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연보랏빛 광선 줄기들이 나무 잎새들이 사이를 뚫고 내리고 있는 깊은 가을의 청명한 그 오전의 한때였다. 카페 문을 열자 곧 차 두 대가 올라왔다. 칸막이 뒤의 그 자리에 마주 앉은 두 젊은 남녀는 넓은 무슨 도면 같은 것을 펼쳐놓고 한참을 두런거렸다. 나는 느낌이 있었으나, 뜨락의 낙엽이나 쓸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남자 쪽 차가 먼저 내려갔고 여자가 출입문을 나섰을 때 내가 물었다.
“저 위에 카페 하시려는 거 맞죠?”
여자는 그렇다고 하고 나서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지난 여름부터였다. 그 위 카페를 지나 골프장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서 길옆에 터가 닦이더니 H형강들이 세워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층의 식당이 또 들어오는 것이겠거니 했다. 건물 구조가 조금 이상했지만, 카페일 리가 없는 것이 잘 해야 차 한두 대 주차할 자리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날이 가면서 H형강이 2층 높이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또 두어 달 작업이 중단된 듯 보였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공사가 더뎠어요? 여름부터 한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근데 여기 분위기 좋네요! 저도 인테리어 때문에 엄청 고민 많이 했어요. 잘돼야 할 텐데…….”
여자가 늘어놓았다.
“아까 인테리어 업잔가 봐요?”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시내 업체에 맡겼죠?”
“아뇨. 서울서 불렀어요.”
그 건물은 필로티 구조라 1층은 주차장으로 차가 여덟 대 들어갈 수 있었다. 얼마가 지난 뒤 가보니 2층 매장은 인테리어 공사가 거의 끝나 있는 듯했다. 출입문 앞에서 휴대전화로 내부 사진을 찍자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나와서 사진을 어디 올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관찰하니 그 앞에 대형 윙바디 트럭이 화물칸의 양 날개를 올린 채 섰고 새 가구들이 내려지고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던가. 커다란 느티나무의 그늘이 앞마당을 덮었었고, 울타리 삼아 늘어선 키 큰 층층나무의 지폐만 한 잎사귀와 긴 가지들이 때때로 춤을 추었었다. 이윽고 다 떨어져 낙엽이 노랗고 두툼하게 깔렸다가 어느새 눈으로 하얗게 덮였었다. 개나리가 노랗다 싶더니 본채 옆의 백목련이 순간 만개했다가 금세 덧없이 흩날렸다. 산벚꽃이 잠깐 앞산을 수놓더니 금방 꽃비로 흩뿌려졌다. 진달래꽃이 바람에 떨렸고 그 아래 산자락의 영산홍이 붉었다. 느티나무는 다시 넓은 그늘을 만들었고, 마당보다 한 단 높은 풀밭에 내가 산에서 옮겨 심은 귀족적인 할미꽃(나는 이 꽃을 어쩐지 에델바이스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군락은 흑자색으로 어둡게 불탔다. 지난해는 카페를 만드느라 잘 몰랐었으나 무성한 난초 같은 상사화 잎사귀들이 다 스러지더니 그 꽃들이 길게 솟아올랐다. 그것도 한순간. 또다시 누런 낙엽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껏 무엇을 해왔던가.
내가 옳게 사는 것일까? 오직 내 편의만 도모하지는 않았나. 내가 내 성에서 아침 시간의 어느 부분을 누리고, 일하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한 것이 잘못된 것일까? 승마장에서 버텼어야 했나. 아니면 거기서 나와 들어갔던 회사의 화물차 운전기사로 살았어야 했나. 다들 자기 개성과는 관계없이 소위 사회적 책무라는 것을 스스로 짊어지고 아침 8시까지나 9시까지는 일하러 나가면서 그렇게 살지 않나. 힘들면 무리해서라도 예전의 사업을 다시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사업은 전망이 없었다.
변수는 예견하고 있었다. 그 카페는 개업했고 내 카페는 이용객이 들지 않았다. 몇 차례 차를 몰고 올라가며 지나치면 네다섯 대씩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개업해서 먼저의 카페에 변수를 주지 못했다. 내가 여태까지 어떻게 견뎠는데. 다시 나뭇잎들이 나고 꽃들이 피고 앞마당에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간신히 그 집을 이겼건만…….
