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캐릭터 디자인]
시나리오 개발을 도와줬던 멘토 선생은 프로듀서(이하 PD)로서 작품에 참여하게 되었다. 멘토를 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PD가 되는 건 아니었는데, 나의 선택이었다. 여러 장점이 많으신 분이지만, 무엇보다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말만 하신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박재옥 PD는 나에게 콘티를 짜라고 했다. 네? 캐릭터가 아직 없는데요? 디자이너를 구하기 까진 시간이 걸리니, 일단 달걀귀신으로라도 먼저 그리기 시작하라고 했다. 넵 알겠습니다. 나는 애니 제작에 관해선 거의 백지상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의 말을 따랐다.
그런데 막상 콘티를 시작하려고 하니, 공간 디자인도 없어서 난감했다. 일단 인터넷에서 찾은 아파트 사진을 붙여 넣으면서 시작했다. 시작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주인공 부부가 사는 아파트 평면도를 그리고 있더라. 엑스트라가 필요할 때는, 연예인 사진을 갖다 넣기도 했다. 장면을 잘 그려낼 자신이 없을 때는 레퍼런스 미술 자료를 고대로 붙여 넣기도 하고.
이 콘티를 보고 누군가는 분명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이렇게 그림을 못 그려서 애니 감독을 어떻게 하나?
할 수 있다. 할 수 ‘는’ 있다. 다만 돈이 많이 든다. 잘 그리는 사람들을 모셔야 하니까. 정말 다행인 것은, 내가 이 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제작 예산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 봉준호 감독 덕이라고 한다. 오스카 4관왕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나도 상을 타고 싶다고 생각했다. 큰 상을 타면, 그게 돈 줄이 되는구나…!
우선 캐릭터 디자이너부터 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지에서 그림 좀 그린다 하는 사람들을 다 뒤져봤는데, 의외로 다른 곳에서 쉽게 결정했다. 나는 전부터 동경하던 작가님에게 메일을 보냈다.
답장이 3일 뒤에 왔고, 소희 작가와 나는 7월부터 본격적으로 같이 일하기 시작했다. 소희님의 소개로 배경 디자이너도 쉽게 구했다. 신이슬 작가의 포트폴리오는 좀 감동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파일을 열었는데, 요청하지도 않았던 안임신 러프 배경이 세장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안임신: 애니메이션 제목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의 줄임말
캐릭터 디자인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생각하긴 했다. 우선 내가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유진이부터 상상해봤다. 우선, 팔다리가 빼빼 마른 여자를 그리고 싶지 않았다. 마블처럼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한 캐릭터도 싫었다. 박세리 선수 같은 몸과 카리스마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개그우먼 박나래의 체형도 참고했다. 연애시절에는 긴 머리였겠지만 결혼하고서는 칼 단발을 유지하는 커리어우먼을 상상했다.
반대로 정환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으면 했다. 영업직에서 일할만한,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주는 훈남 스타일. 그러나 개성과 카리스마가 없는 얼굴을 원했다. 나중에 안 거지만, 이런 캐릭터를 그리기가 가장 어렵더라.
김삼신 박사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여야 했는데, 딱 떠오른 인물은 오은영 박사님이었다. 하지만 김삼신 박사의 전사를 써보니 삼신은 양기 넘치는 유형은 아니고, 확실히 ‘음침한’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라, 오은영 박사 같은 분이 남성 임신 같은 기술을 개발할 리가 있나! 그러다가 이용녀 배우를 떠올렸다.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서 인신매매조직 최종 보스로 나왔었는데, 음기 쪽(?)으로 그만한 카리스마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희 작가에게 해당 연예인 사진을 찾아서 전달했다. 소희님은 일주일 만에 김삼신 박사를 뚝딱 그리더니, 유진도 일주일 만에 뚝딱 그려냈다. 소희님이 러프 스케치를 한 장 한 장 보여줄 때마다 우리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정환이는 시간이 좀 걸렸는데, 이건 내 잘못이 크다. 시나리오를 다 썼는데도 정환이 야비한 마초인지, 그냥 어리바리한 놈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헷갈린다.
나는 특히 최남진, 최성호 부자 디자인이 기가 막히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 두 사람의 실루엣이 잘 대비되는 샷을 못 만든 것이 매우 아쉽다. 두 캐릭터 모두 사다리꼴이지만 서로 위아래를 뒤집은 모양이다. 둘 다 답 없는 가부장인 것은 같은데, 남성 임신에 대한 입장이 정 반대인 것이 잘 반영되어있다.
신이슬 작가는 시나리와 콘티를 기반으로 배경 목록부터 작성했다. 그 디테일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여러 가지를 질문해주신 덕분에, 내 머릿속에 희미하게만 있었던 공간들이 점점 뚜렷해졌다.
처음에는 개성이 쫙 빠져있는 공간 스케치가 나왔는데, 이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서로가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이후 좀더 손으로 그린 맛이 나도록 일부러 선을 비뚤게 그리고, 브러쉬를 추가하면서 최종 아트웍에 가까운 그림이 나왔다.
나는 특히 이슬님의 소품 디자인 디테일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삼신 진료실 벽에 걸린 각종 액자 디자인이 백미라고 생각한다. 누가 돈만 넉넉히 주면 올 칼라 아트북도 만들 텐데. 공들인 미술이 몇 초 만에 휙휙 지나가는 것이 너무 아쉽다.
소희, 신이슬, 이 두 사람의 작가가 7, 8, 9월 세 달 동안 안 임신 미술의 기틀을 책임지고 다 닦았다. 30분짜리 라이브 액션 독립영화는 캐스팅, 로케이션에 얼마의 시간과 돈을 들이는지 모르겠네. 암튼 우리 영화는 두 명이서 다 했다.
휴. 이쯤에서 디자인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한다. 그전에 스포일을 하나 하고 싶은데, 앞서 말했듯이, 안 임신 캐릭터 디자인은 실제 유명인과 배우에서 많이 따왔다. 그런데!!! 실제로!!! 그중 한 분을!!! 애니메이션 목소리로!!! 캐스팅하게 되었다!!!!
누군지 궁금하신가요? 궁금하면 계속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