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퀸스타운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이동하는 날이자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 호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크라이스트처치까지는 자동차로 약 6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를 이동에 다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행인 건 크라이스트처치까지 가면서 중간중간 쉼터 같은 곳을 몇 군데 들른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오늘의 메인은 마운트쿡이었다. 마운트쿡은 약 3700미터로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정상에는 만년설이 있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너무나 샤이한지 일 년에 100일 정도밖에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다행히 오늘 날씨는 맑았지만 희한하게 마운트쿡 쪽만 구름이 가득했다. 정상만 구름에 가렸다 보였다 하면서 애를 태우더니 트래킹을 위해 가까이 갔을 때는 아예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아무래도 뉴질랜드 여행 날씨 운은 어제 밀포드 사운드에서 한 번에 다 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어제 날씨 운을 다 써서라도 밀포드 사운드를 제대로 본 건 후회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비록 마운트쿡을 보진 못했지만 크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여행을 통해 배운 게 있다면 어떤 여행이던지 날씨만큼은 내 맘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멋진 곳을 날씨로 인해 못 봤다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기에, 여행을 하는 감정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냥 못 볼 운명인가 보다 하면서 지나가게 됐다. 덕분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게 운이 없거나 나쁜 일이 있어도 약간은 무던하게 넘어갈 수 있는 담담함이 조금은 생기지 않았을까 기대해 본다. 구름에 가려진 마운트쿡을 뒤로하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마운트쿡 주변에는 짧게는 30분부터 길게는 2박 3일가량의 트레킹 코스가 있는데 우리는 타스만 호수까지 왕복 한 시간 정도 걸리는 타스만 빙하 트랙을 선택했다. 트레킹이라고는 하지만 산책 정도의 난이도여서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여기는 뉴질랜드이다. 길을 따로 포장한 게 아니라 자연 그대로인 상태라 대부분 돌로 되어 있어 걷기에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마치 제주도에서 현무암이 잔뜩 깔려 있는 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초반에 편한 길이라고 쉽게 걸으면 중간중간 깔려 있는 돌로 인해 자칫하면 넘어질 수도 있다. 세상에 마냥 편하기만 한 건 없다는 인생의 진리를 알려주는 길이었다. 비포장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돌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얼마 안 가 타스만 호수가 나타나는데 물 위에 떠 있는 빙하를 볼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호수가 얼어 물 위에 있는 빙하를 못 봤는데 그 아쉬움을 뉴질랜드에서 채웠다. 못 봤다고 크게 아쉬워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것도 있는 것 같다. 볼 때 되면 자연스럽게 보게 되니 말이다. 역시나 뉴질랜드는 그동안의 여행에서 채우지 못한 퍼즐을 채워주는 곳 같았다. 그런데 이곳 빙하호수는 옥빛이 아니라 조금 탁한데 석회가 섞여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빙하수라고 다 마실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크라이스트처치를 향해 이동했다. 약 40분을 달려 마지막으로 마운트쿡을 볼 수 있는 곳까지 오니 마운트쿡 쪽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에서의 마지막을 송별이라도 해주는 듯 구름 사이로 마운트쿡이 잠깐 인사를 하러 나왔다. 꽤 멀리 긴 했지만 뉴질랜드의 배려에 조금은 고마웠다.
크라이스트처치를 향해 달리던 차가 푸른 호수 근처에서 잠시 멈췄다. 또 하나의 다른 빙하호수인 테카포 호수였다. 이곳에는 선한 목자교회, 양치기동상 등 볼거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푸른 하늘과 옥빛 호수의 조합이 너무나 눈부시게 눈앞에 있는데 다른 게 눈에 들어올 리 없기 때문이다. 이곳은 크라이스트처치까지 가는 여행자에게는 최고의 쉼터였다. 잠시 차에서 내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냥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조화로움은 정식적으로 최고의 휴식이 되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차로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테카포 호수는 강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늦은 오후에 도착했다. 첫인상은 '와! 도시다.'랄까? 그동안 거의 자연에만 있거나 작은 동네에 있다 처음으로 대도시에 온 느낌이었다. 늦은 오후에 도착했기 때문에 많은 곳을 둘러보진 않고 한 곳만 들렸는데 바로 공원이었다. 우리가 들른 곳은 크라이스트처치 보태닉 가든이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정원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곳곳에 풀과 나무가 많이 있다고 한다. 지도를 보니 우리가 갔던 보태닉 가든을 또 다른 정원이 둘러싸고 있을 정도니 왜 정원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큰 정원이 도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꽤나 부러웠다. 요즘 한국도 도시공원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도시의 가장 중심에 다양한 나무와 꽃 그리고 정원까지 꾸며져 있는 것을 보면 자연을 사랑하는 뉴질랜드니까 가능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만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을 해서 해가 지기 전 둘러봐야 했기에 빠른 걸음으로 한 바퀴 돌았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해는 여행자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된 건 한 바퀴 도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는 점이다.
뉴질랜드 북섬과 남섬은 하나의 나라라고 부르기에는 이질감이 있을 만큼 전혀 다른 곳이었다. 덕분에 두 개의 나라를 여행 한 느낌마저 들었다. 뉴질랜드 여행은 퇴사 후 여행하면서 느꼈던 생각과 감정들을 돌아보며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마치 보충수업처럼 그동안 여행하면서 조금 아쉬웠던 것들을 한 번에 채워주는 느낌도 들었다. 아직 호주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왠지 뉴질랜드만으로도 만족스러웠던 여행이었다. 뉴질랜드 남섬은 삼일만 있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시간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번 오고 싶은 곳이다. 그때는 지금보다는 좀 더 긴 시간과 호흡으로 여유롭게 둘러보며 뉴질랜드를 충분히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