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옛 사업이 속수무책으로 내리막길만 타고 있을 때 운명이라고 여긴 채 그저 그대로 있었다면 어찌 될 뻔했나, 하고 나는 가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그 작품을 완성하고 싶었는데 이미 늦어버렸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운동회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출발해서 뛰다가 이미 늦었다 싶으면 걷다시피 아예 느릿느릿하게 꼴등으로 들어갔었다. 힘을 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카페를 찾는 이가 드물다고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어찌 될 것인가, 하며 신경을 들볶고 있다가 자꾸 앞마당을 내다보게 되었다. 점심 먹기 전에 몇 잔 판 날은 그래도 나은데, 그 시간 동안 마수도 못하는 날이 많았다. 늦게 점심 끼니를 때우고 나면 이미 늦은지라 차가 올라오지 않았다. 네 시 반 전에 한 테이블은 예상했지만 역시 없어서 나는 또 실존주의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살다가 더 나이 들어 죽을 것인가, 나는 막막했다.
나는 승마장에서의 내 처지를 돌이켜 보았다. 승마장 역시 감옥에 다름 아니었다. 비 내리는 날은 더 지독했다. 마방을 치우고 있자면 마분의 악취가 더욱 풀풀 올라왔다. 나는 그렇게 마방에 갇힐 때는 〈El Condor Pasa〉의 판 플루트 연주곡을 휴대전화로 틀어놓았다. 비와 한기를 피할 수 있는 데라고는 말의 땀이 절어붙은 안장 보관실 겸의 컨테이너 박스 휴게실뿐이었고, 날씨로 인해 교습이 없어서 시간이 비더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잠깐 내 차에 들어가 앉아도 피로해서 책을 볼 수가 없었다. 승마는 귀족적인 스포츠이고, 승마장도 카페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분위기를 파는 곳인데 그처럼 구질구질하게 해 놓았던 것이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써가는 삶을 위해 여기로 들어온 것이건만…….
자유란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니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어느 죄수가 계호하는 교도관 없이 하루의 귀휴를 받았다. 그에게는 일정 지역 안을 맴돌면서 담배나 피울 수 있는 정도의 자유, 카페나 식당에 앉아있어도 될 정도의 자유뿐이 없다. 그는 어디 먼 곳으로 가서 숨을 생각도 하지 못한다. 버스나 기차 안도 갇혀 있기는 매한가지다. 중간에 내릴 수는 있겠지만 어디로 갈 것인가. 몸은 이상스럽게 납덩이처럼 무거워져서 잘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정신이 갇힌 이유다. 검문을 당할 테니 비행기나 배를 타고 도망칠 수도 없다. 즉, 그는 밖에 나와 있는 그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제는 그 같은 죄수 처지보다는 나았다.
카페는 오전 11시에 연다고 출입문 앞에 써 놓았으므로 나는 아내가 출근한 후에도 한숨 더 자거나 누워서 뒹굴뒹굴하며 휴대전화나 얇은 책을 빼내 보던가 하다가 10시쯤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승마장에서라면 마방마다 사료를 한 바가지씩 부은 다음 건초 한 덩어리씩을 넣어주고 마방을 일곱 개에서 여덟 개 정도 치우고 나면 9시쯤.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1차로 회원 두세 명의 교습을 마칠 시각이었다. 그때 대표가 오면 마방 두세 개를 남겼다고 한 소리 들어야 했다. 나는 차 시동을 걸고 혼자 말했다.
“나는 승마장에 간다. 열 시에.”
천천히 살아야 할 일이다. 카페에 도착하면 10시 반이나 40분쯤으로 승마장과 달리 일을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시작할 수가 있었다. 아직은 그 작품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지만,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한 상태로 이것저것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하루는 금방 저물어 금세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자연 속에 홀로 파묻혀 있는 것이 좋았다.
