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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식 Apr 23. 2018

4월 23일은 책의 날,  사서선생님은 바쁘다.

책의 날은 있어도, 책을 가르치는 노동은 존중하지 않는 사회

어릴 적 한 때나마 사서가 되는 낭만적 상상을 하곤 했다. 깔끔하고 책 냄새로 가득한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보는 게 일이라니 마냥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역시 직업의 실체는 피상적으로 봐선 안 된다. 알고 보면 호락호락한 직업은 없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같이 일하는 구성원들조차 사서를 도서관 경비쯤으로 취급한다. 이 말도 사실은 경비 일을 만만하게 보는 편견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부 학교에선 호칭부터 사람을 실망시킨다. 사서선생님들은 “사서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라”는 말을 주변에서 듣는다.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면 돌아오는 말은 또 이렇다. 어떤 교사는 “호칭이 그렇게 중요해, 왜 그래!”라며 예민하다고 타박한다. 적반하장이다. 학교에서 교육을 뒷받침하는 어른은 모두 선생님이라 불러도 문제될 건 없다. 오히려 문제를 삼는 건 교사들의 자부심이고 교장들의 권위의식이다.      

학교는 의외로 권위주의가 팽배하다. 교장은 존경할만한 어른이기보단 괴롭히는 사람으로 생각되는 게 어쩌면 더 현실적이다. 사서선생님들은 “의자 하나도 내 맘대로 옮길 수 없는 억눌림”을 느끼곤 한다. 한 번은 도서관 책을 1년이나 연체한 교사에게 책을 반납해달라고 재촉했다가 “너 빚쟁이냐!”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보통은 그렇다. 남보다 특별 대접을 해달라는 게 아니라 동등하게 최소한 일한 수고만큼 대접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시험을 통과해야만 평등할 자격이 주어지는 사회가 돼가는 것 같다. 모범적이어야 할 학교라는 공간에서도 차별은 일상이다. 일 시킬 땐 사서를 전문가라며 떠맡기더니 처우 문제가 나오면 “너흰 교사가 아니야, 도서관 경비일 뿐이야”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면서 일 시킬 때는 꼼꼼히도 요구한다. 어떤 교장은 “책과 관련된 모든 일은 모조리 사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서의 일은 간단하지 않다. 교과 학습을 확장해 줄 책을 골라 구비해야 하고, 각종 도서관련 행사도 기획하고 진행해야 한다. 도서를 자료로 교사들과 협력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종이가 많은 공간이니 만큼 도서관 화기 점검도 잊지 말아야 한다. 초등 1학년에겐 도서관 이용 안내수업을 하고, “사서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되요?”하고 묻는 5~6학년들에겐 진로교육을 하기도 한다. 또한 사서는 본래 책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다. 그러나 학교 교육은 책을 찾거나 잘 활용하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사서는 책 사고 빌려주고 도서관이나 지키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래서일까. 책 분실 책임은 모두 사서에게 지우기 일쑤다. 작정하고 가져가면 잡나내기 어려운대도 말이다. 반면 사서의 보람 중 하나가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게 되는 모습이다. 이런 에피소드도 들었다. 도서관에서 책 관리 자원봉사를 하고 싶은 한 아이는 책을 실어 나르는 북트럭보다도 키가 작았다. 위험하니깐 북트럭보다는 커야한다고 했더니 글쎄, 그 아이가 안 먹던 우유를 하루에 2개씩 먹기 시작했다.      


학교는 마을이다. 아이들이 다 같이 어우러져 자라고 그런 아이들을 또 다 같이 교육하고 키우는 공동체다. 내 아이 혼자 잘 자랄 순 없으며, 나 혼자 잘 가르칠 수도 없다. 그 중에 사서선생님들이 있고, 이들은 당연히 교육의 주체다. 변화된 시대와 새로운 세대가 요구하는 학교라면 교육에 적극적으로 도서관을 활용하고,, 이를 위해선 도서관에 대한 이해의 확장도 필요하다. 사서선생님들은 그런 고민을 하고 싶지만 업무 중압감에 생각을 진척시킬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의 학교들은 도서관의 외형만 늘리는데 치중한다. 아이들을 도서관으로 밀어 넣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학교, 그 도서관에 뭘 채워야 할지 모르는 교육이 씁쓸하다. 도서관에 책만 채운다고 다가 아니다.     


혁신교육 혹은 창의지성교육을 하겠다면 매우 중요한 공간이 도서관이다. 우리 교육에는 도서관과 책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학생 1500명 당 사서 1명으로서는 책을 물리적으로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숨 가쁘다. 게다가 우리 교육은 학생들을 평가만 하려고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는 똑같은 책을 읽히려고 노력한다. “다양한 책을 읽으라고 할 순 없어, 그러면 어떻게 평가를 해” ... 도서교육의 수준이 이렇다. 또한 도서관은 어떤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누구나 접근하고 누릴 수 있는 평등한 공간이고 민주적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 학교공간의 공기 속에서 아이들은 민주시민으로 성숙해간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는 권위주의와 차별이 팽배하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교육 공간인 학교에는 사서를 비롯해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 과연 교육적일까? 아이들은 모두가 다 1등일 수 없으며 대통령이 될 수도 없다. 아이들의 미래는 십중팔구 노동자일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선 노동권을 가르치지 않고, 학교에서 보는 노동은 차별받고 무시당한다.      


우리 사회는 알아야 한다. 노동존중이 곧 교육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8426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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