27일자 VOA(미국의 소리방송) 기사는 당시 회담의 분위기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VOA는 “25일 밤늦게 중국에 도착한 셔먼 부장관은 26일 오전 셰펑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 회담했으며 오후에는 왕이 외교 부장과 만났습니다”라고 전하면서 “다만 북한 문제가 양국의 회동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했다. 그 대신 미 국무부가 공개한 보도자료를 인용하면서 “두 나라는 홍콩과 신장 지역, 억류된 미국과 캐나다인 문제, 기후위기 등과 더불어 이란, 아프가니스탄, 미얀마(버마) 등 여러 역내 사안들과 함께 북한을 다뤘습니다”라고 했다. 즉 북미 대화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하려고 갔다가 그럴 필요가 없어져 평소 벼르고 별렀던 얘기를 실컷 하고 온 것이다.


셔먼과 회담할 당시 중국 측은 북한으로부터 남북 통신선 복원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을 통보받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왜 셔먼이 저자세가 아니라 고자세인지 영문도 모르고 당했다. 북한이 중국 측에 관련 사실을 통보한 것은 7월26일 저녁 셔먼이 돌아간 뒤였다. 형식상으로는 그 다음날 있었던 남북연락통신선 발표 하루 전에 알려준 셈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뒤통수를 친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중국이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웬디 셔먼 부장관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국의 도움으로 외교관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한국이 베푼 친절이 돌고 돌아 ‘미라클’이 돼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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