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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래 Jul 15. 2024

15. 겨울 샹그릴라

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15. 겨울 샹그릴라



  주말이 되면 첫날 아침부터 그래도 나는 조금 마음이 평안해졌는데, 우선 아침결에 집 아래를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며 공기를 파열시켜서 올라오는 우편배달 언더본Underbone 오토바이의 불안스럽게 시끄러운 소음을 듣지 않아도 되어 살 것 같았다. 좋은 소식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무슨 소식을? 내게는 그러한 소식이란 있을 리 없었다. 주중에는 그 언더본 오토바이의 듣기 싫은 배기음 속에 가슴이 졸아들어 이내 집을 나오는 것이었다. 

  주말에는 차 번호판 떼일 일이 없고, 휴대전화에 무슨 무슨 독촉 문자도 오지 않는다. 매장에 오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었으나, 시간은 의외로 빠르게 갔다. 점심을 먹은 후 어, 하다 보면 이내 밖이 어스름해졌다. 시간은 그저 내버려 두어도 흘러가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다지 젊은 날의 과오들에 대한 부질없는 회한을 가지지 않게끔 되었다. 적어도 내가 작가가 되기 전의 일들이었다.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묻어두자. ―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인생찬가A Psalm of Life


  나는 찾는 사람들에게 자연 속에서의 평화와 휴식을 주기 위해 카페를 열었던 것이다. 영혼의 평화와 휴식을. 맨 처음 매장에 들어오면 나는 반으로 접힌 영수증 두세 장부터 바지 주머니에서 꺼냈다. 우유나 비스킷 구입, 주유 등등의 건 들이었다. 나는 꼭 종이 영수증으로 달라고 하거나 뺐는데, 동강 낸 양초를 감싸기 전에 그 영수증들을 훑어보았다. 영수증은 얇아서 빠르게 촛물을 머금어 착화제를 대용하기에 다른 종이보다 적합했다. 날마다 못해도 두세 장씩은 반드시 나오니 영수증이 떨어지는 적은 없었다. 그만큼 소비가 잦은 것이었다. 그 종이쪽지들을 다시 일일이 확인하고 태운다고 아예 소비 없이 살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그 의식은 돈을 안 써도 되기를 기원하는 제의였다.  

  화목 난로에 불을 지피는데 나는 영수증 두세 장으로 감싼 초 동강과 빈 골판지 상자에서 적당한 크기로 자른 두 장, 그 위에 얹을 불쏘시개가 필요했다. 절로 올라가면 타다 남은 양초가 법당 옆 뜨락에 골판지 상자에 얼마든지 있었고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제2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잔가지들이 괜히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버릴 것이 없었다. 내 방식대로의 일련의 과정을 거쳐 불이 살면 커피를 한 컵 내려 그 흔들의자에 앉아 문학작품 한 권을 펴고 무릎과 정강이를 지지고 있다가 보면 전신으로 평온감이 퍼지면서 문득 더 이상 바랄 바 없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심경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 해외로 날아다닐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여행이 턱없는 소비일 뿐인 적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눈길만 조금씩 돌리면 뉴욕으로부터 파리, 이집트에서 그리스 등지를 마음대로 여행할 수가 있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카페 오는 길 중간쯤에 새로 생긴 만물상에 가져다주고 맞바꿔 온, 왕관의 뿔 하나가 부러진 자유의 여신상과 파라오 청동 흉상, 승리의 여신 니케의 목조상,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에펠탑 등의 소품을 책장 맨 위와 선반에 올려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가치 있는 여행은 내면으로의 여행으로 여정이 아무리 길다 한들 경비도 들지 않았다