나는 더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무광 보라색 조색으로 에나멜페인트를 인터넷으로 시켰다. 칸막이의 색을 바꿨고, 액자를 벗겨서 틀 색을 바꿨다. 나무색 페인트를 사 와야 했다. 색이 눈에 거슬리던, 딸내미가 아기 때 것이었던 오 단짜리 합성 목재 책장에 그 페인트를 입혔다. 낮에는 영업해야 해서 밤에 출입문이며 창문을 죄다 열어놓고 도장작업을 했다. 페인트와 시너 냄새 때문인지, 찬 공기를 마셔선지 목이 칼칼해졌다.
이틀 뒤 나는 병이 났고 좀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기에 카페에 나가지 못했다. 하루 전, 그러니까 지난달은 위쪽에 새로 들어서는 카페가 시작하기 전에 매출을 올리느라, 쉬는 날은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구석구석 쑤셨지만, 이틀을 나가서 일했던 데다가―카페를 연 이래 월 매출액을 최대로 찍기는 했다―그 카페로 인해 신경이 많이 소모되었다. 더 경쟁력을 갖추려고 페인트 도장작업을 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았다. 페인트칠은 할 때마다 많이 힘들었다. 다음날 아픈 몸으로 둘러보는 매장은 전날 술을 많이 마셔 눈길이 피곤할 때처럼 볼품없고 지저분하게 여겨졌다. 몸이 아프니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게끔 되는 것 같았다. 바깥으로 그해의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카페의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여자는 화가라고 했다.
“오빠! 나 왔어요.”
진하고 천박하게 화장했으나 좋다고 연달아 찾아주어 공은 안 치게 되었으니 고마운 여자였다.
“오빠! 오늘은 여러 사람 데리고 왔어요. 멋진 데 있다고. 나 잘했죠?”
미술가협회의 여기 도시 지부 화가들이라고 했다. 주문한 메뉴들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는데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뭘 볼 것이 있어야지?”
볼 것이 없다고? 크로스오버한 귀족적 양식과 문학적인 색감과 통창 밖의 저 자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네들, 화가라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두 예술이 지닌 미덕이 서로 비슷하다고 해서, 각 예술에 종사하는 예술가들의 미덕도 서로 비슷하다는 식의 성급한 결론은 내릴 수 없다. 어린아이가 하프시코드를 위대한 명인처럼 연주할 수는 있지만 열두 살짜리 위대한 화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음악과 달리 회화에서는 취향과 감각 외에 사유하는 머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반면, 머리와 가슴이 없어도 바이올린과 하프에서 멋진 소리를 끄집어내는 연주가를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Xavier de Maistre, 《내 방 여행하는 법Voyage autour de ma chambre》
이렇듯 나는 기본적으로 화가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고, 또 내 소설을 그림 그리듯 써 온 것이 사실이었다. 때로는 소조(塑造)처럼 작업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글쓰기, 그러니까 말의 예술은 더, 아니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완성된 정신활동의 형태임에랴.
나는 미술을 전공했다는 이가 하는 카페를 몇 군데 가본 적이 있는데, 더 지저분하고 오히려 안목이 의심스러웠다. 미술을 했다면 더 근사하게 꾸며놓았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내 선입견에 불과했다. 아무튼, 나는 화가들하고는 궁합이 안 맞는 것 같았다.
“오빠! 내가 그 사람들 또 데리고 오려고 그랬는데, 바쁘대서 나만 또 왔어요.”
그녀는 한 잔 걸친 낌새가 났다. 여전히 다른 이용객이 올 기미도 없어서 내가 그녀에게 새로 생긴 카페를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나는 먼저 한 번 가서 커피를 사 마시며 둘러본 적이 있었다. 어디를 가나 뻔한 흰색 일색에 역시 빼놓지 않은 여기저기의 키 큰 초록색 식물의 화분들 하며 너무 낮고 반은 드러누워야 하는 줄을 엮은 철제의자와 값비싼 조명들. 사진을 찍어서 한참 많이들 하는 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올리기는 좋을지 모르나, 어차피 자기 집을 그렇게 꾸밀 수 없는 젊은이들의 허영만 조장할 터였다. 무엇보다도 사람 냄새가 나지를 않았다. 나라면 그렇게 뻔하고 허황한 데는 다시 가서 앉아 있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들어가 보면 젊은 남녀들뿐만 아니고, 그 카페의 포토존이라 할 수 있는 동그란 큰 거울을 배경으로 해서 백발의 끄트머리를 푸릇푸릇하게 물들인 늙수그레한 여자가 자기가 늙었는지도 모르고 찍은 밉상 맞은 사진 같은 따위를 보고, 그녀 또래라면 그 카페를 어떻게 평할지 궁금했다. 내가 처음 그 카페의 인테리어를 본 바로는 커피 파는 카페가 아니라 예전에 마담이 있고 젊은 접대부가 ‘룸’에 들어오는 술집인 ‘카페’ 같았는데, 어차피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경험한 적이 없을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다방과는 달리 널찍하고 밝은 인테리어에 비교적 화려한 테이블과 의자를 갖추어 놓고, 웨이트리스가 서빙하는 카페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다만 커피보다는 칵테일이나 병맥주 등을 주력으로 했으니 카페라고 하기는 다소 애매하다.
