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내 카페의 마당에 올라와 차에서 내려서면 여전히 이상하게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날짜로는 이제 봄이었다. 카페를 연 지 어느덧 6개월에 가까웠다. 달마다 매출이 이 정도라면 보증금도 없고, 인테리어에도 투자하지 않았으니 다른 이들이라면 여기서 말아도 그만이었다. 나는 카페 운영을 통해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자유, 그러기 위한 경제적 자유를 원했다. 그렇다. 나는 경제의 승자가 되고 싶었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은들 나는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겨울이 닥쳐올 적에 얼마나 막막했던가. 고립감과 불안감이 순간순간 저며 들었던 겨울이었다. 그 힘들었던 겨울을 어떻게 견뎠던가. 별로 춥지 않았다 할지언정 나는 추울 때가 많았다. 화목난로를 때려고 손으로 해야 하는 톱질에 도끼질로 만드는 땔감 마련 문제며 사람이 오지 않아도 계속 틀어 놓아야 하는 튜브 히터의 등윳값이며……. 나는 한 해 겨울을 지긋이 버텨 낸 것이었다. 어떻게든 시내의 내성을 나는 지켜냈고, 춥지는 않게 가족이 겨울을 지내게 했다.
오전에 매장에 나와 화목난로 속에 나무를 재어 불을 붙여놓고 커피를 마시며 앉았으면 느낌이 새로웠다. 마음이 거뜬해졌고 덜 피로했다. 봄을 맞은 것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결국 이겨 내었다. 이제 땔감을 만드는 수고며 등윳값도 별로 들지 않을 터였다. 나는 이제까지 기다려 온 것이었다.
내가 카페를 하고 있는지 여섯 달째에 이르렀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인생을 잘 못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작년 추석이나 지난 설에 비싸게 선물을 준비 안 해도 되고, 귀찮게 휴대전화로 인사 문자 보낼 일도 없어져서 오히려 나는 좋았다. 시간에 쫓길 일 없고 자주 쉴 수 있는 점도 좋았는데, 충분히 휴식을 하고 나야지만 제대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화목 난롯가 흔들의자에 등을 파묻고 낮잠도 잘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일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글을 쓰는 작가라 해도 글을 쓰겠다는 심정이 되고, 쓸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기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이렇듯 샹그릴라 초입 같은 곳을 안 온다고? 모르면 알리면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야 할 일이었기에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는 자기 작품을 스스로 홍보할 수도 있다. 남이 안 해준다면 나 스스로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남들이 내 카페에 대한 웹로그Weblog 포스트를 안 써준다면 내가 50개라도 쓰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사진 찍어 두었던 내 카페의 깊은 가을 풍경이라든지, 일광들이 수풀 사이를 뚫고 내리는 오전의 풍정이라든지, 카페 오는 길의 문학적인 모습들이라든지,
“Memento mori!”
이런 카페에서는 흥밋거리나 재밋거리로 시시덕거릴 것만 아니라, 검은 커피를 들고 문학적으로 우리의 죽음까지도 한 번씩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가슴 아픈 세 마리 고양이의 이야기까지도 웹로그에 썼다.
‘하트’만 제대로 되어도 좋겠는데 좀체 늘지를 않았다. 다른 메뉴는 상관없었는데, 매번 따뜻한 라테 주문만은 피하고 싶은 내심이었다. 명색이 커피를 파는데, 그 후배의 처처럼 하면 안 되었다. 그녀는 커피값을 싸게 받는다고 그러는지 그림 띄우기를 못했고, 아예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내가 커피 전문가가 아니라도 그 값을 받으면서는 라테아트는 어느 정도 그리고 싶었다. 예전에 ‘카페 빈’에서는 그저 거품만 올려져 있었고 그림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나는 단골 목욕탕 옆 건물의 그 이탈리아 커피 프랜차이즈의 가맹점에 갔고 따뜻한 카페라테를 한 잔 주문해 보았다.
“지금 바리스타님이 자리에 안 계셔서 라테는 안 돼요.”
어린 여자로 아르바이트 직원 같았다.
“바리스타만 할 수 있나요?”
내가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건 안 가르쳐 줘요?”
“네. 안 가르쳐 주세요.”
무슨 대단한 ‘기술’인 듯했다. 나는 하는 수없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내 취지와 어긋나게 돈만 나가서 부아가 올랐다. 나로서는 아무리 봐도 동영상 공유 검색 서비스로는 모르겠기에, 싫었으나 900 ml짜리 우유 세 팩을 사들고 싫었으나 아내의 그 오촌 조카 카페에 가야 했다.
