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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욱래 Aug 09. 2024

22. 좌판

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22. 좌판



  나는 이번 장을 시작하기 전에, 바로 전 장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그 막돼먹은 여자의 이야기를 붙일까 말까, 며칠 고민했다는 것을 먼저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미래는 알 수 없기에 혹여 나중에 그 여자가 더 상위의 권력을 쥐게 된 들 나를 어찌할 텐가. 어차피 소설인데.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나지는 않으나, 내 위쪽 앞니 하나가 나날이 미세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그 이 하나만 길쭉하게 늘어져서 보기가 싫었는데, 실내 마스크 착용이 의무가 되어 내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몇 달 전 쉬는 어느 날이었다. 시내 어느 맛없는 순두부찌개 집에서 혼자 점심으로 그 찌개를 시켜서 길게 빠져 내린 그 이에 음식물이 스치지 않게 하려고 애쓰며 넘기고 있는데, 그 이가 아직 매달려 있는 잇몸 쪽이 너무나 아파서 숟가락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를 잡아보니 앞뒤로 점점 더 크게 흔들거리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빙빙 돌아가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죄를 저질러서 감옥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보다 나는 돈이 없을 때가 더 두려웠다. 움직이기 시작해야 할 오전이 특히 그러했는데, 욕실에서 준비할 적에 근심 속에서―손가락 하나가 정상이 아닌 탓도 있었겠지만―어떤 물건을 들어도 손에 제대로 쥔 것 같지를 않았다. 집이나 카페의 전기 요금 납기 일자, 휴대전화―고정비를 줄이려고 카페에 애초 유선 전화를 놓지 않았기에 이용객의 연락을 받으려면 없앨 수가 없었다―요금 납부일, 3개월분의 자동차 보험 만기일 등등이 줄을 섰고 나갈 돈을 또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크고 근원적인 걱정이 언제나 내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나는 이제 공치는 날은 없었으나, 벌고 또 벌어도 예전보다는 어느 정도 나아질 뿐, 그 2000만 원을 모으기는 고사하고 연체된 세금 정도도 만들기 요원했다. 세금이란 절대로 사면되지 않는 범죄 전과처럼 남는 것이었다. 

  무슨 가는 줄이 톡, 끊어지는 것 같더니 금방 아주 시원해졌고 손가락 사이에 집힌 그 이를 내가 내려다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이를 냅킨으로 닦아서 한참 더 내려다보았다. 치약이나 전구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그 종말이 있게끔 되어있다. 이가 빈틈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발음이 샐 테지만, 승마장에서 마방 치울 때 마스크를 계속 썼더니 이제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았고 흉한 모양도 가릴 겸 나는 더 나았다. 세상의 대부분은 돈 문제였다. 돈이 있으면 무엇을 못하겠나. 치아는 어차피 건강보험 처리가 안 되기에 나중에 돈이 생기면 어떻게 해 넣을지라도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여보! 아들 라테 그림 만드는 것 좀 가르쳐 줘요. 손님들이 짜증 낸대잖아.”

  아내가 몇 차례 이렇게 말했으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아들이 혼자 일하는 날은  ‘지금 바리스타님이 자리에 안 계셔서’ 따듯한 라테는 안 된다고 하라고 일러두었었다. 그래도 제 딴에는 자꾸 그 말을 하려니 창피한 모양이었다. 

  “글쎄,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자기가 절실해서 달려들어야만 가능한 거라니까.” 

  내가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아내는 아무래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못하면 아예 안 하는 것이 더 나았다. 이용객이 그림이 엉망인 라테를 앞에 두어서는 여태껏 그 고생을 해서 그나마 쌓은 평판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점심을 먹기 전에 한 잔이라도 팔면 일단 그날은 공을 안 쳤다는 안심이 되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점심 전에 일곱 잔 넘게 파는 적이 많아지더니, 1인 1차라도 이제는 앞마당에 빈틈없이 들어차면서 일급으로 계산하면 승마장 이상 올리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끔 되었다. 

  하루 매출에서 재료비와 이것저것 다 빼고 계산하고, 낮잠까지 자면서도 막노동판의 잡부 일당보다는 나은 적이 더 많아졌으며 목수 일당까지 넘긴 날도 있었다. 그런 일은 기상 등의 사유로 나가지 못하는 날이 꽤 되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이제 어느 정도 피곤하면 잇몸이 들떠 욱신거려서 험한 일은 못 할 것 같았다. 

