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갱생은 어려웠다. 사정이 심각했다. 2시간 16분짜리 나나 무스쿠리Nana Mouskouri만 콘솔 위 탁상용 액자 뒤에 숨어서 미약하게 앵앵거렸다. 그래도 매장에 음악은 깔아야 했기에, 그 한 손안에 들어가는 미니 블루투스 스피커는 초등학생 딸아이에게 빌린(?) 것이었다.
점심 도시락 먹기 전에 한 잔이라도 팔면 그날은 공치지 않은 것이 됨으로 일단 안심할 수 있었다. 이유는 몰랐으나 나한테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시내에서 큰 도로로 오다가 고속도로로 올라타기 전의 마지막 주유소가 있다. 두 동리 전인데, 항상 나는 그 앞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해서 굴다리 밑으로 가는 작은 길을 택해 카페로 왔다. 오른쪽의 철길과 나란히 달리면서 왼편에 연이은 무인모텔, 그러니까 쉽게 러브호텔―특히 외간 남녀 간의 사랑이란,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얼마나 문학적인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세 곳을 막 지나칠 때면 문득 그것이 있었다.
언뜻 끔찍한 그 길고 검은 유령 같은 형체는 높다란 전선에 목을 매어 달고 음향 없는 비명을 지르며 아무리 해도 끊기지 않는 목숨의 고통으로 흐느적거리는 것이었다. 원래 밭농사용 멀칭 비닐일 것인데 아마도 바람에 날렸다가 그같이 된 듯했다. 아무래도 무인모텔들의 사업, 그러니까 사랑 산업과 연관해서는 꽤 좋지 않을 텐데도 그 업주들은 걷어치울 생각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그 형상을 볼 때마다 어디서 읽었던 장면이 떠올랐으나, 내 서재에서 어렵사리 찾아내고 보니 역시 심훈의 소설이었다.
새로 한 시, 서울의 겨울밤은 깊었다. 달도 별도 없는 음침한 하늘 밑에 갈가리 찢어진 거리거리는 전신줄에 목을 매어다는 밤바람의 비명이 들릴 뿐. ― 심 훈, 《영원의 미소》
나로서는 그 모습을 여전하게 볼 수 있었으면 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이 얼마나 문학적인 연계인가―레마르크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 지점에서 조금 더 가면 좌로 굽어지는 길옆으로 함석지붕을 이고 흰 회벽의 큰 집이 한 채만 서 있다. 나는 그 집을 볼 때마다 그 길이 내가 4년째 쓰고 있는 소설 속의, 동해안 그 산골 마을로 가는 고갯길 같았다. 그 고갯길에도 비슷한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것이다.
달이 외롭게 비추는 구비 진 고갯길을 한쪽 어깨에 군용 더플 백처럼 생긴 무거운 짐을 메고 노래를 부르면서 터벅터벅 걸어 넘고 있다. 400cc 레이서 레플리카 같은 것은 어림도 없었다. 그 청년은 125cc 짜리 낡은 것에라도 뒷자리에 가방을 묶고 바람을 맞으며 올 수가 없었다. 물론 배기량이 적어서 쉬며, 쉬며 와야 하였겠지만. 이리저리 길을 잃게 되더라도 운명의 핸들을 본인이 쥐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정도의 모험과 낭만, 젊음이 그 앳된 청년에게는 부재하였다. 자신이 의지가 강했었더라면……. 그 동네로 가는 차는 벌써 끊어져 청년은 한참 못 미치는 동리에서 내려 여태껏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고갯길은 하얀 겨울로 가는 길이었다.
그 무인모텔 세 개는 내 카페에 보탬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되지 않을 듯했다. 모텔로 들어가기 전에, 또는 나와서 커피를 마시러 올 수 있는 것이었다. 내 카페는 그 무인모텔들처럼 가져온 차도 아랫길에서는 보이지 않을 테니 그것도 맞춤이었다.
비가 내린 다음이라 바람이 차갑고 거칠게 불던 날이었다. 흰색의 커다란 독일제 고급 승용차―전번에 그 돈 많은 내외가 타고 왔던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과 같은 제조사의 차로 가장 큰 세단이었다―가 뜰 바로 밑에 멎더니 체격이 크고 살집이 좋은 칠십 줄의 남자 한 사람이 들어와 앉았다.
