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나는 쉬는 동안 결국 내 소설을 쓰지 못했다. 헤아려 보자니 카페를 만들기부터 시작하면서부터 1년 하고도 9개월이 넘게 덮어두었었고, 이제는 이야기의 맥과 주요 인물들의 감정선이 끊어진 터였다. 장편 소설에 대해 혹자는 ‘작품을 시작했을 때에 축적되어 있던 기량만큼만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에 막혀버리면 이어나가기 힘들고, 심지어는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것보다도 나는 마음이 불편해서 그 소설을 붙들 수 없었다.
나는 왜 이 지방 소도시를 떠나지 못했던가. 서울은 싫었고, 내 사업을 크게 하려고 다른 큰 도시로 사업장을 옮길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었다. 서른 후반쯤 내 사업의 홍보차 열게 된 세미나로 미국에 갔을 때는 세계적으로 크기 위해 차라리 그 나라에서 살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사업이 커지지를 않아도 좀체 이 조그만 도시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 지역 곳곳에 내 청춘의, 내 지나온 인생의 추억이 묻어 있었고 길마다 깔려있었다. 유배 가듯 굳이 추억도 없는 멀리로 떠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나는 이 땅을 지키고 있고 싶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성공을 위해 내가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이처럼 한 외진 산속에 틀어박히게 된 것이었다.
‘나처럼 일생의 사업이 망해 보라. 나처럼 돈을 벌기 위해 아무것이나 하겠다는 처지가 되어 보라.’
이런 심정으로 시작했던 것이련만…….
쉬는 동안의 어느 날 이르게 눈이 떠져서 나는 옆 동네까지 가 보았다. 사람 없는 길에 서서 수년 전에 폐업한 한 작은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이 지역에서도 내 지난날의 문학적 유적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2층은 내가 20대부터 30 초반까지 잘 가던 목욕탕이었었다. 목욕탕으로 통하는 계단은 막아놓았기에 호텔 출입문 쪽으로 가 보았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깨진 커피잔이며 이런저런 기물들이 로비 바닥에 나뒹굴어 있는 인적 없는 요금소 앞에 서 있자니 나는 묘하게 어떤 서러움이 올라왔다. 역시 전기가 끊겨 승강기가 동작하지 않았다. 나는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갔다. 긴 복도 양쪽으로 객실 문이 몇 개 열려있었다. 원래는 하얀 시트로 씌워졌음 직한 침대는 전체가 잿빛 먼지로 덮여있었지만, 어느 노숙자가 숨어서 겨울을 난다면 최소한 얼어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때도 하얀 겨울이었다. 3층이었던 것은 확실했으나, 내가 한 여자와 어느 방에서 묵었었는지는 기억을 되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한 객실로 들어섰다. 조그만 창문을 통해서 미미한 아침 일광이 비스듬히 새어들고 있었다. 나는 원목의 둥근 차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1인용 소파 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 세로줄 무늬였다. 나는 뭉클한 감흥에 젖었다. 이렇게라도 남아있어 주다니 무척 반가웠다. 나는 추억을 옮겨놓기로 마음먹었다. 내 카페 한쪽에 그 추억을 구현해 놓을 것이었다. 벽의 키 높이쯤에는 특이해서 기억이 생생한 그 벽붙이등도 그대로였다. 그것도 새로 자리 잡을 그 추억의 자리에 필요했다. 나는 그다음 날 새벽같이 벽붙이등 하나를 떼고 그중 깨끗한 가구로 골라 이동시켰다. 나는 한쪽 앞발을 잃은 늑대처럼 움직였다.