  “이 없는 거 영 보기 안 좋아."

  오랜만에 가진 술자리에서 그 친구가 말했다. 나는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 나처럼 노가다 뛰는 게 낫겠다.”

  그는 내가 여태까지 힘든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내가 답했다.

  “노가다보다는 더 나아.”

  일순 그의 안색은 굳어졌다. 그가 얼굴을 푼 뒤 말했다.

  “그래? 그럼 룸살롱 가야겠잖아?”

  룸살롱! 커피 팔아서 미쳤다고 그런 업소들을 다닌단 말인가. 아무래도 제정신 같지 않은 말이었다. 그렇게 당하면서도 왜 돈을 그렇게 업수이 여기는지.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정녕 모르는 것일까. 

  젊었을 때. 그때는 돈이 있었고, 그런 데 갔었을 때는 그러나 일이 괴로웠던 듯했다. 사람들을 이끌고 해야 하는 일.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맞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그 일만은 당면하고 싶지 않았으나, 또다시 한걱정을 해야만 하는 시기는 돌아오고야 말았다. 옷도 안 사 입고, 바깥에서 술도 안 사 먹고, 필요한 것도 1000원숍에 가서 1000원짜리를 사도, 8년 동안 나는 그 돈을 메꾸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 건물의 2층은 살림집으로 원래 보증금 3천500만 원에 월 임차료 20만 원의 세를 주고 있었다. 살던 여자가 나간다고 했고, 당장 너무나 곤궁했었기에 5천500만 원의 전세로 돌렸던 것이었다. 그래서 2000만 원의 빚을 졌고, 그 돈이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1장에서 전술했다. 그렇다. 나는 그 2000만 원 때문에 두려웠다. 전 세계적인 그 바이러스 감염증 시국으로 남들이야 어떻든, 지키지는 못할망정 곶감 빼 먹듯 하나씩 빼 먹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여, 독자 여러분 중에는 2000만 원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적은 돈이라고 할 수도 있다. 너무 큰 것은 운명이라고 포기해버리면 되나, 작은 것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되지를 않아서 이제 나는 큰 것보다는 작은 것에 겁이 난다. 그렇다. 겨우 국산 ‘준중형’ 새 승용차 한 대 사기에도 부족한 돈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서는 내가 20대에 생애 첫 승용차로 장만했던 등급의 차 한 대도 새로 살 능력이 안 되는 것이다. 할부로든 단번에든 이제 나는 그런 새 차를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보였다. 

  2층의 젊은 부부가 나간다고 초여름에 말했기에 나는 공인중개사 사무소 여러 군데에 알려 놓았었다. 그네들은 계약 만료 일자 두 달 여전에 이사해 나가면서,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짐을 깨끗하게 다 안 빼고 큰 트렁크 하나를 덜렁 남겨놓은 것이었다. 

  이제 그 날짜는 다 되어가는데 그동안 두어 차례 역시 그냥 보고만 간 이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거실이 넓고 방도 세 개지만, 처음에 지을 때 사무실 용도였던 층이라 욕실 겸 화장실이 하나뿐이고 작은 것은 여건이 불리했다. 그것도 세탁기를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조그마했다. 요즘은 욕실부터 번듯한지 따지는지라 돈이 모자라도 토지주택공사의 전세 임대를 신청해서 넓고 좋은 집으로 일단 들어가고 보는 세태였다. 비슷한 넓이의 근방 지역의 아파트 전세보증금은 내 건물 2층의 3배가량, 그러니까 1억 5000만 원 정도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하루하루 속이 타들어 가면서도 점점 닥쳐오는 그 날짜를 무력하게 맞고 있었을 뿐, 다른 수가 없었다. 그날을 일주일 앞두고 2층 남자가 내용 증명 우편을 보내왔다. 나는 일단 그것을 꼼꼼히 읽었다. 인접한 도시의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잔금을 지급해야 하므로 그 날짜까지 정확히 임대보증금 전액을 입금하라면서, 아니면 자기가 계약 불이행으로 아파트 측으로부터 연체료 납부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며 나를 조였다. 그것은 제 사정이라 내 알 바 아니었고, 제 계좌번호 밑으로는 임대보증금 미반환 시 연체료는 그 전액에 연 18%의 연체 요율을 적용하여 청구하겠다는 말을 덧붙여놓았다.