나는 다시 돈이 궁해졌기에 미리 그녀에게 커피를 사라고 했고, 그녀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녀는 에스프레소,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 집 커피는 무슨 탕약같이 시금털털하고 떫은 것이 애당초 맛이 없었다.
“뭔 에스프레소에 크레마가 안 떠 있어?”
그녀는 그러고서 그 잔을 거의 남겨두고 있었다. 내가 아내와 어릴 적의 큰아이와 함께 두어 번 갔었을 때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십수 년째 비었다가 얼마 전부터 갤러리 카페로 다시 문을 연 집의 2층 창가에 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비탈진 도로변이었는데 바로 아래서 차들이 내리쏘는 통에 괜히 불안해서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2층의 반이 ‘루프탑’ 자리지만 이 카페도 엇비슷한 것이 내리쏘는 정도는 아니나, 골프장 쪽으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차들이 눈에 거슬렸고, 촌구석의 비닐하우스들이며 바로 밑의 식당 굴뚝에서 뿜어져 오르는 연기며 주위의 간섭이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내 차에 타기 전에 말했다.
“여기 그저 그래, 오빠. 오빠네가 훨씬 분위기 있고 좋아. 걱정하지 마.”
그 바로 밑의 식당 여주인이 어쩌다가 지인들을 데리고 한 번씩 내 카페에 왔었다. 그녀는 그 카페 젊은 여자의 모친과 잘 아는 관계여서 속사정에 훤했다. 그 젊은 여자는 남편이 없다는 것 같았고, 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었다고 했다.
“미쳤어. 삼억(원)씩 들여서 그걸 하게?”
건축비가 1억 7000만 원, 간판 포함 인테리어에 1억 3000만 원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3억 원으로 끝날 수가 없다. 냉난방기에 전산설비에 커피 장비류에 가구, 집기류를 더해야 한다. 그렇게 목돈을 던지고 푼돈을 주워서 어느 세월에 회수할 것인가. 시내 쪽으로 대형카페가 몇 개 생겼는데 대형은 더하다. 대형으로 하면 대형으로 망할진대 목숨을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카페보다 나중에 생기고 내가 가서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는 시내 변두리의 두 군데 대형카페, 그러니까 4층짜리는 일찌감치 망했고 빵 많은 3층짜리 카페는 벌써 30억 원에 내놓았으나 통 나가지를 않고 있다.
겨울이라지만 내 카페에는 이용객이 거의 들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나는 딸내미를 생각했다. 그 집 커피가 그런데도 맛이 좋다며 웹로그에 올리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각자 입맛이 다르다지만 어느 정도는 기준이 있는 법인데 도무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금 나는 매일매일 고심하러 카페에 나가야 했다. 나는 순간순간 초조했다.
‘돈을 싸 처바르면 누구는 못하나. 아무나 다 한다.’
나는 그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여겼다. 한동안 새것과 오래된 것의 싸움이 될 것이었다. 새것에 대한 호기심은 얼마 후면 시들고 오래된 것, 인간적인 것에 더 호감을 느끼게 되리라.
그래도 이용객이 아예 없지는 않아, 여덟 명에서 열두 명씩 단체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골프모임으로 전에 몇 번 왔던 사람들이었다. 새로 생긴 그 카페로 가지 않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난 여기가 좋더라고. 돈으로 되는 게 아니고, 하나하나 다 세심하게 정성을 들인 거 같아요.”
