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기법 소개 - 로토스코핑]
이제껏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의 전체 줄거리를 제대로 소개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영화 공개는 아직 한참 멀었는데 괜히 시놉시스를 공개했다가 스포일러가 될까봐 조심한 이유도 있다. 그러나 이 제작기를 재밌게 읽으려면 줄거리를 대충이라도 아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10년차 부부 최정환과 강유진. 계속되는 시험관 아기 실패로 유진은 지쳐있다. 그 사이 천재 의학박사 김삼신은 남성 임신 기술을 연구하여, 대중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정환은 유진의 성화에 못이겨 김삼신을 찾아갔다가 얼떨결에 코가 꿰이고 만다. 임신을 시키려는 여자와, 안 하려는 남자, 그리고 두 사람을 둘러싼 최씨 일가 구성원들의 상반된 반응. 과연 정환은 남성 임신을 하게될까?
남편을 임신시키려는 여자 강유진. 그는 남편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남성임신 경험자를 찾기에 이른다. 일명 '남성 임신 멘토'다. 러프 콘티를 그릴 당시에는 멘토 캐릭터 디자인이 당장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어울리는 연예인 사진을 찾아다 붙여넣었다.
그런데 이 사진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남성 임신 멘토들이 만화 캐릭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진짜 사람이 등장하면 너무 재밌을 것 같은데?
나는 곧바로 *로토스코핑(Rotoscooping)기법을 떠올렸다. (*촬영한 영상을 한 장 한 장 똑같이 베껴 그려내는 애니메이션 기법) 암튼 이걸 하려면 일단 배우가 있어야 한다. 나는 PD님의 허락을 받고 (왜냐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필름메이커스에 구인공고를 올렸다.
글을 올리자마자 수백개의 메일이 쏟아졌다. 하나씩 열어보면서 확인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는 배우의 외모였다. 잘생긴 사람을 뽑았던 것이냐? 아니다. 그림으로 베껴 그렸을 때에도 퇴색되지 않는 강한 개성의 소유자여야 했다. 두번째 기준은, 과장된 연기를 구사할 수 있는 배우여야 했다. 만화처럼 동작이 크고 얼굴 근육을 마구 구겨뜨릴 수 있는 사람으로 골랐다.
배우 여섯분을 모시고 약 한시간동안 촬영했다. 작은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Action! Cut! 을 외치는 경험은 새롭고 또 즐거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배우도 긴장이 풀려서 촬영이 점점 재미있어졌다. 대본에는 없는 디테일을 만들어 추가한 배우도 있고, 본인의 고향 사투리를 살려서 연기해주신 분도 있었다. 기껏해야 대사 한 두줄 뿐인 작은 역할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솔직히 조금 놀랐다. 이 사람들의 진지함에 비하면 나는 다소 흥미 위주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반성의 시간이었다.
영상 촬영본을 바탕으로 멘토 캐릭터 디자인도 완성되었다!
즐거움도 잠시,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내 입으로 로토스코핑을 한다고는 했지만, 진짜로 한 장 한 장 다 그릴 것인가? 내가 할 것인가? 시간이 있는가? 내가 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시킬 것인가? 시킬 돈은 있는가? 멘토 씬만 모두 합하면 1분이다. 60초다. 24프레임 영상을 모두 베껴 그리면 60초 x 24장 = 1,440장. 장당 5,000원만 잡아도 벌써 7,200,000원...!
그런 날 구원해준 기적의 소프트웨어가 있었으니, 바로 이비신스 (EbSynth)다. 촬영한 영상을 그림으로 손쉽게 바꿀 수 있다. 게다가 아직 베타버전이라 무료이기까지!
EbSynth - Transform Video by Painting Over a Single Frame
이 프로그램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4초 짜리 영상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4초 X 24장 = 96장을 일일히 그려야만 로토스코핑 영상이 완성된다. 그러나 이비신스를 사용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중요 프레임 몇 장만 그리면, 나머지를 알아서 그려주기 때문이다! 다만 영상은 24프레임이더라도, 작화는 12프레임으로 진행했다. 12프레임으로 그려진 다른 캐릭터들과도 잘 어울려야 했기 때문이다.
왼쪽 촬영 영상에서 오른쪽 애니메이션으로 바꾸는데는 총 61장의 그림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단 세 장의 그림만 그렸다.
(1) 눈 떴을 때
(2) 눈 감았을 때
(3) 입 벌렸을 때
이렇게 세 장만 그려서 프로그램에 넣고 돌려주면, 나머지 58개의 이미지가 자동으로 생성된다. 이렇게 극단적인 효율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해당 컷에서 배우가 거의 안 움직였기 때문이다. 동작이 클수록, 변화가 많을 수록 더 많은 그림을 그려야한다. 그래도 이게 웬 떡이냐 싶어 테스트 뒤에 곧바로 이비신스를 멘토 등장씬에 전면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덕분에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로토스코핑 씬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반 작화와 로토스코핑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성공이었다. 30년 경력의 원화가분들도,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친구들도 이 멘토 등장씬을 매우 좋아했다.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 든다고. 그리고 남성임신 이야기가 실제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하루 빨리 이 영화를 세상에 내 보이고 싶어서 조바심이 난다.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