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현장소설 《카페 가는 길》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간소하게 살겠다고 나는 때마다 생각했다. 간혹, 조각 케이크 말고 음료와 곁들일 다른 먹을거리를 찾는 이용객들이 있었다. 나는 에이드용 과일 청이나 빵 같은 것은 여하간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때는 어떤 업소에서 엄청나게 나간다는 찐빵 만드는 공정이며 하루에 백 개, 천 개씩 판다는 토스트를 길거리의 철판 위에서 계속 만들어내는 과정 등을 인터넷 방송으로 찾아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런 영상들을 보노라면 그렇게 무한 반복의 공업적인 일을 너무도 싫어하는 나 자신을 다시금 확인하게끔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남들이 그러듯이 처음부터 한 번에 사 놓지 않고, 천천히, 고심해가면서, 필요가 생길 때에서야 하나씩 하나씩 마련했다. 이를테면, 갈색 플라스틱 쟁반 같은 것도 개업 직전에 작은 것으로 네 개를 산 다음 모자라서 얼마 뒤에 두 개 더, 이용객이 늘어난 13개월 후에 큰 것 하나, 거기서 다시 5개월이 지나서 봄 준비―바깥 자리로 많이 나갈 것이었다―로 작은 것 두 개를 다시 더 사는 식이었다. 나는 머핀이나 조각 케이크와 같이 내는 디저트 포크 같은 것은 모자랄 때마다 개당 1000원밖에 하지 않는 1000원숍에서 두 개 정도씩만 샀다. 1000원숍의 물건은 장점이 있는데, 일정 정도 지나면 그 상품은 없어져서 값싼데도 희소가치가 생기는 것이었다.
상품의 유동이 빠르다는 게 단점이자 장점으로, 전에 샀던 물건을 다시 사려고 가면 없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대신 빠르게 새로운 물건들이 들어오는 편이다.
맨 처음에 산호색 에스프레소 잔 두 세트를 샀었는데, 시간이 흘러 더 필요해서 사려고 했더니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쉬는 날 당일 여행 중에 다른 도시의 그 상점에도 가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전통적인 문양의 청잣빛 디저트 접시의 경우도 같았는데, 다섯 개를 그나마 짧은 간격으로 세 번에 걸쳐 사 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다음부터는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그 균일가 잡화점에 들르면 새로 나온 제품을 구경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한참 고민한 후―싸다고 함부로 사는 것은 아닌지 싼 것을 살 때 오히려 나는 더 고민스러웠다―무엇을 산다고 해도 2000원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
내 카페로 가는 길에 내가 이용객이라면 그 촌 동네에서 과연 어느 카페로 가고 싶을 것인가를 따져보고는 했다. 물론, 나라면 어디를 가나 식상하게 비슷한 데가 아니라 수풀이 뒤덮어 햇살을 가리고 작가의 숲속 서재 같은 운치 있는 한옥 카페를 응당 선택할 터였다. 나는 그다음 순서로는 내 카페에 들어가게 되면 따듯한 아메리카노로 해야 할지, 시원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만들어 마셔야 할지를 택해야 했다. 나는 벌써 전부터 믹스커피를 마시기 어렵게 되었다. 다른 데 들렀는데 거기서 타 주거나 예전 생각이 나서 한 잔 타면 한 모금에 바로 속이 메슥거리며 올라올 것 같았다. 내 카페 아랫길에 줄 이은 식당마다 식사를 끝내고 나온 식객들이 작은 종이컵으로 공짜 믹스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식당에서 공짜로 믹스커피를 마실 수 있는데 카페로 오겠나, 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믹스커피만 마시는 이는 믹스커피만 마실 테고, 나처럼 아메리카노를 자꾸 마시다 보니 입맛이 들게 된 사람은 다시 믹스커피로 돌아가기는 어렵게 되는 것이었다. 또 나는 이전까지는 편의점에서 파는, 얼음이 채워진 컵에 부어 마시는 들큼한 아이스커피도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설탕이나 시럽을 넣지 않게끔 되었다. 그렇다면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믹스커피와 편의점의 단맛 나는 아이스커피를 그렇게 마시고 있으니 제대로 된 아메리카노를 파는 카페는 앞으로 잘 되면 잘 되지 더 안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오늘은 어떨 것인가. 카페에 와서 청소 등 그날의 장사 준비를 하면 나는 묘하게 긴장되었다. 돈이 들어오는데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장사는 재미가 있었다.