한쪽 다리를 저는 초로의 한 골프모임 회장이 화목난로 옆의 내 흔들의자에 몸을 묻고, 망하면 다 내다 버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들을 둘러보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더 해야 했다. 가을에, 마찬가지로 시내의 그 신시가지에서 ‘수거’해 온 하얀색 직부등 하나를 화목난로 상방의 중도리에 박느라 사다리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내부가 다 철거된 전자게임장 바깥으로 빼놓은 물건 중 하나였다. 어차피 겨울이고 새로 생긴 카페로 당분간은 가망 없을 것이었다. 나는 재미있는 소설 한 권이 목마르던 참이었다. 다섯 명의 작가들 위쪽의 벽붙이등으로는 책을 읽기 충분치 않았었다.
카페를 만들 때 계속 썼던, 대형마트에서 5만 원 남짓했던 7.2볼트짜리 전동드라이버는 어디가 고장 났는지 충전이 되지를 않아 집에서 힘없고 조그만 가정용을 가져온 터였다. A형 사다리는 불안하게 끄떡거렸다. 아래쪽에서 화목난로가 한참 달아 있었다. 중도리 밑면에 간신히 조명등을 박은 다음 전선을 새들saddle에 끼워 고정하던 차인데 여간해서는 나사가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중도리를 잡고 발끝에 힘을 주었는데 사다리의 발판이 밀리는가 싶더니 정신을 놓고 말았다.
나는 어떻게 내가 바닥에 널브러지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일어날 수는 있었으나, 오른손의 느낌이 이상해서 내려다보니 바깥쪽으로 소지가 직각으로 꺾어졌고, 약지에서는 굵은 피가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기괴하게 변형된 내 한쪽 손에 한동안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실제라면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카페를 하다가 무슨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불행 중에 다행한 점은 타고 있던 화목난로로 사다리와 함께 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순 목조건물에 한창 관 화목난로가 넘어져 거센 불이 터지고 붙어서 퍼지면 나 혼자 무슨 수로 감당했을 것인가. 그 후의 내 인생은 아예 앞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속으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알루미늄 사다리는 반대쪽으로 쓰러지면서 의자 하나를 덮친 모양이었다. 손가락이야 이미 나갔기에 어차피 고치면 될 일이고, 급할수록 정리를 해야 했다. 승마 경력으로 밴 마음가짐이었다. 그 의자를 세워보니 등받이가 아예 못 쓸 정도였다. 없는 돈에 어떻게 사 놓은 것인데……. 나는 못내 아까워 속이 상했다. 화장지를 접어 약지에 말아 쥐고, 크거나 점점이 마룻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왼손으로 닦아내나가 문득 나 자신이 이상해 보였다. 영업 준비를 하고 있나…….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카페를 하고 나서 두어 번 떨어졌지만 이렇게 크게 떨어질 줄은 몰랐다. 결과부터 말한다면 나는 영구히 오른 주먹을 쥘 수 없는 지체 장애인이 되었다. 그날 영업을 접고 피 묻은―다시 쓰려고 했으나 마찬가지일 터였다―안내문을 출입문에 붙여놓고 한 손으로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면서도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건강보험 적용도 안 되는데 병원에 가서 그 돈은 어찌할 것인가. 나는 계속 머리를 짰다. 몇 차례 차를 세우며 갈등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휴대전화로 한 사람에게 사정을 말하고 그의 동의를 받았다.
시내의 정형외과 병원으로 가니 바깥 방향으로 젖힌 손가락은 부러진 것이었고 피가 떨어지던 손가락은 첫마디가 반쯤 잘려있었다. 의식 없는 추락 중에 그 알루미늄 사다리의 어느 날카로운 부분에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으드득 소리가 나게 잡아당겨서 맞춘 다음 손목 밑에서부터 길게 철심을 박고 약지를 꿰매고 팔꿈치까지 반깁스까지 했는데,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의사가 합병증의 위험이 있으니 이틀간 입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오늘 하룻밤만 있으면 안 될까요? 내일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중요한 일이라 하는 것은 사진동호회 20명의 예약 건이었다. 꼼짝없이 링거를 꽂고 입원실에 누웠다. 카페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창밖은 어둠에 덮였고 아내가 내가 먹고 싶다고 전화했던 야채 샐러드 빵 두 개와 200 ml 짜리 우유 한 팩을 사 들고 딸내미와 함께 들어왔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팠다. 그 빵을 딸내미도 먹고 싶다기에 하나씩 나누었다. 딸내미가 빵을 입안 가득 우물거리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엄마. 병원에서 아빠를 왜 다른 이름으로 불러?”