시내에서 큰 도로로 오다가 고속도로로 올라타기 전의 마지막 주유소가 있다. 두 동리 전인데, 항상 나는 그 앞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해서 굴다리 밑으로 가는 작은 길을 택해 카페로 왔다.
그런데 이러는 사람도 있었다.
“사장님은 이런 데서 어떻게 온종일 있어요? 외롭고 시간 엄청 안 가겠어요.”
아까의 그 굴다리 조금 못미처서 국립대학교가 있다. 그 학교의 어느 학부 교수 한 사람이 몇 차례 혼자서, 혹은 한두 명을 데리고 카페에 왔었다. 그 교수는 처음 왔을 때 이런 혼잣말을 했었다.
“요즘은 카페가 대세야!”
두세 번 더 온 다음에는 시내의 한 군데와 내 카페가 가장 낫다면서 이러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데를 왜 사람들이 안 오죠?”
그가 얼마 전은 일행 다섯과 같이 왔을 때였다. 오가는 말들을 듣자니 시내 구도심의 카페 골목길을 꾸미는 시의 지원 사업을 맡게 된 모양이었는데, 예전 공중전화 부스 같은 조형물을 대는 업자가 내게 하는 말이었다. 이 사람은 단지 시간을 때우려고 사는 걸까?
“자연 속이어서 그런지 혼자 있어도 좋고 생각하다 보면 하루가 짧아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녀야지 답답해서 이런 데 계속 못 있어…….”
나는 세상을 비켜있어서 좋기만 한데 그는 혼잣말처럼 또 이랬다. 세상은 더 무서운 것이다. 그는 생긴 것만큼이나 사람됨이 무척 가볍게 보였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은 것 같았는데, 그 나이쯤이면 이렇게 고즈넉한 곳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여 골똘히 사유해 보아야 할 때도 되지 않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그렇게 살아라. 그렇게 평생 길바닥이나 돌아치다가 죽어라.’
문제는 카페로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날의 매출 성적표가 괜찮았던 저녁에는 가슴이 차올랐고, 나빴던 날은 다음 날 아침까지 맥이 빠졌다. 안달을 해봐야 소용없는 일인 줄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알던 사람들은, 심지어 처제네마저 주말이 되어도 내 카페를 찾지 않았다.
그즈음 허우대만 멀끔하고 실제는 형편없는 자가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지며 그 정체가 드러나자 바깥세상은 매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자야말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출세지상주의가 낳은 희대의 괴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쪽 편 소설가들, 즉 무단 방북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7년을 복역한 황 모와 사회주의에 경도된 조 모, 소설은 안 쓰고 모 마이크로 블로그micro-blog 서비스로 수시로 장난질만 치는 이 모, 역시 같은 마이크로 블로그 서비스로 온갖 논란을 만들어내는 공 모 등―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면 되지 왜들 이럴까―이 그 괴물을 옹호하느라 물고 빨아대었다. 특히 공 모, 이 여자의 말이 가관이었다.
“나는 그를 지지한다. 적폐 청산 검찰개혁 절절했고 그걸 하겠다는 대통령님을 지지했으니까. 대통령님께서 그걸 함께할 사람으로 그가 적임자라 하시니까. 나는 대통령님께 이 모든 권리를 양도해 드렸고 그분이 나보다 그를 잘 아실 테니까.”
이런 자들이 소설가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하루 쉬어 갈게요.
