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카페 마당 한 단 위의 풀밭 한 군데에 어디서 구해 빨간색의 공중전화 부스를 놓던가, 마당 가 어디쯤 위쪽 반절은 빨간색, 아래는 초록색으로 칠해진 옛날 우체통―재현품이라도―을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엄청난 돈이 들어갈 일이었다.
대개의 승마장이 월요일에 쉬기 때문에 언제인가는 다시 말을 탈 요량으로 나는 두 번째 달이 되자 화요일마다 쉬기로 했던 것이다. 카페를 쉬는 날, 나는 승마장에 매여있을 때 같은, 다음날의 노동에 대한 근심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일부러 나는 승마장으로 출근한다는 심정으로 카페로 왔다. 죄지은 것도 없이 아침 7시 반이면 집을 나서야 했던 노예의 삶. 아니다. 돈이 없는 것이 죄였다.
“백 교관은 나하고 다른 것 같아. 나는 그날그날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설레서 새벽같이 눈이 뜨이는데. 너는 안 그래?”
그 승마장 대표는 단 하루도 쉰 적이 없고, 아침 6시 전에는 무조건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날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움직이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불안장애일 수 있다. 또, 그는 사업 때문에 하루에 저녁밥을 세 번씩 먹은 적도 여러 번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녁을 세 차례나 먹으면서까지 살아야 하는가. 그런 사람들은 진짜로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기분’을 느껴보려는 것뿐이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것이 불안하니까.
“까만 안경 벗어! 애들이 무섭다고 그러잖아.”
모래 먼지도 막을 겸 교관들이 대개 쓰는 선글라스 때문에 그는 40 후반 나이의 나에게 그렇게 소리 질렀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만년 아마추어이면서도 나를 교관 대접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많이 하면 마방 여덟 개가량 치웠을 아침 8시 50분쯤까지도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이 나이에 자고 났을 때의 등허리 저림과 다리 쑤심을 느긋하게 감각하면서 자리를 보전한 채 누워 있을 수가 있었다. 승마장보다 카페의 환경이 훨씬 나았다. 10시 20분쯤 카페에 도착하노라면 마당 전체가 낙엽 카펫이 깔려있고, 보랏빛을 머금은 광선들은 수풀 사이사이를 뚫고 내리는 것이었다. 열악하기만 한 그 승마장. 그때 나는 얼마나 고되었던가.
삵처럼 멋지게 생긴 그 야생 고양이처럼 나는 바깥에서 먹었다. 냄새 때문에 매장 안에서 찌개를 데우거나 라면을 끓일 수 없는 노릇이어서 바람이 막히는 본채와 화장실 건물의 틈새에서 취사했다.
숲속의 깊은 가을은 적막했다. 한 날은 아직 남아있던 귤 빛깔의 낙엽들이 비에 젖으면서 무겁게 떨어졌다. 그날 나는 온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이 카페가 아랫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여기에 카페가 있는 줄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자면 곤란한 증상이 몇 가지 생겼다. 특히 동격의 단어들이 반점들로 열거될 시는 영 머릿속으로 들어 오지를 않아, 몇 번씩 다시 읽느라 애를 먹는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책을 읽으면서
쓸쓸한 풍경을 바라보며, 이 폭우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여자의 일생Une Vie》
라든 지
기후나 풍토가 어떻든지, 인간의 신체 조직은 낮 동안의 휴식을 필요로 한다. 우리 눈의 빛깔처럼, 그것은 우리의 유전 형질에 이미 깃들여 있을 것이다. ― 피에르 쌍소Sansot, Pierre 외, 《게으름의 즐거움Petits Plaisirs de la Paresse》
또는
현재의 책들은 질이 떨어지는 만큼 양은 초과해 있다.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 and Other Essays》
와 같은 그때그때의 문장에 밑줄을 치게 되면 옆에 얼마큼 쌓아둔 테이크 아웃 컵용 무지(無地) 홀더에 이런 식으로 옮겨 쓰는 작업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도 그런 하루씩은 금방 저물어 또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 되는 것이었다. 차의 기름이 바닥난 날은 카운터 테이블 거스름돈 금고의 동전들을 세어서 큰 도로까지 걸어나가 시내버스를 탔다.
“여기 시 관내에 카페가 몇 개나 되는 거 같으세요? 내가 전부 파악해 보니 삼백 칠 십몇 개인 거예요. 삼백 칠 십몇 개! 상상이나 가요?”
