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자연은 가차 없었다. 카페의 첫 겨울은 추운 날이 잦았다. 찬바람을 쐬면 몸이 안 좋았고 쉬이 피로해졌다. 나는 가끔 사찰로 올라가 눈을 치워서 좁다란 길을 내거나 무거운 물건을 날라 주거나 하면서 하루하루 매장을 지켰다. 이렇듯 지켜야지만 다음이 있을 터였다. 앞으로는 내가 중간중간 사찰의 일을 해 주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어느 날 밤 나는 식탁에서 맥주 처음 한 병도 채 마시지 못했는데 어질어질했다. 남은 한 컵가량이 아까워 위층 방의 아들을 주려고 나선형의 나무계단을 올라갔다. 맥주컵을 자식에게 건네주면서 나는 허공을 밟았다. 아래층으로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졌다. 강화 마루를 깐 아래층 거실 바닥에 머리가 부딪는데 누가 뒤통수를 한차례 갈기는 것이었다. 아내였는데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놀라서 그랬다고 했다.
“아니, 아무리 놀라도 그렇지 떨어진 사람을 뒤통수부터 때리는 경우가 어디 있어?”
계단 중간의 나무판 하나가 반쯤 갈라져나간 것으로 보아 나는 다행히 계단을 타고 나선형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영양상태에 문제가 있는 듯했다. 다음날부터 카페에 나오면, 라테아트 연습을 겸해서 카페라테를 한 잔 따듯하게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져온 것은 아무래도 카페라테 잔으로 안 되겠기에 인터넷으로 네 조 시켜두었었다. 나는 날마다 카페라테를 마시기 전에 휴대전화로 찍었는데, 그림이 좀체 나아지지 않는 것이었다. 편의점 것처럼 자동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에스프레소 머신은 꽤 까다로웠다.
카페는 여가 문화의 장소라고 나는 본다. 특히 이같이 산속에 있는 카페는 여유가 있어야만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나 카페를 이용하지는 않는데, 카페에 가서 버릴 시간이 없다는 것인지, 커피값으로 그만한 돈을 쓸 수 없다는 것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전까지는 나도 그 문화를 몰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처음에 친구의 일 톤 트럭을 빌려 경기도 어느 지저분한 촌구석에 비닐하우스를 몇 동 치고 중고 가구를 쌓아놓고 파는 데를 가서 이 인용 테이블 세 개를 실어 왔었다. 상판의 복판에 언뜻 봐도 고양이를 간략하게 디자인한 것이 분명한 로고가 찍혀있는데, 나는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돈이 너무 많아서 자기네 로고를 넣어 맞췄다가 망한 어디 커다란 카페에서 나온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같은 테이블이 다량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 세 마리의 이야기들 훨씬 더 후에 알아보니 그 고양이 로고 테이블은 국내의 한 작은 카페 프랜차이즈의 것이었다. 아무튼, 처음에 그 고양이 로고 테이블들을 가져왔을 때, 이왕 이럴 바에야 망해서 나왔고 로고가 찍힌 여러 카페 브랜드의 테이블을 모아 놓아도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돈이 부족했으므로 어디서 나온 중고를 실어 왔을 뿐이지만, 나는 그 테이블들의 뜬금없는 고양이 형상을 보며 한참을 생각했었다. 그 로고가 확실히 고양이라면 내 매장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인가. 어떤 연관도 없었다. 그런데 고양이 한 마리씩과의 사연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달픈 사연들이…….
북극의 겨울은 보통 영하 40°C, 때로는 영하 50°C까지 내려간다. 북극여우나 늑대는 자기 체온보다 100 도 가까이 낮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살 수 있다고 한다.
오전 10시쯤 카페에 오면 먼저 차를 가지고 제2 주차장 쪽으로 돌아서 사찰로 올라갔다. 법당 옆에는 무슨 공사들로 나온 각재 동강이들이며 이런저런 모양의 잡다한 나무토막들이 쌓여있는데, 절 측에서 언제 치워주었으면 했으며 화목난로에 때려고 한 포대씩 싣고 내려오는 일이 일과처럼 되었다.
12월 초순이 끝나기 전이었다. 이전까지는 춥다고 할 수 없는 날씨였었다. 그날, 그 시각쯤의 기온은 코끝이 찡할 정도였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 트렁크를 열어놓고 보니 바로 옆, 법당 출입문의 섬돌에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몸통을 말고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야옹아. 왜 여기 이러고 있어?”