나는 궁금해서 ‘친구’가 1000명이 넘는다는 위쪽 카페 딸의 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찾아보니 그렇게 해놓은 것이었다. 무슨 일로 하루 쉰다는 얘기인데, 그냥 쉰다고 하면 되지 가기는 뭘 가나. 어떻든, 내 카페의 형편은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에 부친이 현수막이라도 하라며 준 돈을 내가 잃어버렸다고 한 적이 있다. 몇 달 뒤 마음에 걸려서 돈을 만들어 카페 상호를 온통 영문으로 하여 현수막을 맞추었었다. 처음에는 올라오는 길의 석축에 박아 붙였었으나, 아랫길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을뿐더러 괜히 너저분해 말아두었었다. 오전에 카페에 와서 또 떼어가려면 떼어가던가, 하면서 사다리를 메고 내려가서 개업 현수막을 떼어갔던 그 자리에 걸고 올라왔다. 화장실 세면기에서 손을 씻는데 창문 너머로 저 아랫길에서 차 한 대가 멈칫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그 차는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붕, 소리를 울리며 카페 마당으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 차는 꽁무니에 차 세 대를 더 달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었다. 나는 그날부터 장사하는 맛이 어느 정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현수막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산 비탈길 위쪽에 카페가 있는 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이제 나는 돌아섰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돈이 들어가지 않을 방법을 강구했다. 한 친구가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해 놓으면 좋겠다고 할 때 나는 말했다.
“난 돈 드는 건 안 해!”
시간을 두고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돈을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저런 게 다 돈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돈 들인 것이 거의 없어.”
라는 말을 내가 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나는 앞마당에 들어찬 차 지붕들 너머로 물끄러미 고양이들의 무덤 쪽을 바라보고는 했다. 예전의 실속 없는 사업과 다르게 이제는 내가 번 것은 오로지 내 것이었다. 나 자신만 걱정하면 되었다. 나는 자유로웠다. 예전의 사업은 행복하지가 않았다.
‘내가 너희들한테 돈을 쓰느니 돈을 모으고, 내 가족들과 맛난 것 먹고 좋은 차를 타겠다.’
과거의 사람들 중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있지만, 어차피 오지 않을 터였다. 출퇴근과 애인과 데이트를 하라고 차를 쓰게 하고, 밥을 먹이고, 술을 사 주고, 옷과 신발까지 사 줬었는데……. 이제는 나를 못살게 굴지 못할 것이었다. 숲속은 평화로웠다. 나는 이렇게 평화롭게 숨어 있는 것과 이용객들에게 잠시나마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각종 고지서가 날아들 때 보면 세월 가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세 한 달씩 지나갔는데, 바깥세상은 이제 가관이었다. 인사청문회 보고서도 채택되지 못한 문제투성이의 그자를 고집불통의 대통령은 기어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을 강행했고, 한쪽은 그자를 지키겠다고 떼거리로 시위하며 길을 메웠고, 다른 쪽은 그자를 파면하라고 맞불 집회의 세를 과시했다. 나는 전문 시위꾼들을 제하더라도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이 의아했다. 역시나, 전술한 그쪽의 소설가 황 씨, 공 씨가 끼고 시인 안 모 씨를 비롯해 작가 1276명이 국회에서 그자를 지지하는 성명이라는 것을 발표하는 등 그자로 인해 나라가 쪼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저 북쪽까지 치면 이제 세쪽이 나는 판이었다.
바깥이야 어떻든 내 카페가 잘 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내 삶을 살고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내가 책임질 것이고, 그들이 책임질 것은 그들이 책임지는 것이 맞았다. 돌아보면, 잘 선택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자칫 잘못 선택했었더라면 경제적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몸까지 망쳐 폐인과 다름없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는지도 몰랐다.
내 주위에 1000만 원짜리 에스프레소 머신을 산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에스프레소 머신 등 장비는 글을 쓰기 위한 수단일 뿐으로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가 장비를 들여놓고 카페가 안 되면 어찌할 것인가. 카페를 연지 일 년이 지나서야 인터넷으로 샅샅이 훑어서 15만 원짜리 중고 테이블 냉동고를 들여놓았다. 조각 케이크와 아이스크림 등을 넣어두려면 어쩔 수 없었다. 원래는 한쪽은 냉장실, 다른 쪽은 냉동실인 냉동 냉장고―새 제품 가격은 100만 원이 넘었다―가 필요했으나 중고가도 50만 원에서 60만 원까지 했다. 표면이 여러 군데 조금씩 우그러졌으나 당장 쓰기로는 그 정도면 헐값이었다. 운송비 5만 원은 별도로 내야 했다. 이제 냉동고를 마련했으므로 메뉴에 아이스크림이 들어가는 아포가토와 냉동 과일을 쓰는 주스를 추가할 수 있었다.