  그따위로 내용 증명 우편을 보내오는 바람에 나는 오히려 유리해졌다. 그네들은 처음 1기 2년의 주택 임차계약 기간이 끝나고 묵시적 갱신(주택 임대차보호법 제6조 : 자연 연장 2년)이 되어 2층을 사용했는데, 그 갱신 후 해지권 통지 시 그 통지로부터 3개월 후부터 임대보증금 반환 청구가 가능하므로 나는 그만큼 시간을 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네들에게도 일정 정도는 귀책이 있었다. 가장 보기 안 좋은 것은 방문들로 너무 오래되어 필름이 떨어져서 군데군데 찢겨나가 있었다. 그네들이 아직 있을 때 집을 보러 온다는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카페를 쉬는 날 방문들의 필름을 아예 다 뜯고 페인트칠을 하고 욕실과 주방 싱크대도 닦아 놓고 전등 스위치며 이것저것 보수해 보려고 하루 낮 동안만 비우게끔 양해를 구했으나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지저분한 집을 보고 간 이의 소식은 없었다.   

  ‘처음의 구두 전달은 증거가 없다. 3개월 동안이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너도 내가 피를 말리리라…….’




  라테아트를 가르쳐 주지 못했는데 내 아들은 마스크를 쓴 채 군에 입대했다. 아내 혼자서 아들을 데려다주고 나는 그날도 카페를 열었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실존주의를 시작했다.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2층으로 내려가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혼자 하다가 카페로 갔다. 피곤했다. 피곤한 인생이었다. 무엇 때문에 3층에서 물이 타고 내려가 안방 천장이 내려앉은 부분이 있었다. 나는 석고보드를 사 와서 혼자 안방 천장 전부를 갈았다. 다음으로는 방 두 개의 천장과 방문들을 페인트로 도색하고, 인터넷으로 미리 시켜놓았던 타일 페인트로 욕실 바닥을 칠하고, 안방의 천장 직부등을 보기 좋은 것―이것도 인터넷으로 미리 준비했는데 보기보다 쌌다―교체하고, 전등 스위치들을 갈고, 주방 후드에 절어 붙은 기름을 닦아냈다. 어느 하나도 노력 없이는 되는 것이 없었다. 모든 작업을 나 혼자서 했기 때문에 비용은 얼마 들지 않았다.   

  공인중개사 사무소들은 여전히 연락이 뜸했다. 외국에 있다가 온 한 친구가 자기네 셋집도 그것으로 구했다며 ‘당장 마켓’이라는 온라인 중고 직거래 플랫폼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 시작은 이러했다. 그 플랫폼에 돈을 보내면 그 금액만큼 맨 위에서 네 번째쯤 매물을 계속 띄워주는 방식이었다. 가격이 싸서 그런지 조회 수는 많이 쌓였으나, 보러 오겠다고 문자를 보내는 이는 드물었다. 나는 사람 없는 매장의 화목 난롯가 흔들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하루마다 애를 태웠다. 드디어 어느 여자 혼자 왔는데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자꾸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여기 작은방에 이건 또 뭔가요?”

  굴뚝이 없어 실제로 불을 지필 수 있지는 않고 애초에 그 분위기만 내려고 만들었을 붉은 벽돌을 쌓은 벽난로였다. 나는 인테리어로 해 놓은 벽난로라고 알려주었다. 그 여자는 아휴, 아휴, 하면서 연거푸 한숨만 쉬었다. 돈이 얼마 없어서 이런 집을 보러 온 것이 아닌가. 아니면 아예 신축 아파트로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왜 남의 집을 둘러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나. 나는 그 여자의 등짝에다 대고 뭐라고 한마디 해주려다가 꾹 참았으나 나중까지 분이 가시지 않았다. 

  말 나온 김에 이상한 여자들 얘기를 마저 꺼내야겠다. 다른 사람 지나가지도 못하게 대형마트의 무빙워크 한복판에 딱 버티고 서있는 배짱 좋은 아낙들―젊은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 없는 경우가 드물다―이며, 바로 옆이 계단이고 맨손인데도 조금이라도 덜 걸으려고 2층에서 승강기를 잡아 1층에서 내리는 밉상 맞은 여자들. 이런 여자도 있었다. 검투사 처지였던 그 승마장의 실내 마장 앞이었다. 분명 낯이 익어서 여기서 뵙네요, 하면서 내가 반갑게 인사를 했더니 나를 몰라보는 것 같았다. 

  “김 영양교사님 맞으시죠? 백 부장이에요.”

