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그리고 제도가 옭아맬 수 있는 감정은 없다
2020년 내가 꼽는 최고의 영화이다. 사실 이 영화 개봉일 전후로 코로나가 확산하면서 이 달 이후로는 영화관을 가기가 어려워졌다. 나름 독립영화관에 가는 재미를 붙이려는 참에 이런 일이 터져버려서 참으로 슬프다. 이 영화에 와인이 나오는데 결국 영화가 끝난 뒤에 참지 못하고 와인집으로 향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영화 내내 긴장감이 넘쳤다. 사실 스킨십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영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 화가 마리안느와 아가씨 엘로이즈가 영화 내내 끌고 가는 감정선에 긴장감이 넘쳤다. 혼자 계속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봤다.
화가인 마리안느는 아가씨의 어머니에게 결혼 성사를 위한 초상화를 몰래 그려주라는 부탁을 받는다. 영화 초반 마리안느는 아가씨를 사랑이 아니라 관찰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동굴에서의 키스신이 참 좋았다. 관찰의 장소가 둘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로 변했다는 걸 알리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핵심 서사는 오르페우스 이야기로부터 펼쳐진다.
오르페우스와 그 아내가 동굴을 빠져나갈 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신의 계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즐겨봤다면 한 번쯤은 생각나는 이야기일 테다. 오르페우스는 신의 계시를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동굴을 다 빠져나갈 즈음에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신의 계시를 따르지 않은 대가로 아내는 죽게 된다.
영화에서도 시녀와 주인공인 아가씨 엘로이즈는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생각을 펼친다. 보통의 통념과 비슷하게 시녀는 오르페우스가 조금만 더 참으면 되었을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것은 사랑이라고 그를 두둔한다.
사실 오르페우스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신의 계시는 부당하다. 인간이 가지는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계시를 거역한 대가로 아내의 목숨을 앗아가는 서사는 사회가 강요하는 바를 개인이 이루지 못할 때 이것이 부당하더라도 벌해버리는 사회제도와도 닮았다. 오르페우스가 신이 내릴 벌을 알고 있음에도 뒤를 돌아본 것은 제도가 옭아맬 수 없는 감정인 것이다. 아마 엘로이즈가 오르페우스를 두둔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중심으로 두 주인공이 당시 금기된 사랑을 대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가씨의 초상화를 완성하고 그 집을 도망치듯 나서는 마리안느는 아가씨의 부름에 뒤돌아본다. 한편,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의 재회에서 아가씨는 마리안느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고 울면서 웃는 묘한 감정을 드러내지만 결국 쳐다보지 못한다. 아가씨는 재회 당시 이미 결혼을 해 아이를 낳은 상태였다. 제도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마리안느는 자신의 감정을 표할 수 있었던 반면 아가씨는 더 이상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아가씨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이후 그려진 초상화에서 엘로이즈는 손가락으로 책 28페이지를 살짝 들추고 있다. 이 28페이지에는 큰 의미가 담겨있다. 두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던 시절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자화상을 그려줬던 그 페이지이기 때문이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하라"라는 대사가 앞에 나오는데 아마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와의 추억 그리고 사랑을 계속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페미니즘적 요소도 돋보였다. 이 영화에서 여성 화가로서 마리안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상황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마리안느의 그림 실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마리안느가 자신이 아닌 아버지 이름으로 작품을 냈을 때 칭찬을 받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마리안느는 시녀가 임신 중절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담아낸다. 중요하지 않은 상황을 담아내는 비주류 여성화가가 아주 중요한 사회적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그 모순에서 여성 문제를 바라보는 당대 사람들의 시각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아름다운 영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푸른 바다와 빨간색 초록색 드레스, 부서지는 하얀 파도. 그 색감이 두 주인공의 사랑을 더욱 강렬하게 담아낸다.
포스터를 오랜만에 보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계절과 공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 대한 사랑을 평생 기억하듯이 나도 이 영화를 잊지 못할 사랑으로 기억하게 된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또 한 번 봐야겠다.