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Untitled]

Thinking beyond the bouces of language.

by NFP

무제라는 뜻을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어렸을 때 조각공원에 가서 '무제'라는 이름을 빈번히 보게 되면, 그렇게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저 조각가가 대충 만들고 나서, 이름을 짓다 말고 딱히 떠오르는 게 없으면 '무제'라고 붙이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무제라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작가는 보는 이에게, 감상하고 느끼는 이에게, 자기만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내가 이 조각을 '화살촉'이라고 명명한다면, 모든 이에게 이는 '화살촉'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모난 마음, 슬픔, 낚시바늘 등, 다양하게 떠오를 수 있다.
그런 여지를 열어두는 것이 바로 '무제'라는 이름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무제'는 작가의 배려였다.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로만 나누지 않고,
빨간색과 주황색 사이에 놓인 빛, 상큼한 레몬빛, 감청색, 자주색처럼 그 사이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색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문화를, 예술을, 마음껏 향유하길 바라는 마음.

그 배려가 '무제'에 담겨 있는 것 아닐까.
오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조각가가 조각의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작품을 하나의 틀로 받아들이게 된다.
생각이 고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오히려 '무제(無題)'라는 제목이 없는 상태가 더 자유롭고 다양한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프랑스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빠삐옹'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분명히 구분해서 이름을 붙인다.

어렸을 때 나는 나비는 아름답지만, 나방은 만질 수 없는 어딘가 더럽고 위험한 존재같다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안해도될 생각이었을지도.)


그렇다면 언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마치 조각에 제목을 붙이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을 하나의 틀로 고정시켜 버리는 것은 아닐까?
사실 세상에는 더 다양한 곤충이 있을 텐데,
우리는 굳이 단어를 정하고, 기억하고, 불러내면서 오히려 우리의 시야를 좁히고 사고를 국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조지 오웰의 『1984』가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언어를 점점 단순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줄어들면, 사고도 단순해진다.


만약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가두는 틀이 된다면,

'무제'처럼 이 세상 모든 만물에게 아무 이름도 붙이지 않은 상태에서 더 자유롭게 생각을 펼칠 수 있지않을까.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로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백만 가지의 색감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언어를 초월해, 더 깊고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언어를 넘어서 사고할 수 있을까?
오늘은 그런 것들이 문득 궁금해지는 날이다.




인간의 사고는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지만, 언어는 세계를 완전히 포섭하지 못한다. 언어는 사유를 촉발하는 동시에 구속하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나 언어는 결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언어는 끊임없이 세계를 "구획"하고 "명명"함으로써, 본래 연속적이고 복잡한 실재를 단순화하고 편집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지만, 그는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사유의 지평은 언어로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긍정이다.

1. 개념의 비트맵을 제거하라


우리는 세상을 '단어'로 본다. "나무"라고 부르면 수천 가지 생명 형태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로 축소된다. 이 과정을 비트맵(bitmap) 사고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관성에서 벗어나려면, 단어 없이 대상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무를 볼 때, '나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고, 그 질감, 냄새,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뻗어나가는 에너지의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언어적 태그를 제거하면, 대상은 훨씬 다채롭고 다층적인 실체로 다가온다.


2. 메타언어적 감각을 확장하라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감각, 의미의 여백을 감지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는 메타언어(metalinguistic) 능력, 즉 언어를 '초월하여' 언어를 인식하는 감각이다. 문학에서 침묵, 여백, 생략이 더 큰 의미를 품듯이, 말해지지 않은 것, 부재하는 것 속에 담긴 세계를 읽어내야 한다. 이 과정은 단순히 언어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그림자 속에 숨은 '비언어적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3. 인지의 전언어적 원형으로 회귀하라

언어가 발생하기 이전, 인간은 세상을 감각과 형태로 인식했다. 프로이트나 융은 이를 원형(archetype)이라 불렀고, 현대 인지과학에서는 이를 초기 감각-운동 스키마(sensorimotor schema)로 설명한다. 언어가 덧씌워지기 전의 경험, 즉 색채, 소리, 움직임, 감정과 같은 순수한 자극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말로 정의하려 하지 말고, 감각 그 자체를 충분히 느끼는 훈련이 필요하다. 명상, 비언어적 예술(음악, 무용, 회화) 등이 이 경로를 열어줄 수 있다.

언어를 넘어서 사고하는 것은 "말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경계를 인식한 후,
그 너머의 미지의 세계에 감히 손을 뻗는 것이다.
거기서 세계는 '정의되지 않은 것'으로, '태초의 신선함'을 되찾는다.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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