  남들이 토요일 오전까지 한주에 5일 반을 일하던 시절에 나는 5일만 하면 되는 사업을 택했었다. 그러다가 어느덧 나와 같이 5일만 일하는 세상이 되더니, 나는 결국 망하고 나서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국정 공휴일이며 주말도 없이 거꾸로 꼬박 주 6일을 일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터였다. 그것은 카페 일도 마찬가지였으나, 나는 다른 일들보다는 정신적인 시간을 얻기 용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신은 독서 할 시간을 얻을 수 있소. 몇 분을 아끼려고 책을 건너뛰며 읽을 필요도 없거니와, 시간을 너무 빼앗길까 봐 하고 싶은 연구를 못 하는 일도 없을 거요.  제임스 힐턴James Hilton,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주위의 그 다람쥐들은 모두 겨울 전에 밤톨이며 도토리 등의 식량을 이미 충분히 비축해 둔 뒤에 자고 있을 것이나, 돈이 없는 나는 준비 없이 겨울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육칠만 원 하는 흡출기 없이 무동력인데도, 내가 매장 뒤로 돌아가 보면 끄트머리의 T자 연통에서 햇볕에 빛나는 새하얀 연기가 증기선 굴뚝의 그것처럼 힘차게 뿜어져 오르며 거대하게 용틀임을 하는 장관을 한참씩 연출하고는 했다.  




  나는 전에 큰스님에게 매장과 절이 자리한 산줄기에 얽힌 기이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절 뒤로해서 계속 산을 타고 가면 인접 군의 어느 마을까지 닿는다는 것이다. 예전에 그 마을에 살던 한 소년의 이야기였다. 그 소년은 열두 살 무렵이었고, 초가을의 어느 아침나절에 혹시 모른다고 싸준 주먹밥을 하나 챙겨서 작은 지게를 매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산의 나무로 땔감을 하던 시절이라 가깝게는 할 만한 나무가 없었다. 소년은 깊이, 더 깊이 산을 타다가 그만 왔던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헤매다가 지치고 배가 고파서 주먹밥을 꺼내 반쯤 넘기는데, 어디서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소년이 그 소리 쪽을 짐작해서 얼마쯤 근접해 가자, 긴 백발을 뒤로 묶은 노인 서너 명이 너럭바위 위에 둘러앉아서 바둑 비슷한 것을 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다가갔는데, 그들은 아무래도 일반 노인들 같지 않은 풍모를 하고 있었다. 소년 쪽으로 그중 한 노인이 돌아보았다.

  “사람의 자식 아니냐. 어린것이 길을 잃었구나, 예까지 다 오고.”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조그만 것이 나뭇짐을 만들려고……. 어히! 인생사라니.” 

  “자네, 저 앨 도와주려고 그러나?”

  다른 노인이 물었다.

  “안 그러면 어떡하나? 아예 내려가지를 못할 텐데. 얘야. 어디 사느냐?” 

  소년은 얼른 제 동리를 고했다.  

  “내가 도와주마.”

  노인은 소년과 함께 나무 한 짐을 만들었다.

  “따라오려무나.”

  노인은 지게를 지고 앞섰다. 어느덧 둘은 소년의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이르렀다. 노인은 지게를 벗어주고 소년에게 내려가라고 손짓했다. 

  소년이 마을로 들어서는데 꽹과리와 징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끝을 뾰족하게 깎은 장대를 들고 달려왔다. 

  “아이고! 이 녀석아.”

  무리 중 소년의 부모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서로 소년을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우린 호랑이가 널 물어간 줄 알았다.”

  “왜들 이러셔요? 산에서 길을 잃었다가 조금 늦게 내려왔을 뿐인데…….” 

  “아니, 이 녀석아. 뭐가 좀 늦어? 너 없어졌던 지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그런데, 반 덩이 남은 주먹밥은 먹어도 될 만큼 그대로였다.  




   “참, 모를 일이었지.”

  이제는 그 바위 위에서 바둑 같은 것을 두던 노인들처럼 늙어버린 당사자는 옛일을 이야기하고 나서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했다. 그때 이 이야기를 들었던 큰스님은 여기 산이 신묘하다고 하여 ‘신묘산神妙山’이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도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산이다. 그 경험을 했던 이 씨 노인은 지금 도청소재지에 거주한다고 했다. 

  시간이 멎은 듯한 곳! 사실이 그렇다면 여기는 샹그릴라의 초입 같은 곳이었다. 나는 커피를 팔면서 소설을 이어 갈 수 있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려고 이렇듯 신기한 곳에 들어와 있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2월의 매출은 33만 550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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