“여기는 뭐 문학하는 사람들만 오라는 거야?”
조그만 간판의 카페 상호 때문인 듯했다. 내가 또래들만큼 늙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 장년 줄인데 단박에 반말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니, 카페 이름이 ‘문학인의 숲’이 아니고 ‘문학적인 숲’이 아닌가. 그리고 상호가 ‘문학적인 숲’이 아니라 아예 무슨 무슨 문학관이면 또 어쩌라고?
“커피숍 이름이 안 좋아. 사장인가? 간판 떼고 다른 이름으로 바꿔.”
내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소설가라 했는데도 그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커피 같은 거 말고 좋은 거 뭐 없나?”
어쨌든 나는 한 잔 팔 욕심에서 메뉴에 없는 보이차를 아메리카 가격으로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 부정형 현무암 판석 길을 깔아준 그 내외가 오면 대접하라고 부친이 한 덩어리 준 것인데, 1000원숍에서 5000 원짜리 볼품없는 티포트를 사 두어야 했다.
“괜찮네. 앞으로 난 이걸로 줘.”
그는 자기 마음대로였다.
"담배 피워도 되나?”
이 인간이 점점 더? 나는 물론 안 된다고 했다. 식당에 가서는 저러지 않을 게 아닌가. 시대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데, 아주 막 되어 먹은 늙은이였다. 식당에 가서도 저러나? 내가 번듯한 한옥 건물에 카페를 차려 놓은 것이 못마땅해서 시비를 거는 태도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사장! 손님도 없는데 거기 그러고 섰지 말고 와서 앉아 봐.”
싫었으나 이용객 한 명이라도 아쉬워서 나는 그의 앞에 가서 앉았다.
“바깥은 아직 정리가 다 안 끝난 것 같아 보여. 그런데 저건 뭐야? 저런 거 치워.”
그가 진열장 쪽을 흘기며 말했다.
“커피숍에 왜 저런 걸 갖다 놔?”
내 약사여래 상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오지 마라. 올 필요 없다. 이미 나는 이제 지쳐 있었다.
나는 그 늙은이가 끌고 온 차를 앞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면서 그러한 필요 없이 큰 승용차에 관하여 생각했다. 남들은 저런 큰 차를 왜 끌고 다니는 것일까. 내 차는 국산인 그랜드Grand 4세대 모델인데 일, 이 세대까지는 이름처럼 엄연히 대형 승용차였다. 그런데 더 큰 차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슬쩍 내 차 급을 ‘준대형’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격하시켜 놓은 것이었다. 내 전 차는 그 3세대 모델이었는데 자동차등록증에는 ‘대형 승용’으로 되어 있었고, 지금 차는 4세대로 역시 그렇게 적혀 있다―자동차 관리법에는 차종을 경형, 소형, 중형, 대형의 네 단계로 분류한다. 여기에는 준중형이나 준대형 같은 분류는 없다―. 아니, 내 차 정도만 해도 충분히 크고 편의 사양이 상당하건만 대체 얼마나 더 크고 비싼 차를 끌어야 하는가. 그런다고 나는 그것이 위세 있게 보이지도 않았고 발 작은 사람이 벗겨질 것 같은 너무 큰 신발을 끌고 다니는 듯했다.
자동차 업계가 원래의 ‘대형’을 언제부터 ‘준대형’으로 급을 낮추어 부르기 시작한 것이 과소비 조장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더 큰 차는 이제부터라도 그냥 ‘대형’이라 하지 말고, 예컨대 ‘특대형’으로 바꾸기를 제안한다.
나는 나중에 아무리 돈이 많게 되어도 필요 없이 크고 육중해 길바닥에 기름을 쏟아버리면서 다니는 특대형 승용차는 결코, 몰지 않으리라.
“여기는 골프 치고 커플들이 올 텐데 프라이버시를 응? 지켜 줘야 해. 자리마다 다 칸막이를 쳐. 그런 걸 파티션이라고 그래.”
어디 와서 고릿적 얘길 하고 있나. 그놈의 파티션이라니! 그는 무슨 현장을 맡아 서울에서 혼자 내려와 있다면서, 한 손의 새끼손가락만 하나 세워 들고 다시 말했다.
“다음엔 요거랑 같이 올게.”