그 고양이는 한 번 울 뿐 그 모양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다가갔다. 위협을 느꼈는지 고양이는 도망치려 하는 것 같았는데, 아차! 그대로 뒤집히며 섬돌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앞발로만 어떻게든 이동하려고 했는데, 허리 아래쪽은 마비되어있는 듯했다. 만일 밤새 찬바람을 피하려고 섬돌 위에 계속 웅크리고 있었다면 영하 8°C에 그 돌은 얼음장보다 더해져서 반신이 그렇게 마비되었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고양이는 앞발톱으로 언 땅을 할퀴며 급하게, 하지만 아주 조금씩밖에는 기어가지 못했다.
‘목숨이란 모진 것이다!’
나는 그 짐승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는 배를 보이며 발랑 뒤집혀서 나를 보면서 날카롭고 표독스럽게 을렀다. 그의 그런 자세로는 할퀴거나 물릴까 봐서 나는 덥석 잡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는 버둥거리며 다시 조금씩 도망치고 있었다.
“이리 와, 인마. 그러다간 얼어 죽는다고!”
왜 하필 출입문 앞이었을까? 생명에 대한 자비란 무엇인가? 얼어 죽지 않으려고 그 법당 출입문의 섬돌에서, 대자대비한 부처가 있는 그 안으로 살려고, 아마도 들어가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출입문은 자물통으로 굳게 잠겨있어 그 고양이가 들어갈 수도 불보살들이 문을 열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목숨은 모진 것이다. 생명체 하나가 법당문 앞에서 반쯤 얼어서 죽어가는 것이 삶인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에 더없이 공감하는 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짐승도 이럴 수가 있구나.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 못 쓰는 나무토막이라도 모아다가 불을 지피고 장사를 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이 짐승은 바보 같게도 기온이 갑자기 영하 8°C로 떨어지자 아무 대책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양이는 인간을 피해 내 차 밑으로 들어가 “갸르릉” 거렸다. 바퀴에 치일까 봐 나는 조심조심 차를 이동시켰다. 고양이는 숨을 곳을 잃어버리고 그대로 그 자리에, 꽝꽝 언 땅에 엎드려 있었다. 다가가니 또 몸을 뒤집고 배를 보이면서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나는 그를 도로 뒤집어 어깻죽지를 잡고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얘가 살 수 있을까?’
동물 병원 같은 데 데려갈 형편은 전연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절의 바깥 화장실이 일단 생각났다. 이런 날씨에는 올 신도도 없었다. 요사채의 한쪽 외벽에 심야 전기보일러 본체가 있었는데, 그쪽 벽을 한쪽 내벽으로 하는 화장실은 온기 때문에 수도도 얼지 않았다. 특히 밤 아홉 시쯤부터는 뜨끈하게 데워질 것이었다. 나는 그 화장실 남자용 칸에 있는 보일러 본체 바로 옆에 그를 내려놓고 하반신을 마사지했다. 그는 영 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매장에 내려가서 비스킷 한 개를 가져다가 일단 그의 곁에 두어놓았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고 밤사이 최저기온은 영하 12°C까지 떨어졌다. 내가 그 화장실 문을 여니 그는 보일러 본체에서 약간 띄어서 바닥부터 몇 단 성기게 대충 쌓아 막은 적벽돌의 틈새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만큼 세상의 엄혹함은 무서운 것이었던가. 내가 그를 잡아 꺼낼 때 보니 오른쪽 뒷다리를 썼다. 그것만도 다행이었지만 다른 쪽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에 걸려있던 수건 한 장을 바닥에 깔았다. 그를 빼낼 때 벽돌들이 무너졌기에 그 수건 가장자리로 기역 자로 벽돌을 새로 쌓고 그를 놓은 다음 다른 수건으로 덮어주었다. 비스킷 부스러기가 약간 흩어져 있을 뿐 그는 거의 먹지 않은 듯했다. 나는 절에서 구운 두부를 한쪽 얻어다 놓아주고 물도 한 사발 받아주었다.
밤에 나는 아내에게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왜 하필 법당문 앞에서 절반 얼어서 죽어가야 하며, 부처는 뭐 하시냐, 하자 아내가 말했다.
“부처님이 걔한테 일러준 게 아닐까? 그 시간에 법당문 앞에 있으면 누가 와서 너를 살려줄 거라고.”
그다음 날. 일요일. 최저기온 영하 13°C. 내가 그의 하반신을 주무르니 그 왼 뒷다리가 약간씩 움직이는 것이었다. 신경이 통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안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짐승이라서 곧 좋아질 줄로 알았으나,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들어내고 집에서 가져온 안 쓰던 여름 이불 한 장을 접어 깐 다음 나머지 반으로 그의 머리만 빼놓고 덮어주고, 사 온 고양이 먹이 제품을 그릇 하나에 부어 놓았다.