나는 돈이 없어서 내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카페 운영이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해 볼 만하니까 촌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근처에 덜컥 새 카페가 들어선 것이었다.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으로서만 커피를 갈고, 내리고, 자리로 나르고, 설거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나는 다시 첫겨울과 다름없이 견뎌야 했다. 조금 잦아들었는가 싶더니 다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다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확신이 흔들렸던 것일까. 나는 화목난로 옆에서 그 흔들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존 스타인벡의 방대한 소설 《에덴의 동쪽》을 펴고 있었다.
“그는 바보였어요.” 케이트가 말했다. “난 그가 우리 집 문 앞에 와서 애걸하는 소리를 듣고 밤새도록 웃었어요.” ― 존 스타인벡 John Ernst Steinbeck,《에덴의 동쪽East of Eden》
전에 내가 군대 제대 1년 후 본가 마당의 눈을 쓸다가 문득 며칠 전 첫 밤을 가졌던 여자의 순결을 의심하면서 괴로워했다고 했다고 얘기했던 그 여자와 살았더라면, 살 수 있었더라도 나는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나는 감옥 생활을 하는 것처럼 그 책을 읽는 중에 쓰거나 그리운 옛 추억들을 곱씹고는 했다. 그러할 나이였다. 문인 협회 사무국장인 그 여자는 언제 한 번 더 왔다가 제 말대로 칸막이를 더 해놓지 않아서인지 발길을 끊었다. 지역 문인들이 찾게 하려 했던 애초의 도모도 영 틀어진 것 같았다.
알던 사람들도 여전히 오지 않았다. 아직도 한 번 와보지 않은 친구도 몇 있었다. 카페를 하니 사람들이 정리가 되었다. 어쩌면 그네들은 카페 문화를 모를 수도 있었다. 누가 거저 주는 커피나 커피믹스를 먹으면 되는데 아메리카노며 카페라테 등속을 턱없이 비싸게 받는 카페에 갈 이유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나도 예전에는 그랬으니까. 그렇다면 카페는 커피가 아니라 공간과 시간을 파는 곳임을 그네들은 모르는 것이다. 일반화하기는 싫으나, 내 경험으로는 카페 마당 바로 밑길로 지축을 울리면서 요란하게 지나다니는 대형 화물차들의 운전기사 같은 이들, 굴착기 등의 기사들, 남의 일 해주는 목수들, 전기나 용접 기술자들, 기름때 묻히는 일을 하는 사람들 대개가 카페 문화를 아예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시킨 일을 하고 내 돈을 받아가면서도 내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려 만드는 아메리카노를 믹스커피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고 거저 얻어먹기를 바랐다. 또, 여럿이 같이 와서 한 둘이 자기는 안 마시겠다는 부류도 있었다.
“안 드시는 분은 밖에 나가 계시면 됩니다.”
나는 물론 농담처럼 말했고, 그들은 웃었으나 내 진심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카페는 공간과 시간을 파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삶이 불행하다는 심정이 들 때, 화목난로 가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나하고는 다르게 일생을 엘리트 코스만 밟아오다가 이제는 남사스러운 존재가 된 한 기형적인 인간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이 나라의 대개 부모가 그렇게 키우고 싶은 출세하는 자녀의 전형이었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고등학교 때는 전교 학업성적 1, 2등을 다투는 모범생으로 이 나라 최고 학부의 법과대학과 동 대학원을 나오고 미국유학까지 가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아 모교의 교수를 하다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까지 되었는데, 그는 거기서 말았어야 했다.
‘나처럼 어디 촌구석에나 가서 카페나 하고 있지 뭔 그리 더 출세를 해보려다…….’
더 출세하려고 용을 안 썼으면 제 이름과 돈을 지켰을 것이련만, 그는 이제 제 식솔과 함께 범죄자로 떨어질 것이었다. 나는 그보다는 내가 나았다.
나는 예전과 같은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피고용인도 아니었기에 그러고 싶으면 쉴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나는 2주간 카페를 닫았다. 한겨울에 한 팔도 불편한 데다 위쪽에 들어선 그 카페 때문으로의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 작품을 이어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부터는 생각지도 못했던 끝 모를 거대한 암운이 덮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