  ‘부장’은 내가 그전에 다른 회사에서 시간제로 1톤 냉동 탑차를 몰 적에 그 나이에도 미혼이었던 그녀가 임의로 내게 붙인 직함이었다. 그녀는 배송 기사들 사이에서 마귀할멈으로 통했지만, 나는 그녀가 식자재를 다시 가져오라면 군말 없이 몇 번이고 새로 갖다 주었기에 나와 마찰은 없었다. 그 근래에 정년퇴직했다던가 하는 그녀는―이제 시간이 남는 모양이었다―분명히 나를 기억하련만 일부러 모르는 체하는 태도가 눈에 보였다. 원장이 그녀를 나한테 맡겼다.

  “팔을 니은 자로 하세요.” 

  그녀가 볼썽사납게 팔을 쭉 펴고 말고삐를 쥐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번에는 팔을 직각으로 만들었다.

  “너무 접었어요. 팔꿈치를 조금만 펴세요.”

  “니은 자가 구십도 맞잖아요.”

  그녀가 말 위에서 대꾸했다. 그때부터 알아보았어야 했다. 다른 여자 회원이 말을 끌고 실내 마장 출입문을 열었다.

  “문 닫아요!”

  마귀할멈처럼 눈꼬리가 쭉 찢어진 그 여자가 말 위에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는 누구한테 문을 닫으라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빨리 문 닫으라고요!”

  그녀는 다시 소리쳤다. 말을 끌고 들어오려던 회원이 깜짝 놀라서 출입문을 닫으려고 해서 내가 그냥 두라고 했다.

  “아니, 왜 문을 못 닫게 하는 거예요?"

  그녀는 온몸이 부아만으로 꽉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말이 뺑뺑이만 똑같이 도는 놀이 기구란 말인가. 그러려면 왜 말을 타는가. 게다가 정 출입문을 닫고 싶으면 제가 말에서 내려서 닫으면 될 것이 아닌가. 누구한테 문을 닫아라, 마라, 한단 말인가. 내가 일러주었다.

  “회원님. 문이 열려있든 닫혀있든 관계없어요. 문 전서부터 부조를 더 강하게 써서 보내세요. 그게 승마예요.”

  그녀는 말을 딱 세우더니 씩씩대며 뛰어내렸다. 

  “에이, 성질나서 못 하겠네. 나 말 안 타.”


  4. 마장 내 승마 시 교관의 지시에 순응하여야 한다.


  그녀는 실내 마장 앞에 높다랗게 서 있는 안전 수칙도 읽어보지 않은 것 같았다. 성질 더러운 그녀는 그대로 승마장을 그만두면서 원장에게 들렸던 것 같았다. 얼마 뒤 원장이 오더니 내게 말했다.

  “말 타는 여자를 우습게 본다고 그러데요. 아니, 말 타는 여자가 그렇게 대단하면 말 타는 거 가르치는 우리는? 참, 나…….”

  그 얘기가 대표에게 안 들어갔을 리가 없었다. 100가지를 잘 해도 한 가지를 잘못하면 대표가 나를 좋게 볼 리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승마장 역시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당장 마켓’에 넣었던 돈이 다 쓰였고 나는 다시 일주일 분을 넣어야 했다. 두서너 명 와서 보고만 갔다. 나는 집이 나갈 때까지 매일 가격을 올리겠다고 게시글을 수정했다. 광고를 본 날 오지 않으면 100만 원 단위로 손해가 되게끔 날마다 실제로 100만 원씩 올렸다. 한동안 그러다가 그 플랫폼에 이런 문자가 왔다.

  ‘얼마큼까지 오를지 궁금한데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시세와 맞을 때까지요.’

  나는 서너 번이나 그 플랫폼에 돈을 보냈지만, 결국 다 헛일이었다. 카페는 그 전염병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2단계로 격상해 매장 내 취식이 금지되어 오는 이용객도 없는데 큰일이었다. 한겨울에 누가 테이크아웃을 하려고 일부러 멀리, 그것도 산속까지 찾겠는가. 




  카페 매출은 처참했다. 바깥은 점점 지옥처럼 되어갔다. 나는 가을에 한 트럭 들여놓은 참나무 통나무를 자르고 쪼개서 하릴없이 화목난로만 때고 있었다. 2층은 여간해서는 나가지를 않았다.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 8년 전쯤 사업을 망해 먹고 일전 한 푼 없었을 때, 길거리에 좌판을 깔고 여러 가지 내 물품들을 팔고 앉아있어 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지금껏 없었던 온갖 재미있는 경험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시도할 만큼 그때의 나는 정신의 자유가 없었다.

