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_뉴질랜드 여행기 6
밀포드 사운드(Milford Sound)를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했다. 밀포드 사운드는 반지의 제왕 촬영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밀포드 사운드는 퀸즈타운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으로 크루즈를 타고 피오르드 지역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에서 이천 정도의 거리이지만, 중간에 거대한 산맥이 막고 있어 남쪽으로 우회해서 가기에 차로 약 4시간 정도 걸린다. 밀포드 사운드는 하루에도 수천 명이 방문하는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만약에 다른 나라 같았으면 최대한 가깝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을 테지만 여기는 뉴질랜드다. 관광객들을 더 많이 보내는 것보단 자연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나라다. 게다가 차를 오래 타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어 지루하지는 않았다. 퀸스타운을 벗어나면 내가 한눈에 반했던 와카티푸 호수를 따라 약 한 시간가량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쭉 뻗은 빙하 호수와 호수를 감싸고 있는 멋진 U자형 계곡은 시작부터 한눈을 팔 수 없게 한다. 한동안 달려 드디어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밀포드 사운드는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에 속 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국립공원을 가로질러 가게 된다. 만약에 퀸스타운에서 바로 밀포드 사운드까지 가는 길이 있었다면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의 멋진 풍경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참을 달려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에 들어섰지만, 국립공원이라고 특별히 환경이 달라지진 않았다. 그냥 비슷한 풍경이 연결되어 설명이 없었다면 국립공원이란 느낌도 못 받았을 것이다. 국립공원에 들어온 후 조금 뒤 잠시 에글린튼 벨리라는 곳에 잠시 멈췄다. 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의 높은 산이 있고 산 앞쪽으로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사실 뉴질랜드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본 건 넓은 초원과 그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이었다. 여기는 국립공원이라 가축은 없었지만 에글린튼 벨리에서 본 풍경이 뉴질랜드를 가장 상징하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조금 아쉬웠던 건 날씨였다. 흐린 데다 비까지 간간이 내려 구름이 낮게 깔려있었다. 구름 사이로 산들이 자신들을 드러냈다 감췄다 하는 풍경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제일 멋진 모습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초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빙하수로 이루어진 호수가 있는 곳으로 물이 너무 맑아 주변 풍경이 거울에 비친 듯 선명해 거울 호수라고 불리는 곳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멋진 반영은 볼 수 없었다. 흐린 탓에 구름이 낮게 깔려서인지 빛이 적었다. 게다가 비까지 내려서 호수 위에 잔물결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건너편 산에 구름이 멋지게 걸려 있었다. 그 풍경을 위안으로 삼고 다시 밀포드 사운드로 향했다.
길고 긴 이동 끝에 밀포드 사운드까지 가는 단 하나의 터널까지 도착했다. 이 터널은 호머터널인데 1950년에 만들어졌다. 터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도보로 산을 넘어갔다고 하니, 이 터널이 만들어진 이후에나 본격적인 관광이 시작된 것이다. 터널은 1차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쌍방 통행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입구에 신호등이 있는 신기한 터널이다. 마침 빨간불이었는지 입구에는 우리말고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차들이 보였다. 터널 주변의 풍경은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멋졌다. 높게 솟아오른 암벽들과 그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폭포들이 장관을 이뤘다. 사진을 찍다 보니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널은 내리막이었는데 암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1950년대 만든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터널을 나오니 뭔가 새로운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산들로 둘러 쌓여 있는 건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어찌 보면 날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터널을 지나자 마치 마법처럼 구름들이 사라지고 맑은 날씨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양 옆으로 높은 산들에 낮은 구름이 깔려 조금 회색빛 느낌이었다면 터널을 통과하자 푸른빛 세상으로 변했다. 오늘 하루치 행운을 아꼈다가 한 번에 터트려준 느낌이 들었다. 차는 내리막 길을 달려 크루즈가 모여있는 항구에 도착했다.
피오르드 투어는 전에 해봤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게다가 노르웨이에서 피오르드 크루즈 투어는 이미 해봤기 때문에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밥까지 먹는 크루즈라고는 하지만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일단 배에 타자마자 점심부터 먹었다. 밥을 먹다 보니 어느 사이 배가 출항했다. 앉은자리에서도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왔으니 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갔다. 노르웨이 때를 생각하고 밖으로 나간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바람이 강했기 때문이다. 갑판 곳곳에 안전바가 있는 이유를 그제야 이해했다. 안전바를 잡고 찬찬히 둘러보니 노르웨이에서 봤던 피오르드와는 조금 달랐다. 양 옆으로 높은 산이 있는 것은 비슷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노르웨이에서 본 피오르드는 거대하고 웅장했다면 노르웨이에서 만난 피오르드는 거대하지만 아기자기했다. 정상에서 떨어지는 폭포도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에서는 쉴 새 없이 곳곳에서 떨어졌다면 이곳에서는 적당한 수의 폭포가 있어 폭포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식사로 따지면 노르웨이는 뷔페 같다고 할까? 많은 폭포와 암반들이 가득 있어서 골라서 보는 재미가 있다면 뉴질랜드에서는 파인다이닝처럼 하나하나 섬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크루즈가 폭포 가까이 가서 직접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을 수 있는 경험을 한 건 정말 특별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약 2시간이란 시간이 조금 길게 느껴졌는데 뉴질랜드에서는 90분이었지만 120분이었어도 짧게 느껴질 만큼 노르웨이보다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두 곳의 인상이 다른 건 고유의 특색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날씨 탓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노르웨이에서는 날씨가 좋지 않아서 낮은 구름이 협곡에 걸려있어 절반만 봤기 때문이다. 물론 비로 인해 수많은 폭포들이 생겼지만 오히려 그 폭포들로 인해 집중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뉴질랜드에서는 날씨가 좋아 좀 더 자세히 보면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단연코 이날 밀포드 사운드 여행이 이번 여행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날이 아닌가 싶다.
북유럽을 다녀온 뒤 아이슬란드를 거쳐 뉴질랜드를 마지막에 온 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세 곳에서 모두 피오르드와 빙하를 봤다. 계절로 치면 북유럽은 여름, 아이슬란드는 겨울, 뉴질랜드는 가을에 여행을 했는데 각각의 계절에 따른 변화를 명확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녹아서 물을 많이 머금어 자신의 아름다움을 반만 보여준 북유럽, 얼음과 눈으로 자신을 감추었던 아이슬란드, 최고의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 뉴질랜드는 피오르드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뉴질랜드 피오르드가 그동안 본 피오르드를 한 번에 정리해 주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