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에서나온사람 May 31. 2022

안임신을 쓰기 시작하다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안임신: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생애 처음 시나리오를 써 본 것은 딱 30세가 되던 해였다. 단편만화 워크숍이었는데, <살인의 추억> 각본을 각자 읽어 오는 것이 시나리오 작법 수업의 전부였다. 시나리오라는 건 눈에 선명하게 보이도록 쓰는 글이구나 하고 어렴풋이 알았다. 영화아카데미에 들어와선 7분이 채 안 되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대사가 없는 이야기라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져 바로 스토리보드로 넘어갔다. 그러니까,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은 생애 두 번째 시나리오가 되겠다.


이 전까지 내가 만들어본 이야기는 모두 내가 직접 겪고 느꼈던 것에서 출발했다. 남의 이야기는 할 생각도 못했고, 할 줄도 몰랐다. 단편 애니를 거의 다 만들어갈 때쯤, 지도교수가 장편 과정에 지원할 시놉시스를 써 오라 했다. 세 개를 주문했는데 수업 전 날까지 한 개는커녕 한 글자도 못 썼다. 그동안 뭐 새롭게 겪은 일이 있어야지 이야기를 쓸 텐데, 2020년 한 해 동안 내가 한 것이라곤 학교와 기숙사를 오간 일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백지를 들고 수업에 들어갈 배짱은 없어서 뭐라도 써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가장 친숙한 주제로 글감을 정했다.


임신.


친구들이랑 만나면 맨날 하는 얘기가 임신이다.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임신도 해 본 적 없지만, 할 말은 많았다. 한 커플 이야기를 건너 들었다. 각자의 부모님께 내가 불임이라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자 둘이 언약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걸 고대로 쓰자니 양심도 찔리고, 뻔한 결말이 그려져서 바로 접었다. 딩크족 부부가 자유롭게 살다가, 중간에 어떤 깨달음을 얻고는(으악) 아이를 낳아 참 행복을(으악) 얻게 되는 결말. 이딴 걸 안 쓰려면 어째야 되나? 진짜 불임부부로 바꿔보자. 어느 쪽이 불임이어야 ‘이야기’가 될까? 일단 여자가 불임인 것으로 했다. 대한민국에서 불임 남자가 서러워 봤자 불임 여자만큼 서럽겠나 싶어서.


나는 난임 여자의 서러움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봐왔다. 뭐 되지도 않는 일가족들이 다른 성씨를 가진 여성에게 은근히 일삼던 언어적 폭력을 똑똑히 기억한다.


또, 나는 다 커서도 봤다. 여자는 육아 휴직하고 젖몸살 때문에 까무러치게 아파서 살이 죽죽 빠져나가는데, 남자는 장모님이 차려다 바치는 밥을 꼬박꼬박 얻어먹으며 자신의 커리어를 탄탄히 쌓아나가던 행태를.


그러면  영화를 여자의 한으로 채울 것이냐. 그건 내가 잘할  있는  아니었다. 어떡하면  가부장제를 놀려 먹을  있을까 궁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구가 반짝 켜졌다.


남성 임신.


답을 찾자마자 글을 쭉쭉 써 내려갔다. 지금 와서 맨 처음 썼던 시놉시스를 읽어보니 독기가 아주 그득그득하다. 그냥 화가 나서 비공개 블로그에 써 재낀 쪽글 수준이다. 안임신의 물꼬는 두 번째 시놉시스부터 터지기 시작했다. 주변 인물을 추가해보라는 지도교수의 조언에 따라 남자 주인공(이하 정환)의 가족들을 설정했다. 어렵지 않았다. 그냥 우리 집 식구들을 갖다 놓으면 될 일이었다. 근데 그냥 가부장적이기만 하면 새로울 게 없는데? 어쩌지? 예상외로 남성 임신을 찬성하는 가족 구성원이 있다면, 그 근거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정환의 할아버지(이하 남진) 캐릭터가 탄생했다.


남진: 느그가 적은 나이도 아니고, 이제는 마, 못 기다리겠다. 우리 최 씨 가문이 또 그렇게 꽉 막힌 집안은 아니거든. 그리고, 마, 최씨가 최씨를 낳으면 적통 중의 적통 아이가!! 하하하하하!!!!!


이런 걸 힙합에서 뭐라고 하지. 펀치라인? 암튼, 이 대사를 떠올리고 나서는 이 영화의 노선을 확실히 코미디로 잡았다.






2020년 12월부터 2021년 2월까지 네 번의 워크샵을 거쳐 시놉시스를 썼는데, 4차 시놉까지도 김삼신 캐릭터는 없었다. 남성 임신 기술을 개발한 의학박사는 있었지만 감초 역할에 불과했고, 이름도 없었다.


2021년 3월에는 영화아카데미 장편 과정 서류 접수를 해야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혼자 디벨롭하는데, 갑자기 김삼신이 튀어나왔다. 주인공 부부에게 아기를 주는 사람이니까, 음..삼신할매? 오! 의사 이름을 삼신으로 해야겠다. 앗? 그러면 의사 삼신의 진료실은 토속신앙 분위기여야 할까? 그럼 판타지 요소도 좀 첨가해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4차 시놉대로 의사 캐릭터가 그냥 조연이었다면? 필름을 완성하고 보니 김삼신은 이 영화의 컬러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캐릭터가 되어있었다. 삼신이 나오기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왜 굳이 애니로 만드냐고 딴지도 많이 걸렸다. 멘토 선생은 최종 시놉을 읽고선 나에게 고전 영화 한 편을 권했는데 아주 적격인 추천이었다. 김삼신 박사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속 전쟁광 또라이 기질을 계승한 캐릭터다.


김삼신: 아기가 많이 태어나려면? 그냥 가임인구 숫자를 늘리면 되잖아요? 그게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후후후.
김삼신의 킹받는 파워포인트



그 후 한 달 동안 트리트먼트를 썼고, 그리고 1주일 뒤인 2021년 4월 29일, 시나리오 1 고가 나왔다.







- 다음에 계속 -






여기서 잠깐, 이번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영화 용어들 때문에 혼란스러우셨다면? 걱정 마십시오. 야매선생인 제가 가르쳐드립니다.


*시놉시스: 기승전결을 모두 담은 한 장 짜리 글.

*트리트먼트: 시놉시스에 살을 붙여 좀 더 길게 쓴 글.

*시나리오: 트리트먼트에 살을 붙여 좀 더 길게 쓴 글인데, 시나리오부터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가 보는 글이기 때문에 아주 상세해야 한다. 대충 예를 들면, 장소, 날짜, 시간, 날씨, 대사, 효과음 등이 있어야 한다.

*스토리보드: 시나리오에 서술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낸 문서. 다른 말로는 콘티.






아 혹시,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애니메이션 학사과정도 궁금하신가요?

*한국영화아카데미 정규과정 - 1년 과정. 졸업작품으로 10분 안팎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듭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 - 30분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만듭니다.

정규과정에서 장편과정으로 자동 승급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이야깃거리로 다시 심사를 받아야합니다.

정규과정을 졸업해야만 장편과정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지원해보세요. 만들라고 돈도 주거든요.



-그럼 진짜로 다음에 계속 -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가 임신하는 영화, 이미 있지 않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