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처음에 아내의 오촌 조카 카페에서 사 마셨던 아메리카노는 쓴맛만 나서 탐탁지 않았다. 강릉의 그 바닷가를 다녀온 뒤 에스프레소 머신 사용법과 음료 메뉴 레시피 등을 배우려고 그 후배 처의 카페를 들렀다. 나는 에스프레소 머신과 원두 그라인더 작동법을 5분 정도 배워서 직접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컵 만들어 마셔보니 얼추 강릉의 그 집 커피와 풍미가 비슷했다. 골치를 썩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후배 처가 시키는 원두를 쓰기로 했다.
나는 이제 커피 파는 일도 하게 된 것이었다. 한 친구가 그리 멀지 않은, 자기가 가 본 어떤 카페 이야기를 했다. 나같이 외진 숲속에 있는데 돈가스도 같이 팔아서 사람들이 엄청 많다며 나더러 돈가스도 하면 더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 고기 다지고 숙성시키고―조리법과 순서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관심 없었다―빵가루 묻혀서 튀기고 있느냐. 돈가스는 얼어 죽을!
예전 1톤 냉동 탑차 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날도 나는 철로 상공을 둥그렇게 넘는 구름다리를 내려가 언제나처럼 ‘커피 타임’을 챙기기 위해 한 편의점 앞에 트럭을 받쳐놓았다. 차가운 캔커피를 하나 사 들고나오면서 나는 건너온 그 구름다리를 무심코 돌아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세상이 텅 빈 것 같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햇볕은 선선했다. 구름다리의 내리막길 양쪽 가의 가로수 잎사귀들이 따로 천천히 한들거렸다. 가을 냄새 같은 것을 머금은 오른편의 강바람이 그의 얼굴 살갗을 나른하게 쓸면서 갔다. 그 길에 일체 그를 뒤쫓아 오는 차들은 없었다. 고즈넉한 풍경 속에 그는 홀로 서 있었다. 마치 꿈에 나온 어린 시절의 옛 고향과 같은, 고교 때 등교하지 않았던 어느 날처럼 이상스레 한적하고 아련한 여름 한가운데에. 아늑하고 호젓한, 텅 뚫린 공간 속에서 그는 천천히 한 모금씩 커피를 삼켰다. 트럭의 비상 깜빡이가 꽁무니에 매달려 하릴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껏 앞길만 보고 달렸었다. 이렇게 몸뚱이로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은 처음인 듯했다. 텅 빈 그 길은 평화로웠다. 평화롭고 고즈넉하게 그리 살아야 하는 것인데 어쩌지 못하고 이리 살아온 자신을 그는 흡사 남한테 그러는 듯 생경스럽게 훑어보았다.
내가 지난 어느 한 날 편의점 캔 커피로 커피 타임을 가지다가 그 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듯이, 이제부터는 이용객들이 이 카페에서 한 잔의 커피와 더불어 그러한 평화로움과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게 하겠다는 내 마음을 나타내는 내 그 중편 속의 문단이었다. 나는 이 글을 예전부터의 그 간판 집에서 알맞은 크기로 흰 시트지에다 실사 출력을 해 와서 액자 속에 붙였다. 액자는 내 집 근방의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주워놓았었다고 전에 말한 바 있다. 본가 광에 재봉틀 다리만 있던 것을 찾아내어 상판으로 송판 두 쪽을 붙여 만든 셀프 테이블 위쪽에 그 글 액자를 걸어놓았다.