나는 작업 도구가 필요할 때도 먼저 사지 않고 무조건 기다렸다. 한 번 쓰려고 비싼 도구를 사는가. 나는 다른 이에게 빌려 쓰고, 집의 것을 쓰고, 원래 있는 다른 도구를 응용했다. 무엇이든 천천히,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오늘 돈을 써도 사업은 잘 되니 내일도 잘 될 줄 알았었다. 아니었다.
지난여름에는 실로 대단한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신시가지 동네에서였는데, 원래는 작은 술집과 퓨전음식점들이었는데 폐업해서 공실들만 마주 보고 연이은 좁은 골목길에서 무언가 쓸만한 것을 버리고 가지 않았을까 하여 어슬렁거리던 참이었다. 건물 한 동의 뒤편으로 돌았더니 키 큰 공기 순환기가 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세워보니 허리 높이까지 왔다. 카페로 실어와 전원을 꽂고 다이얼을 돌리니 작동은 하는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구 흔들리는 것이었다. 예전에 몇 차례 거래해서 안면을 텄던 시내의 환풍기 가게에 가지고 갔더니 미국제라 자기는 못 고친다고 했다. 돌아가는데 왜 못 고치나? 아무래도 이상해서 안전망 속을 자세히 보았더니 날개 세 개 중 하나가 반쯤 부러져 나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균형이 맞지 않아 떨리고 소음이 심했나 싶어 날개만 바꾸면 될 것 같았다. 미국제라고 그랬지? 나는 다시 카페로 가져와서 인터넷에 몇 개의 검색어를 넣어보았더니 공기 순환기, 그러니까 에어 서큘레이터를 제일 처음에 만든 회사의 제품으로 새것이 24만 원에서 27만 원까지 했다. 인터넷으로 국내 수입원을 찾아내서 날개를 시켜 끼웠더니 조용하게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송풍 거리가 30.5m에 달한다고 했다.
필시 젊은 녀석들이었다. 내게는 고마운 일이나,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을 못 쓰는 선풍기처럼 던져놓고 떠난 것이었다. 그들이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다시 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삶의 태도로는 어찌 될 것인가. 아무튼, 이제 오는 겨울은 지난겨울처럼 추워서 고생하며 지내지 않아도 될 터였다. 나는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했다.
카페 앞마당은 간혹가다 만차가 되었다. 여덟 명씩의 단체 이용객이 두 차례 왔고, 반납대에 머그잔이 겹으로 쌓였던 날이었다. 차는 제2 주차장에 세워놓았는지 위쪽 카페 여자―그러니까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님이 엄청 많았나 봐요. 이 설거짓거리 좀 봐. 내가 좀 도와줄게요. 항상 준비해 놓으셔야지……”
그녀는 메뉴를 만드는 내 뒤에서 머그잔들을 씻었다. 심성은 나쁘지 않은 여자였다. 나는 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고 조금 서글퍼졌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이기는 것이 중요했다. 내 카페가 이용객으로 차면 그녀의 카페에는 없을 터였다. 내가 말했다.
“바쁘시지 않아요? 이렇게 오셔서 날 다 도와주시고.”
“요새 손님 없어요. 어휴! 현수막이라도 붙이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말도 안 듣고. 에스앤에스 친구 그렇게 많으면 뭐해요.”
그녀가 푸념했다.
아직도 한 달 매출액이 승마장 일 다닐 때의 월급도 안 되는데도, 그녀가 그러고 간 얼마 뒤 그 가게를 내놓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리고 결국 문제 많은 그자는 35일 만에 법무부 장관을 사퇴했다. 그러길래 대통령은 그런 자를 왜 장관을 시켜서 그 난리를 만들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