내 건물 아래로 찾아오는 2행정 기관 언더본 오토바이 특유의 굉음과 진동 때문에 나는 책도 편안히 읽고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돈 없이는 집에서 쉴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차를 가지고 나가야 했다. 도내에서 제일 가까운 시는 예전에는 큰 고개를 넘어가야 했었다. 이제는 아래쪽으로 평탄하고 큰 도로가 똑바로 뚫려 그 고개를 넘는 차들은 거의 없었다. 고갯마루를 조금 넘어가 보니 길가에 잘라 쌓은 마른 통나무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차에서 내려보니 그 뒤쪽은 간판은 달고 있었지만, 문을 닫은 지 오래인 듯한 식당이었다. 산 아래로 큰길이 나는 바람에 역시 망한 것이었다. 나는 길고 높게 쌓인 그 땔나무 더미가 탐이 났으나, 혼자 팔 하나로 몇 번씩 실어 나를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쪽 팔만으로는 도끼질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너무 멀어서 채산성이 없었다.
한 날은 굽이굽이 도는 강변길을 타고 그 길이 끝나는 막다른 촌락까지 가 보았다. 몇 해 전까지 그 동네 초입에 카페 겸 레스토랑이 하나 있던 것이 기억났으나, 휴대전화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꽤 전에 폐업한 것 같았다. 굽이굽이 돌아서 그 먼 막바지까지 찾아가 사진이며 이용 후기를 올리던 사람들이 발길을 끊었던 탓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멀리 사는 오랜 친구가 내 집 행사에 다니러 와서 하룻밤 묵었을 때 드라이브 삼아 그 강변길로 해서 물속으로 다리를 박고 나무 덱을 깐 그 카페의 테라스 자리에서 두어 번 커피를 마셨었다. 본디 잔디를 깔았던 마당은 잡초가 무릎 높이로 무성했다. 출입문을 밀어보았더니 잠겨있지 않았다. 출입문 바로 안쪽 옆의 카운터 테이블에는 에스프레소 머신과 커피 원두 그라인더가 고스란히 있었다. 내가 진작 그 카페를 가 보았더라면 아예 돈 한 푼 없이 카페를 차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그곳은 너무 멀었다. 한 번이면 몰라도 바쁜 사람들이 구불구불한 강변길로 30, 40분을 가서 커피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기에는 접근성이 너무 떨어졌던 것이다.
나는 그 건물 외벽에 붙여 망에 담긴 참나무 장작이 꽤 많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아두었다. 내 카페는 땔 수 있는 것은 다 땠고, 그 정도면 잘하면 남은 겨울을 날 수도 있을 듯했다. 나는 그날 밤늦게 계속 굽이지는 그 길을 다시 가야 했다. 입구를 쇠사슬로 쳐 놓은 마당을 장작 한 망씩을 들고 가로지르는데 개들이 멀리서 짖었다. 원체 집 몇 채 되지 않는 고요한 촌락이었던 탓이리라. 나는 한참씩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의 그 사내처럼 다시 움직였다. 아직 망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따지고 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범죄와 다름없을 터였다.
