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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래 Jul 08. 2024

12. 첫눈 오는 날

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12. 첫눈 오는 날



  첫눈이 크게 내리고 있었다. 앞쪽으로도 제2 주차장 쪽의 뒷길로도 차로 올라갈 수 없었다. 나는 카페 바로 아래의 너른 모 가든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일단 걸어서 올라가 보았다. 나는 그대로 시내로 돌아갈까 했다. 이런 날 누가 오겠는가……. 첫눈이 쏟아지건만, 나는 나이와 세월과 돈 생각만으로 한탄스러웠다.

  나는 일단 전날까지 사흘 걸려서 설치한 화목난로에 불을 넣어 시험해 보기로 했다. 실어다 놓은 예전 사업장에서 쓰던 등유 튜브 히터가 있었지만, 후배의 처 카페가 들어있는 건물주가 안 쓴다고 실어가라고 한 것이었다. 화목난로는 그녀의 인테리어 사무실 1층에 있었고, 바로 옆 건물이 교복 대리점이기 때문이었다. 

  눈송이가 잦아들었다. 나는 무엇이든 행동하기로 했다. 넉가래와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차가 올라올 수 있게 앞쪽 진입로의 눈부터 치웠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기다려 줄 수 있지?”

  첫사랑 동갑내기 소녀는 말간 낯으로 나와 잠시 눈길을 섞었다가 자그마한 머리를 두어 번 끄덕였었다. 얼마가 흘렀고 아침부터 날이 침침하더니 손이 곱을 만큼 대기가 냉랭한 날, 오후의 중간쯤부터 언뜻 흰 티끌 같은 것들이 너른 간격을 두면서 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간 기다렸으나 굵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잘한 첫눈은 한 시간여 휘달리다가 말았지만, 약속한 시각 10분가량 후에 제과점의 쇼윈도 밖으로 가까워져 오는 그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군 제대 이틀 전에 그해의 첫눈이 내렸다. 첫눈이 오기 전에 나갈 수 있겠거니 했다가 나는 꽤 실망했다. 제대한 다음 날 오전에 나는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고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침침하고 싸늘한 날이었다. 군 생활 동안 한 번이었지만 나를 면회 와서 밤새워 시린 등을 호호 불어주다 간 유일한 여자였다. 나는 그날 그녀와 등받이 없는 콘크리트 벤치에 나란히 붙어 앉아서 사랑을 고백했었다.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

  나는 말하지 않았다.

  “승영 씨는 참 똑똑해. 난 그게 부러워.”

  “다른 녀석에게 가려는 여잘 쫓아다니는데 똑똑한 거냐? 바보 천치지.”

  “아니야. 승영 씨는 진짜, 정말 똑똑한 사람이에요. ……사랑은 바보도 할 수 있어.”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불쌍해.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 난 언제나 이래왔으니까. 만성이 다 되어 별로 괴롭지도 않아.”

  그렇게 그녀는 떠남을 선택했다. 내가 측은했던지 울 것처럼 잠잠하던 그녀가 외로워서 떨리는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사랑한 그녀의 체온과 그 향내를 서럽게 들이마셨다. 교외의 그 명승지 공원 아래에서 다시 택시를 잡았다. 차창 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택시 안에서 서로의 손을 꼬옥 한 번 쥐어본 뒤 서로의 갈 길로 엇갈려 갔던 것이다.


  누가 지금 문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없는 산혈의 묘비처럼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 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이동원, 〈애인〉) 


  제대 1년 후 나는 본가 마당의 눈을 쓸다가 문득 며칠 전 첫 밤을 가졌던 여자의 순결을 의심하면서는 또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이제는 그 모두가 덧없었다. 그렇게 내 인생은 지나갔다. 사람은 죽을 때 지나간 사랑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갈 것인가

  나는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하얀 여백 속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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