마침내 무엇인가 할 만한 일을 발견한 사람은 그 일을 위해서 새 옷을 장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다락에서 먼지가 뿌옇게 쌓인 채로 있던 헌 옷을 꺼내 입어도 될 것이다. 헌 신발은 영웅이 신으면 그의 하인이(만약 영웅에게 하인이 있다면) 신을 때보다 더 오래갈 것이다. 맨발은 신발보다 더 오래된 것인 데다 영웅은 맨발로도 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만찬회나 입법기관에 드나드는 사람들만은 사람 자체가 수시로 달라지므로 그때마다 새 외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상의와 바지, 모자와 신발이 그 차림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기에 손색이 없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기의 헌 옷, 헌 외투가 너무 낡아서 원래의 구성 재료로 되돌아가는 것을 실제로 본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그 외투를 불쌍한 아이에게 주는 것이(그 불쌍한 아이는 나중에 그것을 자기보다 더 불쌍한 아이, 아니 가진 것이 거의 없이도 지낼 수 있으니 실은 더 부유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아이에게 줄 예정이겠지만) 결코 자비로운 행동이 되지 못할 정도의 외투 말이다. 옷을 새롭게 입는 사람보다는 새 옷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업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싶다. 새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몸에 맞는 새 옷이 만들어질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어떤 사업을 하려고 한다면 헌 옷을 입고 하도록 하라. ―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월든, 숲속의 생활Walden, or Life in the Woods》
영웅은 맨발로도 다닐 수 있다. 어떤 사업을 하려고 한다면 헌 옷을 입고 하도록 하라! 나는 최대한 그런 말대로 할 생각이었었고, 돈 없이, 어디서 돈을 빌리지 않고 헌 테이블들과 헌 의자들, 헌 책장과 내 책이 아니니 없어도 그만인 헌 책들, 헌 소품들로 매장을 이제껏 꾸며놓았으며 또, 앞으로도 입던 헌 옷을 입고 카페를 일구어 내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문학적인 카페라는 차별성을 내려고 각종 스프링 수첩과 중성 펜 같은 것들을 내가 골라 카운터 테이블 한쪽에 올려놓고 함께 팔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그만두었다. 다 인터넷으로 시킬 것들이라 뻔해서 그 이상을 받을 수 없으니 수입에 전연 도움이 안 될 터였다. 카페를 만든다고 목공일을 꽤 하다가 보니 자투리 각재들로 북엔드 따위의 기획 상품, 이른바 굿즈라는 것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좋다. 그런데 잘 팔리면? 나는 계속 그것들을 만들어야 하나? 커피를 팔면서 남는 시간에는 굿즈를 만들고 있으면 내 시간이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까지 무엇하러 들어왔나? 승마장은 왜 때려치우고 나왔었나? 돈은 벌어야 하나 나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
돈을 들여야 하는 사업은 하지 말라. 그것이 성공할 확률은 대충 십만 분의 일이다. 그러기에 매번 돈만 날리게 된다. 십만 명, 백만 명, 천만 명, 몇 천만 명이 이 나라에서 사업하여 성공하려고 발버둥을 치며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그 무한 경쟁에서 영 점 몇몇몇 퍼센트의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질이며 능력이 충분한가. 아니, 충분만 하여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있으려면 압도적이어야 한다. 다시 묻는다. 압도적인가?
돈을 꾸지 마라. 곧바로 어마어마한 고통으로 돌아온다. 자살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가진 것을 지켜라. 그것을 가지기 위해 여태껏 고통스럽게 살아오지 않았나. 그것을 던지고 다시 맨 처음의 고통으로 되돌아가는 어리석은 삶을 왜 굳이 살려고 하는가.
시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제일 부자다. 돈을 많이 벌고 있으면 뭘 하나. 그것을 쓸 시간이 없는데. 인생은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다 버리고 난 뒤에 인생이란 어디 있는가.
나는 처음에 카페 만들기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느라고 진입로를 걸어 내려갈 때 다람쥐 한 마리가 나라는 존재가 궁금했는지 석축 돌들 틈새의 제 통로로 흘깃거리며 끝까지 쪼르르 쫓아 내려왔는데 올라올 때도 마찬가지로 그러는 것이었다.
“어이, 람쥐! 이름이 뭐니? 람세스라고 해 줄까?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러나 나는 얼마 뒤에는 어느 녀석이 람세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람쥐들은 여기저기에서 출몰했다. 그들은 여기의 새들과 마찬가지로 여태까지 이 산속에서 조용한 평화를 누리고 있던 것이었다.