  맨 처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내는 나보다 먼저 그 ‘당장 마켓’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달았던지 1년여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3층 욕실 벽의 전기온수기가 맨 밑부분이 벌겋게 부식되어 물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애초의 대리점에 수리를 의뢰했더니 부식은 수리 불가능하다며 새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뭔가 당한 심정이었다. 아내는 같은 용량의 중고 전기온수기를 ‘당장 마켓’으로 사 놓았다며 싣고 오자고 했다. 내가 들고 올라와서 살펴보자니 벽에 박으려면 꺾쇠가 필요했다. 그 회사에 전화해 돈을 얼마 부쳐서 꺾쇠를 받아놓은 다음 사람을 불렀다. 온 사람은 그 작업에 30만 원을 불렀다. 

  “새로 바꾸면 설치비 포함이니까 원래 대리점에서 시키는 게 훨씬 싸겠다.”

  내가 돈을 대기로 하고 아내에게 말했다. 카페 수입은 처참할 정도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아내가 4만 원 주고 산 덩치 큰 애물단지를 치워버리는 일이 남은 것이었다. 사 왔던 금액만 받자니 뭔가 억울한 점이 있었다. 나는 꺾쇠 대금과 배송비, 애초 아내와 가서 실어 온 운송비며 계단으로 들어 올린 내 인건비를 포함해서 6만 원에 올려놓았다. 추워서 급했는지 바로 사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 봐라? 나는 아내에게 그 6만 원을 줄 수가 있었다. 우선 ‘당장 마켓’에 2층 전세 광고로 버린 돈이 속 쓰렸다. 나는 갖가지 물건들을 ‘발굴’해서 깨끗이 닦으며 흠이 없나 확인하고 거기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아주 예전에 내 사무실에서 남생이를 키웠던 작은 어항, 부탄가스를 쓰는 야외용의 소형 바비큐 그릴, 외국 여행 중에 샀던 관광기념품이나 장식품 같은 것들로 끊임없이 나왔다. 남들은 내 물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내게는 이미 그 소용을 마쳤는데, 남들은 그것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그런데, 내어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든 팔리는 것이었다. 그냥 둔다면 아무 쓸모없이 언제까지고 집안만 어지럽힐 텐데 팔아 치우니 돈이 되었다. 나는 ‘당장 마켓’으로 날린 돈을 회수하려 했다.

  ‘당장 마켓에서 넘어졌으니 당장 마켓에서 일어나겠다.’ 

  거기에서 팔 물건들을 찾아내면서 지난날 쓸데없는 것들을 터무니없게 많이 샀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자기의 가구가 거지 같은 빈 상자들의 모습으로 수레에 실려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대낮에 시골길 위를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철인 말고는 누가 있겠는가? 흠, 저게 바로 스폴딩 씨네 가구구먼! 이삿짐만 보아서는 그게 소위 부자라는 사람의 것인지 또는 가난한 사람의 것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주인은 항상 가난에 찌든 사람 같았다. 사실 말이지 그런 가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더 가난한 법이다. 그런 이삿짐 하나는 판잣집 열 채에 들어있던 것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한 채의 판잣집이 가난의 상징이라면 이것은 열 배나 더 가난한 모습인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숲속의 생활》 


  그즈음 그 중고거래 플랫폼에는 유명한 모 리듬체조선수의 이름을 붙인 자세교정 의자와 모 적외선 전기 그릴들이 허다하게 올라왔다. 텔레비전 광고와 홈쇼핑을 보고 좋다고 너도나도 사들여놓고 보았는데, 의자는 불편하고 그 그릴은 굽고 익히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터라 다 내놓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왜 함부로 사서 거의 새 제품을, 의자는 반값에 전기 그릴은 거의 10분의 1 가격으로 처분하는 식으로 터무니없는 손해를 보는가. 

  내가 커피만 팔라는 법은 없었다. 매장 내 영업금지라 팔지를 못하면 다른 것을 팔아도 그만이었다. 예약되면 저녁에 내 집 앞에서 거래했고, 어차피 버려도 될 것들이라 다음날에 그 전날의 카페 매출로 잡았다. 그러다가 그 플랫폼이 아니고 다른 경로로 내 집 2층이 재계약되었다. 




다음 주는 휴가(8.11~8.17)로 연재를 쉽니다. 뜨거운 여름, 건강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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