내 삶은 다시 위태위태해졌다. 그래도 카페를 차리기는 쉽다. 문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데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에 음료와 함께 내주는 비스킷을 사러 며칠마다 1000원숍에 들렀고, 그 길의 호프집을 지날 때마다 입을 앙다물었다. 모든 것은 선택이다. 나는 그 호프집을 여러 번 가서 팔아주었는데, 중학교 동기인 그 집 주인은 여태 내 카페에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곳이 한 군데 더 있는데, 이번에는 고등학교 동기가 하는 데로 내 집 근처의 그 6층짜리 목욕탕 앞 큰길 건너 맞은편 자기 건물 2층에서 돈가스와 술도 파는 카페였다. 내가 거기서 몇 차례나 술을 사 마셨고 내가 카페를 한다는 것을 아는 터인데도 역시 내 카페는 한차례도 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인간은 한순간 선택을 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원망의 마음만 생기는 것인가. 아무튼, 그 두 집을 내가 갈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넋 놓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카페에 오로지 커피 등 음료를 사 마시러 오는 것이 아니다. 커피나 음료의 맛은 어디나 거기서 거기다. 앉아있는 그 공간이 어떠한지가 관건이다. 비싼 커피값을 내면서 꼭 그 카페에 가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 공간을 어떻게 해 놓느냐가 중요했다. 나는 지난 동안은 망하면 다 내다 버려도 좋은 것들로만 늘어놓고 세상을 조소했으나, 이제 어떻게 하면 위쪽에 새로 생긴 그 카페보다 더 낫게 꾸며 놓을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카페라는 공간은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재미있게 해 놓은 카페는 보지 못했다. 나는 유명한 소설가나 시인들의 서재 사진을 실은 책들을 넘기면서, 소품들을 더 구했다. 서재보다 재미있는 곳은 없는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 카페 앞마당까지 올라왔다가 곧바로 돌려 내려가는 차들이 늘어났다. 위쪽의 그 카페로 가는 중이었거나 갔다 오다가 아랫길의 현수막을 보고 궁금해서 들러보는 것 같았다. 무서우면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처럼 되지 않으려고 나는 차를 몰고 그 카페 상황을 ‘정찰’하러 갔고, 지나치면서 두 눈으로 역력하게 관찰했다. 1층의 주차장도 모자라 도로변까지 차들이 길게 대어져 있었는데, 조금 전에 내 카페 앞마당에서 돌려 나간 차들도 끼어 있었다.
월요일은 그 카페가 쉬는 날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그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 마시며 말을 붙였었으므로 쉬는 날인지 모르고 찾아갔던 차들이 산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 내 카페로 대신 오도록, 양해를 구하고 그 카페의 출입문 계단 아래쪽에 내 카페의 위치 안내판을 갖다 놓을까 고민해 보았지만 구차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것이 퍼졌다.
국내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이른바 '우한 폐렴' 확진자가 나왔다. 질병관리본부는 1월 19일 중국 우한시에서 입국한 중국 국적의 35세 여성(중국 우한시 거주)에 대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검사를 시행한 결과, 20일 오전 확진자로 확정됐다고 밝혔다. ― 〈○○신문〉
그것의 확진자가 다녀갔다고 알려지면 그 영업장은 문을 닫아야 했다. 내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 카페에 들러보았더니 그 여자는 벌써 하얀 보건용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카페 여자가 대답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카페 문 걸어 잠그고 이 동네 카페 발전 협의회의 대책 모색 겸 어디로 같이 여행이나 갔다 옵시다.”
내가 농을 쳤더니 여자는 마스크 너머에서 웃었다. 그 카페는 바로 이튿날부터 문을 닫았다. 그 여자는 별 고생 없이 살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속으로 우스갯소리를 했다.
‘코로나에 죽으나, 굶어 죽으나…….’
갑자기 내 카페 앞마당에 차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여기 말고는 웬만한 데는 다 영업을 안 해서 갈 데가 없네요.”
어린아이와 처를 동반한 젊고 퉁퉁한 아빠가 주문하면서 내게 말했다. 내 카페에는 그렇게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젊은 부부나 골프 때문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삼십 대가 많아졌는데, 필시 위 카페를 갔다가 문이 닫혀 이 산속으로 온 것이었다. 매장 안의 테이블이 거의 다 찰 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 생긴 그 카페가 모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고 해서 내 카페에 악영향만 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런 젊은 사람들이 숨어있는 내 카페에 올 일이 없을 터였다. 위쪽의 그 카페는 2주 조금 넘어서 화요일부터 다시 문을 열었지만, 내 카페의 그달 매출이 전년 가을만큼 회복된 것은 요행한 일이었다.
*미국의 작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 2007년 픽션 부문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작가가 자신의 어린 아들과 자기가 황량한 세상에 남겨진다는 가정하에 아들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이 작품은 2009년 할리우드에서 재난 영화로 만들어졌다.
〈재앙은 공평하다Ⅱ〉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