그 늙은이가 자기 차 문을 열었다. 저 나이에 이르기까지 어찌 저렇게 살아왔단 말인가. 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끝까지 참고 있었는지 기가 막혔다. 나는 저렇게 추하게 늙다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문학을 너무 모른다. 삶의 이유와 방향성을 주는 것에 너무나도 무관심하다. 그 늙은이에게는 그런 차는 물론 그 무엇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문학은 인생적인 것이다. 문학을 무지 싫어하는 그 노년은 함부로 남을 모욕해 놓고 그 뒤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나는 이유 없이 모욕당한 것을 오래도록 후회했다.
왜 인간 품성이 이 모양들이란 말인가. 내 연배쯤의 사내 한 명이 매장을 나가면서 하는 말이 기가 찼다. 차 대는 데 방해가 되니 앞마당 복판의 그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자르는 게 낫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때의 내 심사를 더 토로하느니 어느 소설의 이러한 대목으로 갈음하는 것이 낫겠다.
이 세상에서 아직도 가치를 지니고 있는 불과 얼마 안 되는 것에 대해서조차 아무런 이해도, 감각도 지니고 있지 않은 인간이 있다니. 빌헬름, 내 머리가 이상해질 지경일세. 성(聖) ××마을의 그 성실한 목사 댁에서 내가 롯데와 함께 그 나무 그늘에 앉은 일이 있는 호두나무에 대해서는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 어쩐지 늘 커다란 넋의 만족으로 나의 마음을 채워 준 기막힌 호두나무였지! 그것은 목사관 앞마당을 얼마나 아늑하고 시원하게 해 주었던가! 그리고 그 가지들은 또 얼마나 흐드러져 있었던가!
추억은 머나먼 옛날에 이 나무를 심은 정직한 목사님들로 거슬러 올라가네. 마을 학교의 선생은 할아버지한테서 들었다는 그중의 한 사람의 이름을 흔히 우리에게 말해 주고는 했다네.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는군. 그 나무 밑에 서면, 나는 늘 신성한 심정으로 그 사람을 애타게 그리워했었지.
그런데 여보게, 이 호두나무가 두 그루나 잘려 쓰러져 버렸다고. 어제 우리가 그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선생은 눈에 눈물을 짓고 있었다네. 베어 쓰러뜨리다니! 나는 미칠 것만 같았어. 맨 처음 나무에 도끼를 휘두른 그 나쁜 자식을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을 정도였네. 이런 나무가 두세 그루 내 집 마당에도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 그루라도 그것이 나이 탓으로 시들어 죽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야말로 슬픔으로 초췌해졌을 터인데, 그런 내가 이것을 말없이 그대로 보아 넘겨야 하니 말일세.
그런데 여기 한 가지만은 재미있는 일이 있다네. 인간의 감정이란 놈의 미묘한 대목이지!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투덜대고 있다네. 그래서 나는 목사 부인이 버터나 계란이나 그 밖의 조미료의 형편으로 자기가 이 마을에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조만간 알게 될 것이라 보고 있다네. 실은 이 여자, 신임 목사의 부인이 이번 일의 장본인이기 때문일세(그 늙은 목사는 돌아가셨다네). 말라빠진 병든 몸의 여자로서, 세상일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이런 여자에게 관심을 품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 학자인 채 하고 있는 바보 같은 여자로서 성서 정전의 연구 따위에 열중하여 현재 유행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비판적 개혁에까지 힘을 들이고 있고, 라파타의 광신에는 어깨를 흠칫하고, 몹시 건강을 해치고 있어, 신의 지상(地上)에는 아무런 기쁨도 품고 있지를 않다네. 이런 여자이기 때문에 그 호두나무를 베어버리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걸세.