“오늘 재미 좋았어?”
“재미 못 봤어.”
해 보니 이러한 말들은 장사에 맞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내 예전의 사업에서는 그런 표현들을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점심 먹기 전에 한 잔만이라도 팔았으면 했었다. 이제는 일곱 잔 정도 팔면 아내에게 전화해서 자랑한 다음 마음 편히 점심 도시락을 푸는 적이 드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바쁘다 싶을 때 통창 너머로 무심코 고양이들의 무덤 쪽에 시선이 가고는 했다.
아들내미가 어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것 같았는데, 그 편의점이 장사가 잘 안되어 그 시간에 주인이 직접 일한다고 내보내더라는 것이었다. 돈 쓸데가 많은 나이라 용돈을 줄 겸 내 카페에서 한주에 연이틀 일하겠냐고 물었더니 그러겠다는 것이었다. 이참에,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저 위 카페와 싸워나가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한 번 카페를 돌려보기로 했다.
아들내미가 일하는 하루째는 내가 메뉴 만들기를 가르치며 같이 있으면서 그날 매출의 50%가 일급이었고, 다음날은 아들 혼자 나가서 일하되, 재료비 조로 당일 매출의 30%를 뺀 금액을 지급하기로 약정했다. 첫날은 두 명분의 도시락을 싸서 왔고, 이튿날은 제 혼자 도시락을 싸서 시내버스로 가야 했지만, 나는 자못 마음이 안되어서 내 차로 태워다 주고 저녁에 데리러 갔다. 아들내미만 카페에 두고 오니 내가 쉬어야 하는 날인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글을 쓰면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고 온전히 쉬지도 못했다. 점심때가 지날 때 나는 전화해야 했다.
“점심 먹었니?”
“네. 좀 전에 먹었어요.”
“손님 있었니?”
“아뇨. 아직까진 없었어요.”
“한 명도?”
“네. 한 명도요.”
오후 두 시가 넘었건만 이용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데, 예전처럼 차라리 나 홀로 감내하고 있는 것이 낫지, 차마 못 할 노릇이었다. 어느 날 그때쯤 전화했더니 두 잔을 팔았다는데 그래도 마음이 조금 나았다. 날이 가면서 점차 나아졌다. 어느 때는 아들내미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얼마 뒤 전화해서는 메뉴 만드느라고 바빴다는 것이었다.
“좀 돌렸니?”
“한 장도 못 줬어요. 아빠! 전 도저히 못 하겠어요.”
새로 생긴 그 카페 바로 밑의 식당이 이 동네에서 차가 제일 많은 곳이었다.
“차에서 내릴 때나, 식당에서 나와 차를 타려고 할 때 인사하고 줘.”
나는 다른 식당들보다는 그 카페 바로 아래 식당 주차장부터 뒷면에 약도가 있는 카페 명함을 들려서 아들내미를 보냈는데, 해 보려고 했을 터나 한 시간여 만에 굳은 얼굴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나는 내 아들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는지 근심스러웠다. 물론 나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다면 직장인으로는 몰라도 자영업자로 살 수는 없다. 배고픈 늑대가 있다. 그 늑대는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목줄에 묶인 개가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늑대에게 개가 제안한다.
“굶지 않으려면 나처럼 목줄을 매고 주인에게 사육되는 것을 선택하면 돼.”
“나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목줄로 묶이기는 싫다.”
늑대는 그러고서 묶이지 않는 삶으로 계속 나간다. 자영업자는 배고픈 늑대와 같다. 사냥에 성공하면 배를 채울 수 있지만, 실패하면 계속해서 굶어야 한다. 늑대가 자유로이 살아가는 환경은 엄청난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넘실거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하는 야생의 환경이다. 자영업자의 환경도 마찬가지다. 늑대나 자영업자나 그 같은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야성이 필수적인 것이다. 나는 이제는 장성한 내 자식에게 그런 식의 야성을 조금 가르쳐 보려 했던 터였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일이 나은 것인가, 예전 사업이 나았던 것인가를. 10년 동안 갖다 바친 건물 임차료 기억 원, 시설비, 직원들 급여, 업무 차량의 보험료며 수리비와 유지비. 얼마 전 안면이 있는 예전의 동종업자를 은행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 사업을 하고 있었고 은행 대출을 받고자 했다.