이튿날. 월요일. 지난밤 최저기온은 영하 12°C였다. 그는 아예 이불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는데 내가 이불 위 겹을 벗겨보니 고갯짓이 활발했다. 그는 나를 올려다보기만 했을 뿐 첫날처럼 “갸르릉” 대지 않았다.
하반신이 얼어서 마비되었었던 그 누런 고양이는 몸을 회복하고는 놓아주었던 먹이를 다 먹고 어디 틈이 있어서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아마 그는 겨울이 어떤가를 처음 겪어보았으리라. 나는 그가 이제부터는 어디선가 강인하게 살아남기를 기원했었다.
카페 전기 요금, 결제 단말기 임대료와 그 인터넷 요금, 요금을 안 내서 이용 정지시키겠다고 틈만 있으면 울려대는 휴대전화 메시지 알림음, 아무도 없더라도 언제 올지 몰라서 계속 가동해 두어야 하는 튜브 히터 등윳값, 차 기름값……. 돈이 들어가는 것은 살아있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매일 나는 돈 걱정을 하면서 카페에 왔다. 담뱃값이 없을 때도 자주였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곤궁은 끝이 없는데 담배 한 갑 거금 4500 원은 여전했다. 짜장면 한 그릇도 5000 원이건만.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피우는 게 담배인데, 대통령에서 파면되어 감옥에 간 그 여자가 그 꼴이 된 것도 싸다고 할 수 있었다. 저의 아버지라면 차마 못 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연설도 높낮이가 없는 어조로 국어책을 읽듯 했었다. 그 점도 자기 아버지의 10분의 1도 못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즈음 나는 2000만 원의 반이라도 만들려고 몇 년째 써오고 있던 그 소설을 다시 손질하고 있었다. 매해 시·소설·희곡 등 여덟 개 분야 작가 100명에게 각 1000만 원씩 정부 예산으로 지원하는 문학창작기금이었다.
올해는 20명으로 축소한다. 더욱이 지원 형태를 작품 공모에서 작가 추천 방식으로 바꾸고……
이태 전 신문기사인데, 그 여자가 그 해 또 엉뚱하게 벌여놓은 일이었다. 내가 그 소설로 그 돈을 받으려고 원고지 100 매―그 전해까지는 원고지 100 매 분량의 원고 앞부분을 제출하면 되었다―를 끝냈을 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작가 추천 방식’이라고 해서 열불이 났었다. 아니, 감히 누가 누구를 추천하고 자시고 한다는 말인가. 그냥 자기들끼리만 나누어 먹겠다는 소리였다.
이번에는 앞에서부터 원고지 300 매 분량과 시놉시스로 원고지 15장 내외를 내는 것이었다. 마감은 성탄절 다음 날 저녁까지였고, 나는 마감일까지 붙잡고서 공을 들일 대로 들인 다음 제반 서류들을 인터넷으로 보냈다.
그다음 날부터 다시 며칠 한파가 왔을 때였다. 매장의 수도관이며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연결된 정수관이며 급수관이 얼어서 녹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슨 작업 때문에 화장실에서 통하는 바로 뒤의 창고방―공구 창고로 쓰고 있었다―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바닥에 못 보던 시커먼 형체가 있어 나는 깜짝 놀랐다. 플래시로 비춰보니 얼어 죽어 있는 고양이었다.
“여……! 너, 멋지게 생겼는데? 어디 가니?”
가을날, 삵같이 멋지게 생기고 자존심 세었던 그였다. 지난번 몸의 반이 얼어있던 그 누런 고양이를 보았을 때 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처럼 당당한 고양이라면 이깟 겨울쯤 너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바로 그 고양이었다. 나는 가슴 밑바닥이 꺼지는 것 같았다.
사체는 꽁꽁 얼어 딱딱했다. 그는 깊은 잠을 자듯 앞다리끼리, 뒷다리끼리 쭉 뻗어 서로 겹친 채 나란히 놓인 목공용 외날 톱을 등지고서 찬 바닥에 모로 누워 있었다. 눈을 뜬 채 머리를 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다가 죽은 것처럼. 아니면 자기 운명을 알고 긴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힘들고 고독한 생을 마감한 것처럼. 예전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이제 가슴이 조여들었다. 털 난 동물이 어찌 이리 맥없이 죽어가나. 화장실과 벽 하나 사이일 뿐인데, 수도가 동파되지 말라고 화장실에는 라디에이터를 켜 놓았었다. 라디에이터가 켜져 있는 화장실로 그가 들어올 구멍은 없었다. 적어도 얼어 죽지는 않을 수 있는 화장실과 단지 얇은 벽 하나로 가로막힌 창고의 얼음장 같은 바닥에서 그는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니, 카페에 무슨 먹을 것이 있나. 있다고 해도 커피 찌꺼기뿐. 그것도 잠그고 가는 매장에 있건만. 조금만 내려가면 식당들이 줄지었고, 찾아보면 음식물 쓰레기며 추위를 피할 틈바구니가 여럿이었을 텐데. 여기는 더 추운 산기슭이 아닌가. 그는 왜 여기만 고집하다가 어떻게 창고로 들어와―그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나는 찾을 수가 없었다―얼면서 삶을 마감했는가. 땅도 다 단단하게 얼어있을 테니 묻어 줄 수도 없었다. ……춥고 고된 삶. 그래. 한동안 그렇게 누워서 푹 더 쉬려무나. 얼어서 썩지도 못할 테니. 나는 차라리 그의 죽음이 구차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자신을 동정하는 야생동물을 본 적이 없다.