“거품만 좋으면 그림은 자동으로 돼요. 보세요, 그냥 되잖아요. ”
녀석은 내가 사 온 우유로 내가 사는 카페라테를 만들면서 말했다.
“그러면 어떡해야 거품을 잘 만드냐고?”
녀석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사 간 우유 중에서 250 ml 정도만 사서 마시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날린 것이었다. 나는 그 뒤로는 그 녀석과 상종하지 않았다.
도롯가 인력소 앞에 대기하는 인부들 앉으라고 내어다 놓은 실내용 헌 소파를 보노라면 나는 우울했다.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안에 있어야 하고, 바깥에 있어야 하는 것은 바깥에 있어야 하는데 밖에서 비 맞고 있는 내부용 의자들, 외벽에 걸린 거실용 벽시계, 그림 액자 따위들도 불우했다. 그리고 귀찮아서, 혹은 모자라서 하다 만 것 같은 페인트칠도 그러했다. 또 외곽으로 나가다 보면 예전에는 무슨 ‘가든’이란 이름의 큰 횟집이나 양념 갈빗집이었었는데 무슨 중기나 영농 법인 따위가 차지하고 있는 것에도 울적했다.
호박을 의자로 써야 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주변머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마을 여러 집의 다락에는 그저 가서 들고 오기만 하면 되는 쓸 만한 의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숲속의 생활》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카페를 만들기 시작할 때 고속도로에서 쉬려고 졸음쉼터에 몇 번 들렀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고정 볼트로 박혀있지 않은 야외용 나무 벤치였다. 나는 한참씩 갈등했으나, 필시 감시 카메라가 있을 터였고 차에 싣고 오면 잡혀갈 일이었다.
아침 어스름에 눈이 떠진 날, 나는 차를 가지고 여태껏 신시가지로 치는 동네를 돌아보았다. 그 동네에 가면 요새 ‘뜨는’ 업종이라든지 체인점 간판 디자인들의 추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임차료가 상상 못 할 동네였었는데, 어느덧 다섯 중의 하나씩은 망해서 텅 비었거나 뜯어내고 있는 참이었다. 주로 이십에서 삼십 대 청년층이 선술집이며 고깃집, 게임방, 라멘집 등을 차려 영업하고 있었는데, 어떤 점포는 생긴 지 일 년 만에 비웠고 다른 집은 육 개월 전에 개업한 기억이 나는데 벌써 인부들이 뜯고 있는 것이었다.
‘핫플레이스가 얼마나 가나. 다른 데가 또 생겼다 하면 다시 우르르 몰려가는데…….’
필시 그 청년들 열의 아홉은 부모의 돈으로 가게부터 차리고 보았을 텐데, 생각만큼 장사도 안될뿐더러 임차료에 치이자 나 몰라라 하고 때려치운 터일 것이었다. 육 개월에서 일 년 만에 그 비싸게 해 놓은 간판이며 인테리어, 새 조리 장비, 새 집기, 새 가구들로 돈을 날리는 세태를 나는 그 동네를 돌면서 목도했다.
한 군데는 안을 인부들이 부수는 중인데 그 앞으로 차를 대지 말라는지, 좌석과 등받이가 나무 널판인 야외용 의자를 두 개 길에 내어놓은 것이었다. 나는 안 쪽을 보았다. 인부들이 나를 볼 짬은 없어 보였다. 그대로 두어봐야 그 인부들이 가져갈 물건이었다. 한옆에는 두 개가 겹쳐서 쌓여 있었는데 한 개는 목판 널의 한쪽이 빠져서 덜렁댔고 다른 것은 널 하나가 깊게 홈이 파여 있는 것을 재빠르게 확인했다. 관계없었다. 고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원 점포의 관계자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차 뒷자리에 그 의자 네 개를 뉘여 겹쳐서 실었다.
이튿날부터는 그 동네를 더욱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 동네 특성상 이른 아침에는 돌아다니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건물과 건물의 좁은 사이에 내놓은 야외용 철제 주물 의자를 나는 또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등받이의 나무 널판이 통째로 탈락했거나 좌석 널판이 비틀리고 나사가 빠진 것들이었다. 처음에 샀을 때, 몰라도 철제 주물 의자는 꽤 돈을 주어야 했을 텐데 조금 손보면 쓸 것을, 그렇듯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자 다섯 개도 차에 싣고 왔다.