“여……! 너, 멋지게 생겼는데? 어디 가니?”
내가 그와 처음 마주친 것은 어느 날 매장 앞마당에서였다. 윤이 이는 짙은 회색 바탕에 검은 세로줄 무늬의, 삵처럼 생긴 고양이가 앞산에서 내려와 당당한 몸짓과 걸음걸이로, 나를 무시하면서―나는 객에 지나지 않는다는 태도 같았다―마당을 천천히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옆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후로 그 삵같이 멋지게 생기고 자존심 센 고양이를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산속에서 그가 홀로 무엇을 먹고 사는지가 궁금했다.
그렇다. 자연이 있었다! 새들이며 사람을 겁내지 않는 다람쥐, 멋진 야생 고양이. 이런 곳은 없다. 이 지역 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한 번씩 가서 사진이나 찍으면 다시 오지 않을 곳으로 만들지는 않겠다. 나는 확신을 했다. 그러나 예사롭지 않았었고, 옹골차게 보였던 그 산 친구가 얼마 뒤에는 그런 비극적 종말을 맞을지 그때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쪼들릴 대로 쪼들려서 더 늦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시작은 해야 했다. 내 집 근방에 있던 그 ‘카페 빈’은 벌써 망했고 ‘거기로’라고 이름만 이상하게 바꾼 개인 카페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낯익던 옛 ‘카페 빈’에 이것저것 눈여겨보려 찾았는데 인테리어며 테이블, 의자, 집기 등등 ‘카페 빈’ 것들 고스란히 그대로였다.
아무리 팔아봐야 인테리어 비용을 메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문한 커피도 예전처럼 내어 주었는데, 갈색 플라스틱 쟁반에 여전히 냅킨을 한 장 받치고 그 유명 커피 과자 두 개를 곁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방식이 섭섭하지가 않아 똑같이 하기로 했다.
나는 큰 주방용품점에서 옛 ‘카페 빈’ 것과 같은 갈색 플라스틱 쟁반부터 네 개 샀다. 모양이며 색깔도 제각각이지만 용량은 대개 비슷한 잘 안 쓰는 머그잔 몇 개와 찻잔 세트도 두세 조 집에 있는 터였다. 일단 그렇게 시작하면 되었다.
그 간판 집에서 작은 현수막 두 장, 큰 개업 현수막 한 장을 맞추었다. 카운터 테이블 뒷벽 위쪽에 박아 둔 메뉴판이라 할 것은 내 옛 사업장에서 게시판으로 썼던, 시내 어디서 만들었던 철판이었다. 작은 현수막 한 장은 커피 메뉴들, 다른 한 장은 논―커피 메뉴들로 문구점에서 칠판 자석을 열몇 개 사다가 붙여 놓으면 나중에 다시 갈기도 간단할 것이었다.
진입로 아래에 걸 개업 현수막은 이미 날짜까지 박았으니 이제 이틀 뒤면 아침 일찍 내다 걸고 이용객을 맞아야 하는데, 여태껏 카페 만들기는 장난처럼 어떤 재미가 있었지만, 혹시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 어찌해야 할지, 메뉴들을 만들 선후가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등등 세세한 부분들을 정작 그동안은 거의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이었다. 일이 코앞에 닥치고 나니 나는 적잖이 난감했다.
개업 당일 일찍이라도 경험자가 한 번 와서 한두 시간 옆에 있어 준다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눈곱만하게 카페라고 하고 있는, 아내의 그 오촌 조카에게 전화로 부탁해 보았다.
“그러면 자네 어떻게 삼십 분 만이라도 안 되겠나?”
그는 오기가 어렵다고 했다. 처조카고 자시고 필요 없었다. 에이! 빌어먹을 놈. 병신같이 생겨서는.