꽁꽁 언 채로 나무에서 떨어져 죽어가는 작은 새 한 마리조차도
결코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 로런스David Herbert Lawrence, 〈자기 연민Self Pity〉
날이 조금 풀렸을 때 나는 삵처럼 멋지게 생기고 도도했던 그 고양이를, 죽어서는 따듯하라고 못 쓰는 이불 조각으로 감싸서 매장 앞마당 앞 편 산자락 양지에 묻었다. 그의 무덤 앞에 널빤지 동강을 하나 꽂았다. 이름은 쓰지 않았다.
나는 이로써 고양이와의 연관은 끝나는가 했다. 두 마리와의 사연으로…….
그렇게 끝나지를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먼저 말했던 무인모텔들을 지나서 얼마 후에 얼마 후에 가끔 담배를 사러 들르는 편의점이 있다. 그 길로 계속 가면 예전에 짧게 일했던 조그만 승마장이 나오고 시내까지 가는 시간을 반절 줄일 수 있었다. 큰 도로는 퇴근길의 차로 많이 밀리기 때문이었다.
“앞에 있던 고양이 어디 갔어요?”
그 편의점에 들를 때마다 문밖 야외 나무 테이블 아래 중간에 보강재로 가로질러 놓은 널판에 올라앉아―그 밑은 시멘트 바닥이었다―동그랗게 몸을 말고 “야옹” 거리면서 뭔가를 얻어먹고자 하는 고양이가 있었다. 나는 없는 돈에 미니 소시지 한 개나 작게 포장된 게맛살―그래도 생선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였다―따위를 사서 먹이고는 하였다. 그 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내 곁에 바짝 붙어서 사 주는 것을 먹었다. 그 고양이는 자주 편의점 손님들에게 얻어먹는다고 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야옹 대니 편의점 문밖에서 춥기야 하지만, 그래서 그 고양이는 맥없게 죽지는 않을 줄로 알았다. 한 날 그 고양이가 보이지 않아서 내가 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었다.
“며칠 전에 죽었어요.”
아! 마찬가지로 얼어 죽었구나. 어찌 이리 맥없이들 얼어 죽나. 나는 다시 들어가서 물었다. 얼어 죽었느냐고.
“아니요. 앞길에서 차에 치여서…….”
차에 치여 죽는단 말인가. 제 구역에서?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그 편의점 야외 테이블 아래에 붙박여 “야옹야옹” 거리며 먹을 것만 애원했느냐. 도대체 조그마한 생명인 고양이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나는 담배를 한 대 더 피워 물었다.
나는 이로써 고양이 로고가 찍힌 테이블 세 개와 세 마리의 고양이가 그 같은 연관이 생긴 줄로 알았다. 그러나 아직 비극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짝 말라 아사한 그 누런 고양이의 사체를 절의 화장실 한 귀퉁이에서 이듬해 봄에나 발견했다. 내가 그 고양이를 죽였던 것이다.
누렁아. 내가 잘못했다. 네가 나간 줄로만 알았다. 한 번 구해주었으면 끝까지 돌봐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니. 겨울 다 지나고 이 봄볕 아래서 네 사체를 보노라니 억장이 무너진다. 부디 명복을 바란다. 죽어서는 따듯하고 배불러라. 미안하다.
세상에 요행은 없었다. 나는 처음의 수건 두 장으로 그 고양이의 마른 사체를 잘 싸고 먼저의 삵같이 생겼던 고양이의 봉분 없는 무덤 옆자리를 팠다. 매장에 있는 비스킷 몇 개와 편의점에서 사 온 미니 소시지, 작은 포장의 게맛살, 그리고 아내가 사 준 네모난 캔의 고양이 간식을 따서 같이 묻었다.
나는 고양이 로고가 찍힌 테이블 앞에 앉아서 검은 커피를 마실 때마다 삶과 죽음을 되새기게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