내 예전의 사업은 지금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들어왔지만, 그만큼 많이 나갔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밤이면 거칠게 먹고 마셔야 했었다.
내가 거친 노동을 오랫동안 지속하는 데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노동을 하고 나서는 거칠게 먹고 마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숲속의 생활》
내 아들이 혼자 일하는 날에 나보다 더 버는 때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아들을 데리러 와서 함께 마감 작업을 하고 정산한 다음 즉시 그의 계좌로 이체했다.
나는 카페를 시작해서 근 1년 8개월 만에서야 조각 케이크 모형 두 개를 제작 주문해서 구비해 놓을 수 있었다. 냉장 쇼케이스에 넣고 며칠 지나면 곰팡이가 피었는데, 몇 개나 버리지 못해 내가 먹어치우거나 집으로 가져가야 했던가. 돈이 있어서 먼저 갖추어 놓고 시작했다가 이제 망했다면 이처럼 그 물건들이 값어치 있게 여겨질 것인가. 엉덩이가 무거울 필요가 있었다. 이때까지 참으면서 진득하게 견뎠더니 이런 날이 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장사 되는 것을 봐서 하나씩 갖추어가는 기쁨은 컸다.
나는 차를 세워놓고 계단을 오른다. 이런 촌 동네까지 와서 왜 2층까지 올라가야 하나. 여전히 하얀 보건용 마스크를 끼고 있는 그 여자는 진동벨을 건넨다. 마땅하게 앉고 싶은 자리가 없다. 줄로 된 반쯤 누워야 하는 불편한 의자와 무릎 높이의 역시 불편하기만 한 테이블을 놓은 한쪽 창가는 희끗희끗한 비닐하우스에 밭뙈기들, 축사의 너무 오래되어 검버섯이 핀 것같이 거무튀튀한 슬레이트 지붕이나 눈으로 들어온다. 그 고통들이 보이는 것이다. 서향이어서 사선으로 꽂히는 오후의 불볕을 막느라고 반대편 창가는 통째 허연 커튼을 늘어뜨려 놓았다. 나는 카운터 테이블 앞 편에, 처음의 인테리어와는 안 어울리게 나중에 임시방편으로 들여놓은 듯한―어디든 자리 배치가 큰 골칫거리이기는 하다―2인용 테이블 자리를 택한다. 나는 탕약같이 쓰기만 한 커피를 넘기다가 녹색의 매트로 덮은 ‘루프탑’으로 나가 본다. 의자들은 하나같이 불편하고 바로 아래의 길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차들의 질주와 그 소음이 거슬린다. 나라면 여기 안 오겠다. 그렇게 나는 위쪽에 새로 생긴 카페를 상상했다.
처제의 이혼하고 혼자 사는 친구가 있다. 내가 카페를 시작한 해의 늦가을에 처제가 그녀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그 친구의 그 모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내 카페 사진들을 올려 홍보해 준다는 것이었다.
“터가 워커힐 호텔 뒤에 있는 한옥 카페와 비슷해요. 눈이 내릴 땐 더 멋지겠어요.”
처제의 친구가 내게 말했다. 몇 달 뒤 나는 쉬는 날 기어이 구리의 그 한옥 카페를 찾아가서 너른 앞마당을 둘러보았고 빈자리 없이 들어찬 이용객들의 틈새에 간신히 끼어서 앉아있다가 왔다. 처제의 그 친구는 그때 처음 딱 한 번 오고 여태 오지 않았다. 두 번째 겨울을 맞으며 첫눈이 오고 있는 날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 내리는 정경이 그만이니까 오늘 오면 좋을 것이라고 그녀의 그 모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에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그렇겠네요’라고만 했었다. 어디서 비싼 것을 먹는 사진, 비싼 옷을 입고 있는 사진, 근사하게 인테리어를 해 놓은 어디에 앉아있는 사진, 어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만 숱한 그녀의 그 모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들어가 보았더니 골프복 차림으로 위쪽의 그 카페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바로 지척의 내 카페에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 카페와는 기나긴 싸움이 될 터였다.