이제 하루만 남았다. 그 후배의 처라면 와 줄 줄로 알았다. 못 간다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저희들과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며, 그깟 5분 배우자고 커피 팔아준 게 또 얼마인데 싹수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역시 인생은 외로운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가족과 양친, 그리고 그 싹수없는 둘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산속에서 카페를 개업했다. 현수막을 내걸기만 하면 골프장 다니는 이들이 막 밀어닥칠 줄로 알았다. 다음날은 토요일, 그다음은 일요일이었는데도 그렇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에 카페로 올 때 보니 현수막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렵게,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헛돈만 써버렸다. 길가의 전봇대에 매었다고 어떤 빌어먹을 자식들이 떼어 가버린 것이었다.
아메리카노 가격을 ‘에이허브’보다 조금 낮게 잡았고, 같은 음료 값을 뜨겁거나 얼음이 들어가거나 동일하게 했다. 다른 집들이 제일 재수 없는 점은 얼음을 넣으면 500 원씩 더 비싸다는 것이다. 아니, 제빙기에 있는 얼음 그냥 주면 되고, 뜨거운 물은 에너지가 안 드는가.
어떠할까 보려고 그달은 끝까지 쉬는 날 없이 하기로 했다. 그 주중에는 하루에 커피 한잔 아니면 두 잔을 팔았고 공친 날도 있었다. 즉, 한 명도 오지 않았는데 그다음 날 투실투실한 20대쯤의 여자가 차를 세워놓고 들어왔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대학원생으로 집에 카페를 하나 차려달랄까 어쩔까 하고 있다며 설을 풀었다.
“더치커피 되나요?"
그녀는 실수하기 시작했다.
“더치커피가 뭔가요?”
물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엄연히 메뉴판에 없지를 않은가. 대학원생이라는, 제 마음대로 생겨 먹은 뚱땡이가 이죽거렸다.
“커피를 안 배우셨나 봐요?”
그러한 애는 두 번 다시 안 올 것이므로 내가 되물었다.
“꼭 배워야 하나요?”
그 뒤룩뒤룩하고 시건방진 여자애가 이번에는 강릉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는 모 씨에 대해서 지껄이는 것이었다. 꼬박꼬박 '그 선생님은', '그 선생님이' 해 가면서.
나도 그쪽 어디에서 대가 입네 하고 있는 그 늙은이를 들어 본 적은 있었다. 그런데 커피 조금 잘 내린다는 것이 무엇이 대단하다는 말인가. 커피 내리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존재 목적일까?
그 뚱뚱한 여자애의 전반적인 태도에서, 자기가 곧 차릴 수도 있는데 아무리 산속이라도 그렇지 왜 카페를 차려 놓았느냐, 하는 감을 나는 받았다. 인성 안 좋은 그 여대학원생은 자몽차로 시켜 먹고 갔다.
자신의 운명에 너무 생생한 관심을 나타내지 않기 위하여 마지막 날까지 자수 방석이나 짜고 있는 이 나라의 부인네들을 생각해 보라! 마치 영원을 해치지 않고도 시간을 죽일 수 있다는 태도가 아닌가?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숲속의 생활》
주말 같은 때에 셀프세차장에 가 보면 알 것이다. 얼마큼의 이들이 자기 삶을 허비하고 있는지를. 이를테면, 어차피 혼자 타고 다니면서 쓸데없이 크기만 한 7인승이나 9인승짜리 미니밴 따위로부터 온갖 잡다한 물건들을 죄다 끄집어내어 바깥에 늘어놓고서 두세 시간을 제 방인 양 털고 쓸고 불고 빨고 닦는다. 그렇게 해 놓은 다음에는 신발로 어찌 그 차에 다시 오를 것인가. 왜 짧은 휴일을 버리지 못해서 그토록 애쓰는 것일까. 그네들은 왜 짧은 인생을 그렇게 버리고 있는 것일까. 무슨 증강현실 게임을 하겠다고 속초까지 몰려가서 장사진을 치며 앉아있고, 국내에 처음 들어온 이상한 이름의 버거를 처먹으려고 끝없이 줄을 서는 모양을 보라.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