정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네. 생각해 보라고. 낙엽으로 마당이 지저분해져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 나무 때문에 볕도 안 들고, 열매가 영글면 애들이 돌을 마구 던져요. 이 짓이 얼마나 신경에 거슬리는지, 게다가 깊은 사색의 방해가 될 뿐이어서요. 이렇게 뻔뻔스레 말하고 있으니 말이야.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
나는 카페 일이 집에서 입고 나온 대로 쭉 있어도 되어 좋았다. 승마장에서는 가자마자 벗고 작업복으로 갈았다가 시간에 쫓기며 다시 승마복 차림을 했다가, 하루에 지겹도록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어야 했던가. 나는 카페로 가려고 집을 나서야 할 때 뭘 입을지 고르느라고 시간을 쓰기 싫었다. 나는 그 복장이 글쓰기 편할 정도면 족했다(그렇다고 나는 글을 내의나 잠옷 차림으로 쓰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현시대에 옷만큼 의미 없는 것도 드물다. 의류 수거함 같은 데에 버려지는 멀쩡한 옷들을 보라. 엄청난 양의 옷들이 중고 옷 가게들을 꽉꽉 채우고 있다. 몸매가 안 좋은데 어떤 비싼 옷을 걸친들 모양새가 나겠는가. 먼저 몸매를 만들 일이며 훨씬 싸게 먹힐 것이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중략]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할 때 한 끼만 먹어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숲속의 생활》
나는 작가가 된 다음에는 집에서 신는 플라스틱 슬리퍼―신고 벗고 관리하기에 이만큼 편한 신발은 없다―로 바깥을 나다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예술가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카페로 돈을 못 벌면 생활도 안 될뿐더러 소설도 쓸 수 없었다. 점심을 먹어야 할 때까지 한 사람도 오지 않으면 나는 약사여래의 명호를 두세 번 되뇌었다. 점심 먹기 전인데 차가 올라와 서고 차 문이 열리면 나는 속으로 약사여래의 명호를 불렀다.
나는 카페가 한옥인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랫길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건물이었다. 숲속에 숨어 있으므로 처음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사가 어느 정도 되려면 한 번 왔던 이용객이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려면 다른 데로 대신할 수 없는 정체성이 더 있어야 한다고 나는 보았다. 무엇이 있을까 하고 다른 카페들을 다녀보면, 애초에 선택을 잘 했어야지 무조건 흰색으로 얄따랗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들 하며 그 비인간적인 꾸밈들로 나는 십 분 이상 앉아있기 힘들었고, 대개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돈 문제가 아니었다. 돈을 들이면 아무나 할 수 있다. 나는 예술가로서 돈 없이 할 수 있어야 했다. 그간 몇 가지 해 놓은 것이 있기는 했다. 각자가 찾아서 읽어야 하는 것들이지만, 재봉틀―재봉틀 다리를 써서 셀프 테이블을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은 단어들을 이어 박음질하듯 하는 글쓰기의 의미를 넣었고, 야외 벤치 자리에 테이블로 만든 돌절구는 문장을 이겨 빻듯 하는 집필 작업을 뜻할 수 있었다. 기사 방패에 묻은 이야기는 8장에 적었다. 주운 옛날식 욕실장을 카운터 테이블 뒷벽에 건 것은 무의미의 의미였다. 그러면 그 자리에 무엇을 걸어야 하겠는가.
그 늙은이가 반면교사였다. 나는 카페를 어떻게든 더 문학적으로 해 놓겠다고 결심했다.
드디어 문인 협회의 그 여성 사무국장이 다시 왔다. 물론 내 변호사 친구와 함께. 나는 그녀에게 창가의 제일 좋은 자리에, 전번에 한 말대로 세워놓은 칸막이부터 가리켰다.
“자리마다 완전히 막았어야죠.”
그녀는 이러는 것이었다. 문학관 내지는 서재에 자꾸 무슨 놈의 파티션이란 말인가. ……취향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녀 역시도 파티션 많은 데로 돌아다니면 될 일이었다. 나는 더는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여기 유명한 곳이에요?”
늙수그레한 내외가 차에서 내린 다음 건물 바깥을 서성이더니 남자 쪽이 물었다. 내가 그렇지 않다고 하자 도로 차에 타더니 휙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자기들이 안에 들어와서 직접 앉아서 마시면서 분위기를 느껴봐야 좋은지 아닌지 알 것이 않은가. 그래! 유명한 데나 가서 처마셔라……. 나는 한참 씁쓸하게 서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를 명소로 만들리라.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행은 여행할 필요가 없음을 매 차례 일깨워주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나는 쉬는 날마다 아무 데나 멀리까지 운전을 하면서 차창 밖으로 뭔가 문학적인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나 폈으나 찾기는 어려웠다. 생각보다 세상의 길옆들은 문학적이지가 않았다. 나는 예술가란 뻔한 풍경에 상상을 덧칠해―상상력이 중요한 것이다―색다른 무엇으로 재창조하는 존재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