관내 카페 운영 현황에 대한 무슨 보고서를 어디다 내려고 작성 중이라는 60대의 사내였다.
“계산상으로 카페 한 군데당 하루 매출이 삼십만 원씩은 나와야 운영이 되게 되어있어요. 그러려면 백 잔 이상을 팔아야 하는데, 그런 데가 거의 없어요. 사장님은 잘 되시죠?”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도 지인이 엄청 많나 봐요? 이런 산속에다 차리시고.”
나는 그렇지도 않다고 했다. 아니, 간판을 떼라지를 않나, 마당 복판의 느티나무를 자르라지를 않나, 마당에 깔린 쇄석에 여자 이용객들의 하이힐 뒷굽이 까진다고 차 대는 데서부터 매장 앞 편 돌계단 아래까지 화물차 짐칸에 쓰는 검정 고무판을 깔라지를 않나, 내가 무엇을 하든 왜 이렇게 간섭하는 인간들이 많단 말인가.
관내에 카페가 기백 몇십 개든 아니든, 장사들이 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 누가 카페를 하라고 했는가. 다 자기들이 선택한 것이다. 누가 억지로 등 떠밀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닌데도 잘 안되면 다른 대상을 탓하는 사람이 많다. 국가가 하라고 시켰나. 사회가 그러라고 시켰나.
나도 마찬가지다. 안 되면 망하기밖에 더하는가. 망해보았자 몇 개 내 서재로 돌아갈 것들은 돌아가고 나머지는 버리면 그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느냐. 조금 오래되면 ‘100년 된 가게’라고 표찰을 붙여준다. 설사 100년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 때문에 중요한가.
그 사내는 자기도 곧 관내 변두리 어디쯤에 어떤 식으로 카페나 해 볼 구상이라면서 갔다. 나는 그 후에 그가 카페를 차렸는지 말았는지 알아보지 않았다.
나는 인생을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곳에서 하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벌써 오십 하나라는 내 나이가 나는 와닿지 않았다. 돈은 무서운 것이었다. 어느새 나는 겁 많은 인생이 되어버렸다.
얼마 뒤, 내 아들이 남에게 이유 없이 두드려 맞았다. 편의점에서 밤샘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일이었다. 아들은 CCTV 아래서 만취한 이용객에게 이십여 분을 계속 맞으며―물론 잘 막아내면서―경찰관을 기다렸다. 며칠간이나 경찰서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고 했다. 나는 자식을 병원에 데려가 7만 원 넘게 들여서 상해 진단서부터 끊어야 했다. 고소를 하고 2주가 넘었는데도 역시 경찰서에서는 내 자식에게 연락해오지 않았다. 나는 아예 대한민국 경찰청 민원 콜센터와 통화했다. 즉각, 아들은 피해자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 편의점 카운터 테이블에 드러누워서 내 자식의 뺨을 계속 갈겨댄 녀석은 편모슬하의 대학생으로 역시 다른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터였다. 꼭, 없는 놈들 사이에 돈 나가야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세상도 나를 언제 그냥 봐 주고 넘어간 적이 있었던가. 나는 돈을 받았다.
유자차와 자몽차를 뜨거운 물에 풀어주니 미지근하다고 해서 집에서 쓰고 있는 전자레인지를 가져다 놓은 터였다. 나는 예전에 몇 푼이 궁했을 때―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지금껏이다―안 쓰는 물건을 몇 개 판 적이 있는 한 ‘알뜰매장’에서 자식 맷값으로 제일 먼저 중고 전자레인지를 샀다. 5만 원이었다. 물론, 맞은 자식에게 일부 떼어주었다.
어느 날 종일 싸늘하게 비가 내렸는데, 나는 매장 출입문 안쪽에 붙여 골판지상자를 펴 놓았었다. 그날 일행 여덟 명이 한꺼번에 들어왔고 젖은 골판지 조각이 미끄러져 이리저리 돌아다니는데, 나는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아니다 싶었었다.
인터넷에서 보아두었던 미국산 매트는 상당히 비쌌다. 그 매트며, 카페라테 잔 네 조, 뜰에 놓은 야외 테이블―이전에 아내가 신용카드로 지불했다―에 꽂을 파라솔 두 개 외에도 나는 돈을 요모조모 많이 썼다. 나는 지금도 보라색 파라솔을 볼 때면 내 아들 생각을 하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