지네처럼 생긴 이상한 벌레들이 카페 앞뜰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건드리면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그것들은 날마다 더 많아졌고, 어느 틈으로인지 매장까지 들어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곧바로 장마가 시작되었다. 빗줄기는 퍼붓는데, 나는 앞뜰에서 부탄가스 토치를 쏘았다. 나는 혼자서, 어느 때는 내 자식과 교대로 그 역겨운 냄새가 나는 징그러운 벌레들을 연신 태워 죽였다. 벌레들의 사체는 조그만 분묘처럼 쌓여갔지만, 앞마당에 깔린 쇄석에서, 아니 산자락의 석축으로부터, 아니 산에서 기어 내려와 계속 카페 건물로 몰려들었다. 나는 날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전원에는 그런 데가 많다고 했다.
세상은 진짜 망해가는 것인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 보면 전조등이거나 후미등 한쪽이 나간 채 그냥 돌아다니는 차들이 점차 더 눈에 띄었다. 그 모양에서 가난이 묻어났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감염병으로 가난도 확장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내가 안 망하는 것이 중요했다. 비는 하루도 쉬지 않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세상이 떠내려갈 듯했다. 그 와중에 현직 서울시장이 산으로 가서 자살했다. 무슨 ‘인권변호사’인 연하며―변호사면 변호사지 ‘인권’은 왜 앞에 붙이는가. 그냥 변호사는 인권 보호를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물렁한 밑창의 뒤축을 뜯은 로퍼를 (일부러?) 신고 다니다가 서울시장이 되더니 성 비위를 저지른 것이었다. 권력에 맛이 들리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검찰총장이 저의 명을 거역한 것입니다.”
검찰 간부 인사 단행 문제로 야당 의원의 지적을 받자 마이크에다 대고 버젓이 이러는 여자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야당 의원의 질의를 받으며 텔레비전으로 다 나오는데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질 않나, 대단히 오만하고 표독스러운 여자로서 내가 극도로 혐오하는 여자 유형이었는데, 내 아내가 그런 여자가 아닌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장마 가운데의 다시 그 회의장에서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나는 이 대목을 쓰기 위해 보고 싶지 않은 그 여자의 지난 영상들까지 다시 면밀하게 찾아보아야 했다. 좌충우돌 형의 그 여자는 35일 만에 떨려 난 괴물의 후임 법무부 장관이었다.
“소설을 쓰시네.”
이번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그 성정을 못 숨기고 이렇게 뱉어버린 것이었다. 회의장이 발칵 뒤집혔다. 그 야당 의원이 그 여자에게 따졌다.
“국회의원들이 소설가입니까?”
“질문도 질문 같은 질문을 하세요.”
그 여자가 핏대를 세우며 맞받았다.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소설가들은 놀라움을 넘어 자괴감을 금할 수 없었다. 정치 입장을 떠나서 한 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소설을 ‘거짓말 나부랭이’ 정도로 취급하는 현실 앞에서 이 땅에서 문학을 융성시키는 일은 참 험난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또한 이번 기회에 걸핏하면 ‘소설 쓰는’ 것을 거짓말하는 행위로 빗대어 발언해 소설가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준 정치인들에게도 엄중한 각성을 촉구한다.
법무부 장관이 소설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으니, 우선 간략하게 설명부터 드려야 할 것 같다. ‘거짓말’과 ‘허구(虛構)’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여 이를 정리한다. 거짓말은 상대방에게 ‘가짜를 진짜라고 믿게끔 속이는’ 행위다. 소설에서의 허구는 거짓말과 다르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걸 상대방(독자)이 이미 알고 있으며, 이런 독자에게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로 믿게끔 창작해 낸 예술 작품이다. 이런 소설의 기능과 역할을 안다면, 어떻게 “소설 쓰시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1300여 명의 회원의 소설가 단체가 그 여자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 성명서 일부분이다. 하지만 소설을 그렇게 취급하는 부류가 한둘이랴. 그런데 웃기게도, 거짓말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 여자가 나중에 제가 소속한 정당이 도로 야당이 되자 현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을 헐뜯으려고 자전적 소설을 한 권 낸다. 그 여자의 말 대로라면 제 소설 역시 온전히 거짓말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바깥세상이야 어떻든지 매장 안은 보송보송하고 시원했다. 비는 그치지를 않았지만, 여러모로 승마장보다는 나았다. 빗속에서 온종일, 진창인 승마장에서 움직이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나도 나이가 드니 낮에도 어느 정도 자야 했다. 나는 사람 없는 시간에는 뿌옇게 김이 서린 통창 곁의 그 2인용 소파에 드러누워―무릎을 세워야 하지만―잠잠한 빗소리 속에서 잘 수 있어 좋았다. 비는 장장 54일간이나 쉼 없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