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큰주공아파트에서 살았다.
모두가 고만 고만한 수준에 동네였다. 주공 아파트 특성상 10 평대 집부터 30평대까지 있었다.
우리 집은 30평대 아파트였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엄마 덕분에 우리 집은 깔끔하고 예뻤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그렇게들 깜짝 놀라며 부러워했다.
'네 방이 있어?'가 많은 친구들이 묻는 질문이었다.
예쁜 민트색 소파에, 레몬색 블라인드랑 장스탠드가 있는 내방을 가진 나는, 주공아파트에서는 제법 부자였다.
엄마는 취미로 베이킹을 했다. 우리집에 놀러온 친구들에게는 케이크를 구워주셨다.
그러다가 2학년 때 이사를 갔다.
바로 옆 동네 고급 아파트로 갔다. 여학교 학군이 좋다는 이유로 엄마가 욕심낸 이사였다. 거기는 주공아파트보다는 부촌이었다. 구경계에 마주한 위치였지만, 굳이 행정구역 차이로 보지 않더라도, 당시 지하주차장이 있던 몇 안 되는 단지였으며, 30평형부터 70평형대까지 다양한 타입의 집들이 존재했다.
우리처럼 제일 작은 34평형 집에서 사는 친구들도 있는 반면, 60평대 70평대 으리으리 한 집에서 사는 친구들도 많았다.
나는 이 아파트에서는 가난한 편이었다.
친구를 쉽게 사귀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 탓에 나는 정말 많은 친구들 집에 놀러 갈 수 있었다.
H라는 예쁜 친구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마르고 너무 예쁜 친구였다. 그 친구는 60평대 집에 살았다. 쭐래쭐래 따라 들어간 집 현관은 뱀의 머리를 한 메두사 장식이 대리석 바닥에 조각되어있었다. 집은 어둡고 웅장했으며 정말 입이 쩍 벌어지게 대단했다. 처음 보는 프랑스의 고성 같은 집이었다.
EJ이라는 친구는 긴 머리에 보조개가 예뻤다. 그 친구는 50평대 복층에서 살았다. 현관을 통해 집에 들어가면 높은 천장과 2층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큰 대형 트리가 2층 복도에 놓여있었기때문에 천장에 닿을듯 큰 트리였다. 백화점에 온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홀했다.
J는 뉴저지에서 온 친구였다. 60평대 집에 살며 생일날 파티를 했는데 과자집 만들기 키트를 하나씩 주었다. 대형 과자집을 만들어서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S는 반장이었고, 노래를 엄청 잘했다. 늘 까맣고 큰 차로 등하교를 하는 친구였다. 집에 놀러가니 손가락 크기에 케이크를 이모님이 접시에 담아내어 주셨다. 티브이를 보려고 소파에 앉으니 S가 리모컨을 들고 버튼을 눌러 커튼을 쳤다.
고등학생 때 친구 K는 나에게 욕을 많이 가르쳐준 통통한 친구였다. K는 제일 큰 평형 아파트에 사는 친구였는데 피아노를 전공하는 친언니를 위한 그랜드 피아노와 방음 방이 있었다. 유행하는 베이지 G 시계를 깔 별로 가지고 있었으며 보기에도 돈이 엄청 많아서 주체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그 당시 나는 제일 작은 평형 아파트에 살았고, 아빠는 투병 중이라 일을 안 하셨다. 내색은 안 하셨다 해도 우리 집은 넉넉하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상황반 공부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이유반으로 나는 대학생 때까지 핸드폰이나 삐삐 따위를 가져보지 못했다.
부자 동네답게 우리 학교에선 참 비싼 아이템들이 유행했다. 아디다스나 나이키, 반스 신발을 물론이고, 학교에서 끌고 다니는 슬리퍼도 핑크 아디다스가 대세였고, 프라다 신발과 가방이 유행했다.
당연히 나는 가져본 적은 없다. 프라다 가방은 언니가 준 짝퉁 가방이 있긴 했다. 열심히 매고 다녔다.
물론 단 한 번도 친구들과 비교하며 내 처지를 한탄했던 적은 없다. 지금 이렇게 적어보니 그럴 법도 했는데, 눈치가 없거나 매사 지나치게 낙천적인 성향 탓에 친구가 부럽거나
내 처지가 왜 이렇지 생각해본 적은 없다.
가난은 의외로 굉장히 상대적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걸 가졌다고 해도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만나면 위축되거나 내가 그저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내가 별 다른 걸 갖지 못했어도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아프리카 기아나 어느 부족 가여운 사람을 보면 나는 그래도 행복하지 느끼게 되는 마음이랑 비슷하다.
당연하지만 우리가 종종 잊고사는 진리인듯하다.
가난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라는 것.
지금 당신은 부자인가 가난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