전에 처형이 식탁 의자로 썼다가 준 접이식 나무의자 세 개와 길가에 불법으로 쌓아놓은 쓰레기 봉지 더미 곁에 있었던, 흔들거리는 나무의자가 한 개 있었다. 뜨락의 야외 테이블마다 두 개씩 놓았었는데, 볼품도 없을뿐더러 눈비를 맞아 도료가 다 일어나고 좌석 널판들이 삭아서 빠져 매장 앞 정경이 우울했었다. 나는 살려고 그같이 피 묻은 야외용 의자들을 실어 왔다. 봄 장사 준비를 해야 했다.
“올 때마다 사장님은 항상 무슨 작업을 하고 계시지? 저기 있는 거, 이런 거 사장님 혼자 다 해 놓으시는 거야.”
“올 때마다 정말 뭐 하나씩 바뀌어 있어요.”
몇 차례 왔던 40대 부부가 차에서 내려 서로 하는 얘기였다. 내가 그 야외용 철제 주물 의자의 널판들을 다 분해하고 뒤판을 새로 박아서 다시 조립한 후에 일일이 종이테이프를 붙이고 이제 한참 페인트를 칠하던 중이었다. 고마운 내외였다.
“한 손에 망치 들고 건설하는 거죠.”
내 말에 그네들은 뜻 모르고 웃었다. 여자 쪽이 카페라테를 주문했기에 라테아트가 조금 늘었기로 삼단 튤립 비슷하게 만들어서 자리로 가져다주었다. 그네들이 왔을 때 다른 테이블이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보기 나았으련만, 그네들은 올 때마다 줄곧 자기들만의 고즈넉한 시간을 누리다가 가는 것이었다. 페인트칠이 다 마른 철제 주물 야외의자를 뜨락의 먼젓번 것들과 바꿔 놓았다. 그 야외의자들은 바깥에 놔두어도 무방했다. 혹여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들고 가도 그만이었다.
나는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길에 골프장 쪽으로 더 올라가는 그 과수원 언덕바지 붉은 지붕의 카페―여기도 돈가스를 팔았다―에 몇 번 들렀다. 나는 처음부터 ‘문학적인 숲’을 한다고 밝혔으며 갈 때마다 물론 커피값을 냈다. 벽에 늘어뜨린 크고 희끄무레한 태피스트리에는 ‘네가 와서 참 좋구나’라든지, 다른 데는 ‘보고 싶었어’, 벽 한쪽에는 ‘당신은 오늘이 제일 이쁘다’ 따위의 의미 없는 소리들만 쓰여 있었다. 내가 들르면 돈가스를 먹고 있는 데이트하는 청춘 남녀가 한두 테이블에 꼭 있었다. 내 매장 것보다 더 작은 화목난로가 그 집에도 있었는데, 화염이 크고 연기 냄새란 전연 없기에 물어보니 연통 끝의 흡출기가 빨아낸다는 것이었다. 그 집은 모녀가 같이하는데, 나보다 먼저 문을 열었고 골프장 가는 길에서도 눈에 잘 들어오며 여러모로 나보다 여건이 좋아 보였다.
한 날, 오후 세시가 되도록 차가 한 대도 올라오지 않아 아랫길까지 내려가 그 집을 살피니 차 네 대가 서 있었다. 점심을 싸 오지 못한 날, 나도 그 집에 가서 돈가스를 한번 먹어보았었다. 이런 산골까지 왔으면 내 매장처럼 그에 맞는 산이며 우거진 수풀 같은 자연을 느낄 수 있어야지, 나는 그러한 집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가스를 먹으려고? 왜 하필 산골짜기까지 와서 그 집 것을 먹어야 하나? 맛이나 있다면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이 산속에 카페가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아래 길목에 입간판을 크고 멋지게 높직이 새로 세우면 형편이 나아질 수도 있을 터지만,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큰돈을 들일 수 있어 그처럼 입간판을 다시 해 놓는다고 치자. 망해서 그 큰 간판만 덩그러니 남을 어이없는 모양새는 어찌할 것인가. 인생은 실험이다. 내 방법은 망하지 않는 길이었다. 먼저 투자를 하지 않고 흐름을 보아가면서 수입으로 경쟁력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었다.
‘두고 보라. 완연한 봄이 되어 나뭇잎들이 다시 나고 꽃이 피고 카페 앞마당에 그늘이 우거지면-그러니까 내가 처음 카페를 만들기 시작한 절기가 다시 오면 그때부터는-저 돈가스집에 나는 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